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함께 노래를 듣는다는 것 [음악]

음악은 우리들의 사연을 먹고 자란다
글 입력 2023.12.1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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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We Are Who We Are를 보았다. 여름에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고 함께 Blood Orange의 ‘Time Will Tell’을 듣던 케이틀린과 프레이저는 겨울이 되자 약속한 대로 볼로냐에서 열린 Blood Orange의 공연에 간다.

 

공연장 스태프의 도움으로 운 좋게 혼자 백스테이지에서 그들을 만나게 된 케이틀린은 무슨 노래를 제일 좋아하냐는 데브 하인스의 물음에 고민 없이 ‘Time Will Tell’을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케이틀린을 위해 공연의 마지막 곡으로 그 노래를 부른다. 그들이 우리를 위해 ‘Time Will Tell’을 불러줄 거라는 케이틀린의 문자를 받은 프레이저는 무대 바로 앞에서 노래를 들으며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고, 공연이 끝나자 케이틀린을 향해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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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에서 야에와 하루미치는 학창 시절 학교 건물 옥상에서 함께 이어폰을 나눠 끼고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를 듣는다. 사고로 기억을 잃은 채 오랜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든 야에는 우연히 아들과 함께 이 노래를 듣다가 기억 저편에 파묻혀 있던 첫사랑 하루미치에 대한 기억을 되찾고 애틋한 눈물을 흘린다.

 

<건축학개론>에서 서연과 승민은 CDP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을, <상견니>에서 황위시안과 리쯔웨이는 콘서트에서 검지와 중지를 펼쳐 든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우바이의 ‘Last Dance’를 함께 듣는다. <이쪽을 봐줘, 무카이 군>에서 무카이와 미와코는 풋풋한 청춘 시절에 연애하며 시브스를 함께 듣고, <사일런트>에서 츠무기는 첫사랑 소우에게 그가 좋아하는 스피츠의 음반을 빌려 듣고 자신의 감상을 적은 쪽지를 넣어 돌려준다.


또 <릴리슈슈의 모든 것>에서 아이들은 서로 죽고 죽이면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릴리슈슈의 노래를 들으며 위로를 받고, <애프터썬>의 소피에게 R.E.M.의 ‘Losing My Religion’은 습관처럼 아빠와 항상 함께 부르는 노래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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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영화나 드라마에서 관계는 때론 음악으로 정의되곤 한다.

 

함께 들었던 노래 한 곡만으로도 그들의 우정과 사랑을, 과거와 추억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를 어떤 장면도, 대사도 아닌 음악으로 기억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작품을 보면서 노래 한 곡이 인물들 사이에서 새롭게 서사를 획득하는 과정을 숨죽이고 지켜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과연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허구적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일까? 이미 완성된 상태로 세상에 나온 음악은 창작자의 손을 떠나고 나면 사람들의 사연을 먹고 자란다. 아픈 사랑을 했던 이야기, 소중한 친구를 잃어본 이야기, 고민에 잠 못 이루던 어느 새벽에 대한 이야기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야기를 머금은 채 음악은 각자의 세상에서 무한히 팽창한다.

 

누군가와 함께 노래를 듣는 행위는 낭만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지독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음악을 통해 어떤 순간을, 또 어떤 사람을 기억하기에 그 음악을 완전히 잊어버리거나 다른 사연으로 덮어쓰지 않는 이상 원치 않아도 음악 속에 저장된 무언가를 자동으로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너무 소중한 노래는 누군가와 함부로 나누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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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혼자서 아주 오랫동안 좋아했던 가수의 공연에 다녀왔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음악과 함께했던 내 삶의 많은 순간들이 떠올랐다. 너무 많은 나의 사연을 담고 있는 그의 노래는 마치 너무 많은 물을 흡수해버려서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푹 젖은 스펀지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는 공연 중 찍어두었던 영상을 휴대폰 화면에 띄워놓고 떠오르는 기억 하나하나를 살펴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 노래를 까맣게 잊게 되는 순간까지 절대 잊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그때 그 사람과 함께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이 노래를 듣고 싶다. 이 노래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그와 함께한 시간은 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테니 이 노래를 들으면 언제나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도록.’

 

나 혼자 좋아하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는 건 꽤 무서운 일이지만, 언젠가는 이 두려움을 한순간에 깨뜨릴 만큼 소중한 사람이 내 인생에도 나타날 거라고 믿는다. 그날을 위해서 나는 오늘도 이 노래를 겉에 묻은 세상의 먼지를 털어내고 광이 나도록 문질러 닦아서 내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둔다. 단 한 명의 관객을 위해서라도 무대에 오르는 사람처럼, 누군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직업인 문지기처럼 그렇게 하염없이 그대를 기다리며 이 노래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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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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