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사람]

글 입력 2023.12.10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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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20분. 평소에 같이 밤 산책을 즐기는 내 산책 메이트가 20분 뒤인 3시 40분에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서늘한 밤공기를 마시며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세상에 친구와 나밖에 없는 것 같은 새벽 특유의 그 적막한 느낌을 좋아하던 나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불 속에 있을 땐 이야기가 달라진다. 나가기가 정말 귀찮아진다는 뜻이다. ‘그래도 걸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어영부영 일어나 대충 나갈 준비를 했고,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런데….

친구는 나오지 않았다. 전화도 받지 않았다. 나는 10분가량을 서서 기다리다 집에 돌아갔다. 돌아가는 내내 생각했다. ‘잠들었구나….’

집에 돌아온 나는 다시 잠옷으로 갈아입고, 원래 있던 대로 이불 속에 들어갔다. 머릿속에서 갖가지 생각들이 뒤엉키는 바람에 잠은 오지 않았다.
 
어떻게 그 20분 사이에 잠이 들었지?
나는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갔는데….
내가 만나자고 한 것도 아니고….
짜증이 나고 섭섭한데…. 잠깐, 이게 그럴 일인가?
 
친구에 대한 원망과 그 원망 섞인 내 감정이 옳은지에 관한 의심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꾸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져서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 친구의 모든 연락과 얼굴을 하루가 됐든 이틀이 됐든 보고 싶지 않은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냥 소위 말하는 ‘잠수’를 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가라앉고 싶은 나와는 반대로, 한동안 잊고 있던 나의 고질적인 문제인 ‘회피’는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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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이 친구는 눈을 뜨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올 것이었다. 그럼, 거기서의 관건은 ‘내가 어떻게 그 사과를 받아주느냐’였다.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던 나는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라고 애써 웃어넘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나중의 관계를 생각하면 당장의 이 회피가 독이 된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쌓이고 쌓이던 응어리는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나 언젠가 한꺼번에 터지게 될 것이고, 상대방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관계의 일방적인 단절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느꼈던 감정을 표현하자니 서로 마음이 상해버릴까, 싸움이 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다. 이쯤 되니 나 자신을 답이 없는 문제 속에 가둬버린 느낌이었다. 어려운 고민 끝에 내린 나의 결론은, 솔직한 내 감정을 드러내 보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친구는 진심 어린 사과를 해왔고, 그렇게 나의 새벽을 괴롭혔던 이 일은 아무 문제없이 일단락되었다.
 
*
 
인간관계에서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나에게 있어, 그리고 모든 회피형 인간들에게 있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런 노력 없이 평화로운 관계만을 고집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순간에는 입을 꾹 닫아버리는 무책임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받곤 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오히려 ‘관계에 대한 간절함’이 있기에 발현되는 특성이라고 회피형들을 조심스럽게 변호하고 싶다. 관계에 조금이라도 금이 가는 게 싫고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나머지, 문제가 되는 사건 자체가 없었던 일인 것처럼 무마하려는 것이다. 혼자 시간을 갖고 생각하다 보면, 속에서 감정이 사그라지니까(삭이는 과정이라고 봐도 될 듯하다) 그렇게 넘어가는 것이다.

물론 계속해서 혼자 동굴 속에 들어가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스스로 삭이고자 했던 감정들은 언덕을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언제가 될지 모르는 한계점에 도달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무런 통보 없이 며칠이고 몇 달이고 숨어버리는 것이 옳다는 것도 아니다. 친구가 되었든, 연인이 되었든, 가족이 되었든 동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바깥으로 나오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너무 답답하고 옳지 않게 바라보지만은 않았으면 좋겠다. 무조건적으로 배려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빠르게 풀어버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만큼, 우리에게도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 옳다고 느껴질 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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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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