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 있어? -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도서]

'사랑해'란 글자를 보며 상상하는 어떤 단어든, 결국은 다 사랑에 포함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원래 그런 거니까.
글 입력 2023.12.2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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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말하듯 한 소녀가 여러 사람을 스치며 겪는 성장 모험의 이야기이다. 주인공 소녀는 가정 폭력을 일삼는 아빠와 그저 맞고만 있는 엄마 사이에서 지긋지긋함을 느끼고 그들은 자신의 가짜 아빠, 가짜 엄마라고 생각하며 '진짜 엄마'와 '진짜 아빠'를 찾는 여정을 떠난다. 이 소녀는 이름도 없고, 자신의 나이도 모른다. 우리는 이 소녀의 나이를 모르기에, 소녀 내면의 성장 이야기가 더욱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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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녀가 모험을 떠나 만나는 사람들의 순서로 전개된다. 맨 처음 황금다방에서 만난 장미 언니, 그리고 태백식당의 할머니, 폐가의 남자, 각설이패 삼촌들, 가출청소년들의 무리인 유미와 나리. 이 인물들은 모두 소녀에게 우호적이고 도움을 준다. 그래서 소녀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이 사람이 진짜 엄마일까?', '이 사람이 진짜 엄마였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며 의지한다.

 

가끔은 이들과 보내는 일상이 행복하고 무료해서 진짜 엄마를 찾겠다는 다짐마저 잊고는 한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소녀는 이들에게서 도망치거나, 버려진다. 몇 번의 이별을 겪었을 때 소녀는 더는 사람을 믿을 수 없고 만나기 싫다고 생각한다. 소녀는 맨 처음 부모에게서도 도망쳤기에 총 6번의 이별을 하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모든 건 선택의 문제다.

나에게도 포기할 것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중략)

허기에 익숙해지듯. 추위에 익숙해지듯. 헤어짐...에 익숙해지듯. 많은 것에 익숙해지는 동안. 나는 키도 조금 자라고 머리카락도 많이 길고 그리고, 무언지 모를 어떤 것도 불쑥 자랐다. 그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누구에게 확인받을 길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나는 느낄 수 있다. 폐가에서 남자가 주워온 책을 읽으며, 남자와 나란히 누워 차디찬 허공을 말의 온기로 조금씩 채우던 순간. 터미널에서 삼촌이 나를 꼭 껴안았던 그때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면서. 내 안의 어떤 것이 커졌다. 달수 삼촌이라면, 아니 할머니라면 아니, 폐가의 남자라면 그게 무엇인지 내게 말해줄 텐데. 내 안에 자라난 그 것이 나를 해칠 것인지. 나를 도울 것인지 혹은 나와 무관한 것인지.

 

 

나는 소녀를 보듬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을 보고 세상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소녀는 자신이 진짜 엄마에게서 버려졌다고 생각하고, 이별마다 자신이 그들을 버린 것이라며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욕한다. 하지만 자기 살기도 바쁜 사람들이 꾀죄죄한 소녀를 거두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세상이 착한 건지, 소녀가 착한 사람들만 만난 건지. 그들 중 누구라도 소녀를 이용하거나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지 불안해하며 읽었다. 하지만 소녀가 만난 사람들은 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소녀의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잘 알아본다'라는 말에 공감하기도 했다.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 있어?


 

소녀가 직접적으로 '사랑'을 말한 건 태백식당 할머니와 상호이다. 태백식당 할머니는 글자를 읽을 줄 모르시기 때문에, 그리고 소녀는 할머니에게 벙어리인 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직접적으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어떻게 표현하지? 오랫동안 그 문제로 고민을 했지만, 사랑한다는 걸 행동으로 어떻게 나타내야 하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결국 할머니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은 할 수 없었다. 아쉬운대로 벽에 그 글자를 붙여두기만 했는데, 할머니는 가끔 그 글자를 멍하니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맛있다. 밥 먹어. 잘 잤어. 할머니가 '사랑해'란 글자를 보며 상상하는 어떤 단어든, 결국은 다 사랑에 포함되는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사랑은 원래 그런 거니까.

 

 

사랑한다는 말 대신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소녀에게서 사랑을 못 받고 자란 소녀가 떠올라 가슴이 아팠다. 할머니를 와락 껴안는다든지, 할머니의 손을 꼭 잡는다든지. 소녀는 충분히 할머니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고 할머니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사랑해'라는 글자를 보며 상상하는 어떤 단어든, 결국은 다 사랑에 포함되는 거라고, 사랑은 원래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소녀를 보며 소녀가 정말 사랑스러웠고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왜 다들 소녀를 도와주는지도, 미워할 수 없는지도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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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각설이패 삼촌들과 이별하고 서울에서 만난 가출 청소년 중 상호에게 사랑을 말한다. 상호는 까칠하고 예민한 성격의 남자지만, 왠지 소녀에게만큼은 여린 남자아이 같다. 소녀는 상호에게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 있냐'고 물으며 자기에게 한번 해보라고 한다. 상호는 사랑한다고 말해본 적이 없다고 하고, 웃긴다며 너부터 하라고 한다. 소녀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후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둘은 웃어버린다. 그 정적과 웃음이 사랑의 표현이겠지. 하지만 상호가 직접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서 이 책을 읽는 내내 누구도 소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슬퍼졌다.

 

소녀는 황금다방의 장미 언니를 사랑했고, 태백식당 할머니를 사랑했고, 폐가의 남자를 사랑했고, 각설이패 대장과 달수 삼촌을 사랑했고, 유미와 나리, 그리고 상호를 사랑했다. 소녀는 자신을 스친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 표현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 알았을 것이다.

 

이 책은 소녀의 몸으로 마주하는 험난한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거친 세상 속에서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소녀의 성장을 보여준다. 나는 소녀의 이별마다 소녀 대신 눈물이 날 뻔하기도 했다. 만남의 소중함과 이별의 필연성을 알게 되는 소설이다.


나는 원래 최진영 작가님의 소설을 좋아한다. 작가님만의 문체는 엄청난 몰입력을 가지고 있어 읽을 '맛'이 난다. 이 책도 '구의 증명', '이제야 언니에게', '해가 지는 곳으로' 다음으로 읽은 책이다. 거치면서도 부드러운 문체와 소재의 책을 찾는다면 최진영 작가님의 소설을 강력하게 추천한다.

 

 

[김민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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