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킥킥과 끅끅과 흑백으로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가 전하는 담백하고 따뜻한 위로
글 입력 2024.01.03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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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드리프트


 

때때로 삶은 관성에 의해 추동된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시골이다. 도시화되지 않은 시골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규칙적인 자연의 섭리에 나의 삶을 규격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봄이 오면 씨앗 심고, 가을에는 추수하고, 겨울에는 놀지, 하시던 동네 할머니 말씀마따나. 주인공 '모금산'의 고향 충청남도 금산 역시 그런 작은 시골 마을이다. 동시에 그곳은 나의 고향이기도 하며, 지금 이 글조차도 충청남도 금산에서 쓰고 있다. 그래도 그렇지, 금산에 산다고 해서 이름이 '모금산'이라니, 이를테면 '김서울'이나 다름없는데 '모'도 '금산'도 너무 생소하니까 오히려 어색하지가 않은 거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없던 이유를 떠올려 보자면, 그건 금산에서 자란 나에게만 느껴지는 기분 좋은 어색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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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삶은 관성이다. '모금산'은 관성을 넘어 강박적이라고 느껴질 법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그의 하루는 작은 동네 이발소에서 시작된다. 이발소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정시출근과 정시퇴근이라는 시간적인 측면뿐 아니라, 손님의 고개 각도를 똑바르게 유지시키면서 규격화된 스타일로 머리를 자른다는 점에서도 관성적이다. 일을 하지 않을 때 그는 수영장에 가고 늘 같은 치킨집에서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술로 하루를 마무리하곤 한다. 더하여 동생네가 보내 준 반찬을 거절하는 이유가 다름 아닌 간이 너무 짜기 때문이라는 그는 식습관조차도 강박적이다.

 

그런 관성을 깨부수는 드리프트는, 모금산이 병원에서 위암을 선고받으면서 시작된다. 죽음의 가능성이 성큼 눈앞에 다가오자, 그는 전에는 안 하던 일들을 하기 시작한다. 같은 수영장에 다니던 자영과 늘 혼자 가던 치킨집에서 술을 마시자고 제안하고, 결정적으로 그는 갑자기 서울에서 영화 일을 하던 아들 스데반과 그의 애인 예원을 불러 영화 한 편을 찍자고 한다. 모금산은 젊었을 때 배우를 꿈꿨으며, 그런 그에게 영화는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루고 싶었던 꿈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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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은 모금산뿐 아니라 그의 아들 스데반에게도 하나의 드리프트가 되었다. 스데반 역시 관성적인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습관적으로 불쌍하게 담배를 피우고 습관적으로 예원의 눈치를 보고 그러면서도 다시 영화 일을 시작할 용기와 에너지를 갖지 못한 스데반은 습관적으로 권태롭고 무기력하다. 그러나 모금산의 계획에 동참하면서, 스데반은 카메라의 단단한 감촉과, 찰진 편집의 기쁨과, 영화를 처음 발표할 때의 어색함을 다시금 느낀다. 습관이 되어 버린 권태와 무기력에서 벗어나, 스데반은 드리프트를 통해 서서히 삶의 경로로 복귀한다.

 

드리프트는 판단이 아닌 직감에 기초한다. 앞에 갑작스레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가고 있는 길이 틀렸음을 알아차렸을 때, 이처럼 드리프트는 옳고 그름에 대한 신중한 판단보다는 직감에 따른 순간적인 반응이다. 그러나 육중한 관성의 법칙을 깨부술 수 있는 것도 판단이 아닌 직감이다. 그 결과 마주한 길은 또 다른 미로가 될지도 모르지만, 때로는 그 길이 그토록 원했던 인생의 올바른 경로로 인도하고 있음을, 우리는 모금산과 스데반을 통해 알 수 있다.

 

 

 

왜 영화인가


 

이 영화의 독특한 점은 '영화 속 영화'라는 특징이다. 그렇다면 왜 영화인가? 왜 다른 무엇도 아닌 영화여야만 했는가? 영화는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는 삶의 단면이다. 거울 없이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삶은 렌즈에 의해 포착되어야지만 비로소 보일 때가 있다. 모금산, 스데반, 예원에게 영화는 하나의 거대한 렌즈가 되어 서로를 비추고, 일상적인 거리로부터 떨어져 서로가 서로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게끔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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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산의 영화는 스데반과 예원의 관계에서도 커다란 드리프트였다. 예원은 영화 일을 멈추고 무기력함에 빠져 있는 스데반에게 당장 일하라며 다그치는 인물은 아니다. 다만 약간의 답답함과 슬픔 그리고 큰 그리움을 가지고 그를 지켜볼 뿐이다. 그리하여 임대형 감독의 말마따나 영화 촬영을 위한 출장은 예원에게 이별 여행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마지막 희망, 모금산과 스데반과의 영화 촬영은 그런 의미이기도 했다.

 

정작 예원은 아버지의 계획을 엉터리로 여기는 스데반과 달리 이상할 만큼 모금산의 영화 촬영 계획에 열정적으로 동참한다. 그리고 촬영 도중 모금산과 대화하는 예원은, 평소 스데반을 대하던 때와는 비교될 정도로 표정이 다채롭고 신나 보인다. 그러나 예원이 그토록 적극적인 이유는, 영화를 촬영하는 모금산을 통해 스데반을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관심과 열정, 남의 말을 듣지 않아 고집불통이지만 그럼에도 엉뚱한 강단이 있는 모습, 예원은 모금산을 통해 그가 가장 사랑하는 스데반의 면모들을 본다.

