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정한 미스터리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1.08 17: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영화 <카일리 블루스>에 관한 오피니언을 작성했을 때 이나경 소설집 <극히 드문 개들만이>의 일부 구절을 소개한 적 있다. 언제 한 번은 이 소설집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마음먹은 지 두 달가량 지났다.


<극히 드문 개들만이>를 알게 된 순간을 얘기하려면 재작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지긋지긋한 세 시간의 통학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과제, 독서, 게임 등 핸드폰으로 할 수 있는 것들 뿐이었다. 매번 출퇴근 시간이 겹쳐 무거운 가방을 멘 채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거나 손잡이를 잡고 창밖만 바라보거나 하던 날들이었다.


k912835128_1.jpg

 

그러한 무료한 시간을 유의미하게 바꿔준 SF 계간지가 있었다. 밀리의 서재를 뒤적이다 발견한 아작 출판사의 <어션 테일즈>. 솔직한 말로 깔끔한 표지와 제목에 이끌려 열어보았다. 흰 바탕에 비비드한 파란색만 사용된 표지, 마치 누구든 이 <어션 테일즈>라는 제목에 매혹될 것이라는 걸 장담하는 듯한 디자인이었다.


The Earthian Tales. 직역하면 ‘지구인(혹은 지구 생물) 이야기들’이다. 지구인들이 만든 지구에 관한 이야기. 그곳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이나경 작가였다. 이나경 작가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쓴 글이었고, 그중 이나경 작가의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사실 제가 몇 년 전에야 알게 된 사실이 있어요. 

저는 눈으로 본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내지 못해요. 

그런 증상을 일컫는 단어가 있더라고요. '아판타시아'라고. 

저는 그때까지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누구 얼굴을 기억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걸 못 해요. 

심지어 제 가족도. 몽타주를 그려야 한다, 이목구비를 설명해라, 라고 하면 아무 기억도 안 나요. 

묘사를 못 해요. 머릿속에 그리지도 못하고, 눈앞으로 직접 봐야 알아요. 

심지어 꿈도, 이미지 없이 꿔요. 느끼기만 하는 거죠.”

 

 

이러한 작가의 대답에 대담자는 놀라움을 내비친다. 그도 그럴 게 그는 ‘단편 <극히 드문 개들만이>를 읽으며 꼬리를 흔들거나 시무룩해 있거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는 강아지의 털 한 올 한 오라지 상상했던 독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이 소설이 궁금해졌다. 묘사는 소설에서 생동감과 몰입감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묘사 없는 글에서 묘사를 상상했다니.


이후 나는 종종 중고서점에 들를 때마다 검색대에서 이나경을 검색했다. 찾지 못하길 반복, 어느 날 예상치도 않게 SF소설 코너에서 익숙한 제목을 발견하였고, 나는 곧바로 계산대로 향했다.

 

 

KakaoTalk_20240108_180152432.jpg

 

 

<극히 드문 개들만이>는 타임루프에 빠진 골든 리트리버 ‘보리’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는 ‘옴니션트’가 등장한다. 플레이어들은 이 ‘옴니션트’를 이용해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낸 뒤 그들을 관찰하는데, 소설가 지망생들은 그들의 외형, 성격, 일상, 사건을 이용해 소설을 쓴다.


보리도 이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개다. 주인공이 만들어놓은 세계에서 평범한 가족과 함께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오빠와 아빠를 잃게 된 후, 보리는 엄마 배은실과 함께 둘이서 살아간다. 배은실은 하루를 보낸 뒤 밤이 되면 돌아온다. 보리는 하릴없이 돌바닥에 누워있기만 한다. 단조로운 나날의 연속, 엄마는 쉰일곱 살이 되고 보리는 열세 살이 된다.


그렇게 주인공은 옴니션트를 잊다가 60일 만에 옴니션트에 접속한다. 쌓인 데이터 영상을 보던 주인공은 이전보다 훨씬 더 단순해진 보리의 삶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의아한 점을 찾아낸다. 엄마 배은실이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나간다는 것. 그리고 점심에 나간 배은실은 단 하루도 집에 돌아온 적이 없다는 것.


보리는 매일 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었다.


보리는 이를 깨닫고 배은실을 찾아 떠난다. 그녀가 죽지 않도록,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실패와 약간의 진전을 반복하며 말이다.


