[Review] 청춘이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 겨울나그네

글 입력 2024.01.26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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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자신의 청춘을 상징하는 작품이 있다. 1980년대에 젊은 날을 보냈던 이들에게는 최인호 작가의 『겨울나그네』가 그런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신문연재소설로 시작해 인기를 얻으며 영화로 또 드라마로, 나중에는 뮤지컬로도 만들어졌던 이 작품은 흰 눈처럼 순수했던 첫사랑과 너무 일찍 삶을 마감한 한 청춘의 이야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에게 청춘의 한 조각으로 남아 있는 <겨울나그네>가 최인호 작가 10주기를 맞아 뮤지컬로 돌아왔다. 이번 공연은 1997년 초연, 2005년 재연에 이은 삼연이다.

 

 

[겨울나그네] 포스터 (제공-에이콤).jpg

 

 

겨울나그네는 복잡한 내용이 아니지만,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여러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아련한 첫사랑, 엇갈린 삼각관계, 또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끝내 비극으로 치닫는 한 사람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영화로만 이 작품을 접했을 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 극장에 입장했을 때 무대 위에 커다란 직사각형 두 개가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서로 겹쳐 있는 모습을 보고 인상이 달라졌다. 나는 이 이야기가 상반되는 두 세계를 오가다가 결국 아무데도 정착하지 못한 나그네의 비극으로 느껴졌다.


영화와 뮤지컬 초연은 민우를 추억하는 현태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반면, 이번 공연은 피를 흘리며 클럽에 쓰러진 민우의 모습부터 보여주며 호기심을 자극한다. 관객이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궁금해할 때 <캠퍼스의 새봄>이 흐르며 멀끔한 모습의 민우가 등장한다. 이때의 그는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의대 본과 2학년에 재학 중인 대학생 한민우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같은 학교 학생 다혜와 부딪히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 아버지의 죽음과 사업실패를 겪고 출생의 비밀까지 알게 된 민우는 자신이 속한 안온한 세계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한다. 민우는 그렇게 방황을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다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민우의 감정선을, 공연에서는 '사람을 쳤다'라는 넘버로 좀 더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사람을 쳤다'의 가사는 대부분 앙상블의 몫이다. 주로 지금까지 함께 어울리던 민우를 배척하고 헐뜯는 내용이다. 이 넘버는 민우가 예전에 자신의 자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세계에 더 이상 속할 수 없음을 알려준다. 작은 일로도 코너에 몰리기 쉬운 20대 초반의 청춘은 그렇게 집을 떠나 자신이 상상도 못 해본 세계로 떠밀리듯 나아간다.

 

 

[겨울나그네] 공연사진7 (제공-에이콤).jpg

 

 

민우가 친어머니의 출신을 따라 넘어간 '다른 세계'는 클럽 나이아가라로 대표된다. 이전의 민우가 속한 곳이 첫사랑을 만나는 '낮의 세계'라면, 이곳은 향락과 폭력이 지배하는 '밤의 세계'다. 이쪽 세계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로라킴과 허버트, 그리고 제니의 넘버는 앞서 민우와 다혜, 현태의 풋풋하고 설레는 분위기의 넘버와 상반된다. 그러나 그들의 넘버에서 드러나는 건 바깥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이들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이쪽 세계에도 민우처럼 다른 세계에 눈길을 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제니다. 민우가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자신이 있던 세계에서 추방된 것에 가깝다면, 제니는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을 스스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모색하는 인물이다. 지금과는 다른 행복을 꿈꾸는 제니에게 민우는 일종의 동아줄이다. 그렇게 이해하고 나면 왜 이 공연이 민우나 다혜, 현태가 아니라 제니가 혼자 부르는 노래로 시작되어야 했는지 알게 된다.

 

 

[겨울나그네] 공연사진5 (제공-에이콤).jpg

 

 

극이 진행되며 어느덧 민우의 청춘은 끝을 향해간다. 청춘이 끝나간다고 표현한 것은 그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청춘은 방황을 끝내고 한 군데 정착하기로 결심하면서부터 마무리된다. 민우도 마찬가지다. 제니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면서 민우는 이전 세계로의 복귀를 완전히 포기한다. 아련한 첫사랑을 옛사랑으로 남겨두고, 아버지의 유언을 상기하면서 그는 살아갈 결심을 한다.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민우에게 사랑에 빠졌던 다혜의 청춘도 끝나가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꿋꿋하게 민우를 기다리는 인물이지만, 민우에게 가정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본 다음에는 마음을 접는다. 그리고 언제나 곁에 있어준 현태의 손을 잡는다. 현태 역시 놀기 좋아하는 대학생에서 어느덧 멀쑥한 사회인이 되었다. 더 이상 두 세계를 오가는 이들은 없다.

 

 

[겨울나그네] 공연사진4 (제공-에이콤).jpg

 

 

이대로 이야기가 끝난다면 <겨울나그네>가 지금처럼 많은 이들에게 청춘의 상징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안타깝지만 민우가 죽음으로써 완성된다. 그토록 방황하던 인물이 비로소 한 곳에 정착해 살아갈 의지를 다잡은 시점에 갑자기 맞는 죽음이기에 더욱 허망하다. 그러나 그렇게 죽었기 때문에 민우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한 청춘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제목인 '겨울나그네'는 당연히 민우를 의미한다.


민우를 떠나보낸 다른 인물들은 마지막 넘버 '레퀴엠'을 부른다. 이 넘버는 어른이 되지 못하고, 아무데도 정착하지 못하고 나그네이자 청춘으로 남은 민우와 달리 다른 이들은 자신의 삶을 쭉 살아갈 것이라는 의미이자 각자의 다짐이다. 이들은 겨울을 넘어 봄으로, 여름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리고 어느덧 민우를, 민우와 함께한 자신들의 혼란스럽던 시간을 추억하고 미화할 것이다. 모든 나이 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이건 청춘을 떠나보낸 사람들만의 특권이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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