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수필을 좋아하세요... [도서/문학]

깊은 사유를 담은 산문집 추천 3
글 입력 2024.01.24 14:43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이 세상에서 단 한 갈래의 글만 읽을 수 있다면, 나는 조심스럽게 수필을 선택할 것이다. 첫 단어가 그 이유를 모조리 대변한다. ‘이 세상’. 내가 사는 세상. 수필은 이곳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있다. 소설은 또 다른 세상을, 시는 너머의 차원을 체험할 수 있는 경이를 선사한다지만, 내가 가장 궁금하고 굶주리며 절박한 장소는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더 멀리 가지 않아도 도처에서 햇살은 쏟아진다. 유별난 주문을 불어넣지 않아도 나무는 자라고 있다. 지구 반대편에선 지금 고래가 수면 위로 튀어 오르고 있다.


그중 가장 신비로운 일은 나와 당신이 살아가는 일. 지구의 신비한 리듬에 동승한 우리는 같은 낮과 밤을 나누고 있다. 그러면서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따라 각기 다른 태도와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 고유성에서 새어 나오는 빛에 눈이 부신 나머지 나는 글을 쓰고, 내가 아닌 누군가도 쓴다. 예찬하고, 미워하고, 다시 긍정하면서. 우리를 품은 이 세상에 대해 아주 노골적으로. 허구에서 느낄 수 없는 끈적한 생동감을 수필은 우리에게 선사한다.


수필은 누구나 쓸 수 있다. 이건 중대한 매력이다. 다양한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다채로이 풀어놓는다. ‘수필가’는 대체로 그들의 은밀한 이중직업이다. 그러나 독자 입장에서 이 너그러운 접근성은 수필의 오점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쓸 수 있다는 말은 아무거나 읽게 되리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범람하는 대-에세이 시대에서 우리는 어떤 글을 우리 곁으로 건져 올려야 하나. 이 막막한 질문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깊은 숨을 머금게 해줄 3권의 산문집을 소개하고자 한다. 깊은 사유가 주는 지적인 쾌감에 빠진 채 수필의 거대한 품속에서 출구를 잃어보길 바란다.

 

 

스크린샷 2024-01-24 오전 5.04.29.jpg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심보선


 

  
그러니 지금 영혼의 희미한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미명을 맞이하는 나는, 내가 시인이든 아니든 그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저 미명 이후의 아침만이 나의 유일한 윤리가 될 것임을 아는 것이다. (23p)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이 긴 세월 동안 다양한 지면에 발표한 글을 모은, 말 그대로 산문’집’에 가장 어울리는 책이다. 1부, 2부, 3부로 목차가 나누어져 있긴 하지만, 글의 주제가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하지는 않는다. 다만, 심보선이다. 이 말을 하고 싶었고, 이거면 충분하다. 그는 이제 보증수표가 되었다. 실패가 없기는 물론, 늘 탁월하다. 그의 시만큼이나 산문 역시 탁월하다.

 

좌뇌로 사회학을 하고 우뇌로 시를 쓴다는 그의 양 뇌는 산문이라는 경계선에서 도리어 강력한 폭탄처럼 융합되어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한다.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자신인 경지에 오른 작가는 겸손하게도 자신의 맞은편에 놓인 세상에 대한 글을 쓴다. 첫 번째 글인 ‘영혼의 문제’부터 그 사유의 깊이에 감탄이 나올 정도다. 다양한 주제의 산문들이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고 있지만 모두 심보선이 아니면 쓰지 못할 글들이다. 그의 사유와 재치, 그리고 문장력에 샘이 난다.

 

 

 

<아무튼, 메모>, 정혜윤


 

  
메모는 나를 속인 적이 없다. 결국은 힘이 된다. 괴로움 속에서 말없이 메모하는 기분은 얼음 밑을흐르는 물소리를 듣는 것과도 같다. 곧 봄이 올 것이다. (57p)
 

 

작가 정혜윤의 직업이 라디오 피디인 건 고사하고, 우선 나는 그의 글에만 집중하고 싶다. 직업적 특성이 글을 쓰는데 많은 소재를 가져다주고 그걸 책에서 명백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활자에 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이유는 그가 글을 잘 쓰기 때문이다. 책을 내는 작가가 글을 잘 쓴다는 건 독자에게 고맙고 기쁜 일이다. 책을 펼치는 행위에 좋은 글을 기대하는 마음이 함께 동반되지만 그렇게 마주한 글이 정말로 좋을 때, 우리는 작가에게 고맙다. 글을 읽으면서 기쁘다. 그리고 정혜윤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과잉되지 않은 간결한 문장과 선연하면서도 미적인 사유가 언제나 반짝인다.

 

그는 좋은 글을 쓴다. 여기서 응당 질문이 떠오른다. 좋은 글이란 무엇인가. 그럼 나는 좋은 글이 좋은 미래를 말하는 글이라고 정의 내리고 싶다. 책을 읽는 행위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일이고, 기록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다. 정혜윤도 성실한 기록가다. 오랜 시간 메모를 지속해 온 그는 메모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 165쪽의 글을 펴낼 만큼 통달했다. 모든 메모는 미래로 향한다. 더 나은 미래로. 그러므로 메모에 대한 이야기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들리며, 잘 살고 싶은 마음을 끌어낸다. 메모를 향한 예찬을 읽으며 메모가 하고 싶어지고, 메모를 하면서 잘 살고 싶어지길 바란다. 적어도 나는 그랬으니.

 

 

 

<행복의 충격>, 김화영


 

  
지중해안의 따뜻한 가슴,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39p)
 

 

‘행복의 충격’을 읽고 정말 엑상프로방스에 다녀왔다. 작년 여름이었다. 스무 살 때 처음 접한 나는 이 책에 내 몸을 내던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1969년 홀로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로 유학을 떠난 한 지식인이 몸소 감응한 청춘과 지중해 예찬. 유려하고 정제된 문장들 속에서 들뜬 마음을 겨우 부여잡은 청년의 떨리는 필체가 나는 보였다. 세대가 지속되는 한 청춘은 불멸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75년에 쓰인 글에게 그 푸르름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느낌이었다. 머금은 사유가 깊어 문장 문장마다 발이 자꾸 빠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어려웠다.


출판된 지 50년에 가까워지는 책의 나이는 어느덧 중년이다. 청춘의 조각을 오롯이 품은 앳된 마음의 어른. 한국에 이런 산문이 있어왔다는 게, 내가 태어났을 때도 존재했고내가 이 세상을 떠나도 책만은 여전히 존재할 거라는 사실에 마음 한 켠이 풍성해지는 기분이다. 다음 세대의 청춘들도 이 책을 읽고 나와 같은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행복도, 청춘도, 활자도 영영 저물 일 없으니 말이다.

 

 

 

문충원.jpg

 

 

[문충원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