 

어둠이 물러나 새 아침이 밝았을 때 여전히 시간이 고여 있고 똑같은 하루를 재차 삼차 반복해야 한 대도 상관없었다. 오늘 보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엄마를 구하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러기 위한 삶이었다. 거짓된 목적일지라도 있는 편이 나았다.

 

- <극히 드문 개들만이> 중

 

 

목적 없이 집에 있는 것보다, 무언가라도 하고자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챙겨 들고 나서는 하루가 반짝인다는 걸 여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보리도 그랬을 테다. 노쇠한 상태일지라도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반복하겠다는 의지와 엄마를 구하기 위함이라는 목적이 개라는 지구 생물만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어 더 절절하게 느껴진다.

 

 

“냉장고에 코끼리 집어넣기 말이야.”

“그거 유행 지난 지가 언젠데…. 첫째, 냉장고 문을 연다. 둘째, 코끼리를 넣는다. 셋째, 냉장고 문을 닫는다. 쉽잖아?”

“아니, 내가 궁금한 건 다른 거야.”

“응?”

“코끼리를 도대체 왜 냉장고에 넣어야 해?”

“뭐?”

 

- <냉장고에 코끼리 집어넣기> 중

 


<냉장고에 코끼리 집어넣기>는 <극히 드문 개들만이>의 맨 첫 장에 수록된 단편소설이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 이는 일종의 공대 허무 개그라고 한다. 주인공은 그 방법을 ‘쉽다’라고 하지만, 선우는 그 이유에 집중해 묻는다.


문과생인 나는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기에,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냉장고에 코끼리를 집어넣으려고 하니 겹겹이 있는 칸들이 걸렸고, 코끼리의 크기가 걸렸고, 코끼리의 무게가 걸렸다. 걸림 투성이라 머릿속에서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이란 문장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여러 저항이 생겨났다.


“대체 냉장고에 코끼리를 어떻게 넣지?” 같은 일관된 사고 속에서 “왜?”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이나경의 소설이라 생각한다.


만약 각 소설의 인물을 인터뷰한다고 하였을 때 “왜 그렇게 행동했어?”라고 묻는다면, 돌아오는 답변은 ‘이미 소설 안에 펼쳐져 있다.’라고 할 것만 같다. 그만큼 이 책은 설득력과 메시지를 담은 문장을 지닌다. (<누나 노릇>은 몇 번 읽어도 의문스럽지만…)


아무래도 이는 작가가 매 순간 ‘왜’라는 한 단어를 떠올렸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떻게 할 거야?’ 보다 ‘왜 할 거야?’를 생각하는 이는 많지 않다. 방법을 강구하는 이들과 특출난 아이디어를 뽐내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정작 목적이나 이유를 명확히 알고, 인지하고, 행동하는 이는 없다.


글을 어떻게 쓸 건지보단 글을 왜 쓸 건지, 그 이유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한시적인 글이 되지 않을 테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서 메시지만 찾아내길 고집한다면, 그건 또 아쉬운 독서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집은 그저 작가가 말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그러니까 이야기꾼의 이야기 꾸러미를 듣는 하나의 관객이 된 채로 즐기면 되겠다.


소설집 안에는 대개 미스터리한 글이 많은데, 그 사이사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다정한 시선이 있다.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고, 가끔 미묘한 저항이 나를 멈춰 세울 때도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떻게 내가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모르는 상태로 결말을 맞이한다. 그럼 보이는 것은 “나는 네가 현재를 살았으면 한다. 그건 대단한 특권이야.”와 같은 위로이다.

 

 

그래서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바라건대 내가 사랑하는 이 아홉 편의 소설이 독자 여러분의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다. 나아가 우리 모두에게 이상적인 전개는 2018년 3월 4일 일요일 밤에 이루어진 아래의 대화가 엇비슷하게 재현되는 것이겠다.


 자기 전에 아이가 앵무새 이야기를 지어내서 들려줌.

- 오늘은 늦었으니까 이만 자자. 재미있었어. 내일도 얘기해줘.

- 알겠어. 내 마음속에 이야기가 아주 많이 있거든.

 

- 작가의 말 중


 

마음속에 이야기가 아주 많은 이는 얼마나 다채로운 삶을 사는 걸까.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말해주고 들어주는 이들은 얼마나 다정한 하루를 사는 걸까.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러므로 이나경 작가가 앞으로 더 많은 다정한 미스터리를 들려주길 바라본다.

 

 

 

에디터 태그.jpg

 


[조유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