 

모금산과 스데반은 친밀한 부자 관계는 아니지만 아주 닮아 있다. 영화 촬영을 계기로, 스데반은 모금산으로부터, 그리고 모금산은 스데반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특히 모금산은 스데반을 "훌륭한 사람"인 예원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멍청한 놈"이라며 꾸짖는다. 어쩌면 모금산은 스데반의 친모도 그리고 평생 그리워해야만 했던 아내도 지키지 못한 "어리고 약"했던 자신을 그의 아들로부터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그가 "멍청한 놈"이라고 꾸짖을 때의 마음은, 한심함이 아닌 꼭 자신을 보는 것만 같은 연민과 애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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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금산의 영화가 인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렌즈가 되었다면, 셔터를 누르는 이는 예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원이 이 영화에서 지니는 역할은 지대하다. 촬영 중 NG가 나자, 예원은 스데반에게 자기 실수로 셔터를 누르지 않아 어차피 한 번 더 찍어야 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 거짓말이었고, 카메라는 NG 이후 스데반이 모금산과 나란히 서서 그의 양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는 장면까지 담았다. 어쩐지 그 영상에서 스데반과 모금산은 더욱 닮아 보인다. 스데반은 영상을 주욱 돌려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아버지를 이해했다기에는 부족할지라도 그때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제대로 본다.

 

모금산의 일기장을 찾아내 읽는 사람이 스데반이 아닌 예원이어야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무언가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 스데반과 모금산은 비록 정서적으로는 거리가 있는 부자지간이었지만 너무나 닮았다는 점에서 서로 제대로 바라보기에는 지나치게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원이라는 카메라와 영화라는 렌즈가 개입하여, 이들이 한 발짝 거리를 두고서 비로소 똑바로 바라보도록 했던 것이다. 모금산이라는 한 사람을, 스데반이라는 한 사람을, 그리고 서로로부터 자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원은 단순히 모금산과 스데반의 연결을 위한 매개체로서 소비되는 수동적 인물이 아니다. 예원이 스데반에게 "내 행복은 너한테 달린 게 아니야"라는 당찬 선언을 내던졌듯이, 그는 관객에게도 자신이 독립적이고 다부진 인물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폭탄일까, 불꽃놀이일까


 

예원과 스데반 외에도, 영화는 외로운 모든 이들을 위한 선물이 되었다. 모금산은 영화 상영일인 크리스마스에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극장에는 스데반과 예원 그리고 모금산을 아는 소수의 인원만이 어색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 관객들은 서로 거리를 두고 띄엄띄엄 앉아 있다. 아마 모금산의 시선에서, 그들은 모두 타인과 딱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외로운 이들이었을 것이다. 자영과 모금산이 이야기를 나눈 날, 자영은 그에게 "아저씨는 외로운 사람이에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중 그의 일기장에 적혀 있듯, 그야말로 자영의 외로움을 남몰래 소리 없이 알아주던 사람이었다. 책 속에 파묻혀 죽을 거라던 치킨집 사장도, 나중에 커서 '쪼다'가 될 거라는 동네 어린애도, 반찬을 짜게 하는 동생네도, 어리고 약했기에 떠나와야만 했던 스데반의 친모도, 모금산의 초대로 외로운 이들은 각자의 관성에서 벗어나 한데 모여 작은 드리프트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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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의 결과물인 무성 영화 <사제 폭탄을 삼킨 남자>는, 주인공이 강냉이 폭탄을 삼킨 후 폭탄을 토해내지도 못하고 체념하여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넨 뒤 폭발 버튼을 누르지만 결국 불발한다는 내용이다. 모금산이 위암을 선고받았을 때, 그의 심정이 딱 그러했을 것이다. 죽음이라는 폭탄을 삼킨 기분. 그러나 주인공의 폭탄이 불발했듯이, 모금산은 아무도 모르게 쓸쓸히 터져 사라지기보다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기쁨을 주는, 불꽃놀이 같은 사람이다. 영화 속 강냉이 폭탄이 불발됨과 동시에 모금산의 눈앞에 아름다운 불꽃놀이가 펼쳐졌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 폭발의 전조를 품고 살아간다. 누구 하나 대놓고 웃거나 우는 이가 없고, 그저 킥킥 숨죽여 웃거나 끅끅 삼키면서 운다. 감정이라는 것도 결국 폭발하고 터져 나와야 하는 건데 속에만 담아 두는 것이다. 또한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예원과 스데반, 모금산과 스데반이 그러하였듯이, 하고 싶은 말이나 꺼내고 싶은 진심을 삼키고 마는 외로운 이들이다. 감정도 진심도 터지기 일보 직전인 사제 폭탄처럼 삼키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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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관객들은,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자기 안에 있던 폭탄도 푸슈슉 소리와 함께 불발하는 것을 느끼며 킥킥, 피식, 웃는다. 대신 무언가 다른 게 터져나온다. 자기파괴의 폭탄이 아닌, 따뜻한 위로의 불꽃놀이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모>는 참 담백한 영화다. 감독이 흑백 영화의 형식을 선택한 것도, 다채로운 색조 영화와는 다른 담백하고 절제된 정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담백함이 참 사랑스럽다. 위로가 된다. 킥킥과 끅끅과 흑백으로, 마음속 작은 불꽃놀이가 터져 나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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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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