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낙원을 바라는 마음, 이런 밤, 들 가운데서 [연극]

23.10.29. 참사의 뒷골목에서 시작된 기록
글 입력 2023.12.07 11:59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포스터_최종.jpg




23.10.29. 참사의 뒷골목에서


 

겨우 일어난 가을날 아침. 접수해놓은 귀찮은 영어 시험을 치르러 침대의 유혹을 이겨내고 종로로 향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던 탓에 좋은 성적 받기는 포기한 채로, 한참 풀이 죽어 시험은 말그대로 치르고만 나온 날이었다. 시험이 끝나니 햇볕이 좋길래, 휴대폰으로 풍경 사진 몇장을 찍어보며 이참에 광화문까지 좀 걸어보자 싶었다.

 

그러다 마주한 애도의 물결. 이태원 참사 1주기가 그날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등이 한껏 서늘해지며 코끝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1년 전의 나도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는데,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면 친구들과 손잡고 그곳으로 향하려 했었지. 뉴스를 보며 아찔하고 허망해했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 멈춰 서서 묵념을 했다.

 

분향소에는 희생자들의 사진이 오와 열을 맞춰 추모객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내 어김없이 그 사진의 눈들과 나의 눈이 마주쳐버렸다. 점점 뜨거워지는 내 얼굴을 애써 모른 척하고 시리게 푸른 하늘만 한참 쳐다보며 걷다 집으로 돌아왔다.

 

슬픔을 삼키거나 괜찮다고 웃어보이기에 1년이 참 짧은 시간이겠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길지 않은 삶 동안 지나온 많은 ‘참사’들이 떠올랐다. 얼마나 큰 분노와 애석함, 눈물이 스며들어 사람들을 아프게 했던가. 그러다 희생자들은 또 다시 잊혀지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만 떠난 이들이 사라진 뒷골목에 맴돌게 되었었지, 하는 안타까움이 잠깐 뺨에 흘렀던 것도 같다.

 

그래서 잘 지내냐고, 어떻냐고 물어오는 계곡의 다정한 안부인사를 곱씹으며 나는 이렇게 답을 보내고 싶어졌다.

 

*

 

계곡의 안부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당신을 사랑했지만 더는 사랑하지 못하고 우리는 이별했지요

당신을 사랑할 적에 나는 얼마나 담대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담대한 사랑을 했지요 나는 아마도 우리는


(중략)


나는 어느 쪽에 있는지 찾을 때가 있습니다

살다보니 폭우에도 젖지 않는 세련됨이 필요합니다

나의 텐트는 인터넷 최저가 가성비 입문용

비가 새고 바람에 나부낍니다 펄럭펄럭 태극기처럼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 현현하게

당신을 사랑할 적에 나는 얼마나 담대했는지

이제는 정말로 모릅니다

 

*

 

계곡에게.


저는 비교적 잘 지내요, 잘 지낸다고 생각하려 노력해요. 요즘 저와 제 주변을 생각해보면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은 있습니다만, 그럭저럭 견뎌볼 만한 크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참 다행이죠. 한편으로는 이 편안함이 언제 깨어질까 두려워하며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해요. 저만의 특별한 근황은 아닐 거예요, 모두들 그렇게 지내실 거라 생각해요. 

안부를 물어주어 고마워요. 


자유와 사랑이라는 것을 매일 느끼며 살 수 있다면 참 좋을 거예요. 세련되고 담대해진다면서요. 그러면 기꺼이, 모든 안부에 저는 안녕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될 거예요.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볼 생각이에요. 이것도 다 연습이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다음엔 긴 말 없이, 잘 지낸다. 이렇게 말해볼게요.

 

*


계곡은 극 중에서 자유와 사랑이 도망간 세상에서, 끊임없이 흐르며 자리를 지키는 불변의 참된 속성을 대표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계곡의 안부는 지난 연인을 향해 쏟는 감정의 표현이자, 관객을 향한 일종의 주제 선언이 아니었을까. 




어떤 낙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자유, 사랑이라는 추상적 개념은 동물원에서 탈출한 새의 표상으로 형상화 되었다가 인간으로 환생해 재회하기도 한다. 새들이 더 넓은 세상을 찾아 탈출했다는 희망에 찬 과거, 죽음을 맞이했다는 슬픈 현재를 시점을 거슬러 올라가 보여준다. 서로를 자유와 사랑이라고 부르던 두 사람과 이전 생의 두 마리 새는 결국 그들이 찾았다는 황금빛 낙원 속에서 기쁘게 춤추고 노래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더이상 자유와 사랑이라는 이름도 없이, 한껏 충만했다. 낙원을 상상하게 하는 온갖 미사여구와 달콤하고 매력적인 대사, 순도 높은 웃음을 짓는 존재들이 모여 이루는 미움 없는 세상. 물질적으로는 바로 눈앞에서 배우들이 몸짓으로 만들어냈던 그 낙원이실재하지 않음을 알기에 현실과의 괴리를 느끼며 순간 소름이 돋았다. 나를 포함하여 낙원에 닿지 못하는 존재들을 떠올리며 슬퍼지고 말았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토록 낙원을 그리고 부르고 쫓았던 것은 현실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행복의 결정체, 낙원. 너무나 추상적이고 손 뻗어 쉽게 만질 수 없는 이상향. 그러나 지쳐 낡고 아팠던 그런 마음들에 매번 지며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작은 사랑의 말도 건네지 못하게 되진 않기를.

 

그리워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욱이 서로를 살피며 당신들만의 낙원에 가까워지기를. 이런 바람이 헛되었다며 비웃지 않고 따스히 들어주는 사람이 많아지길 조용히 바라본다.




Synopsis.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설유진 신작

 

안녕하세요? 요즘 어떻게들 지내시나요? 매일 벌어지는 일들은 마치 화면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처럼 멀기만 하고, 변해버린 감각에 나 스스로가 낯선 요즘입니다. 연극 <이런 밤, 들 가운데서>는 참사를 지나는 마음과 동시대 공연예술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더 큰 우리’가 함께 듣고 볼 수 있는 속도와 질감을 찾아가는 공연입니다.

 

작품에는 ‘자유와 사랑이 도망간 세상에서 그것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차소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