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 정말 프로방스에 있구나 [여행]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과 나의 엑상프로방스
글 입력 2023.11.07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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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순조차 돋지 않은 2월의 어느 날, 나는 여름에 떠나는 베를린행 항공권을 끊었다. 다소 충동적이었고 이유를 추려보자면 크게 세 가지. 첫 번째, 교환학생과 여행을 고민하다가 여행을 선택했다. (왜 그랬을까.) 두 번째, 이번 여름방학이 아니면 여행 갈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있을 텐데.) 그리고 대망의 세 번째. 나는 김화영의 ‘행복의 충격’을 읽은 것이다. 스무 살 때였다. 다음은 그 책의 첫 페이지.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의 미래이다. ‘다른 곳’과 ‘내일’ 속에 담겨 있는 측정할 길 없는 잠재력은 모든 젊은 가슴들을 뛰게 한다. (중략) 청춘은 그 자체가 자기 스스로의 정당화가 된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청춘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믿을 수 있는 이유를 얻으며, 자기가 믿는 것을 증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걸 읽기 전과 후의 심장 박동수가 일정할 청춘이 있을까? 더군다나 풋바람 가득한 스무 살이라면. 나는 이 책에 내 몸을 내던져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1969년 홀로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로 유학을 떠난 한 지식인이 몸소 감응한 청춘과 지중해 예찬. 유려하고 정제된 문장들 속에서 들뜬 마음을 겨우 부여잡은 청년의 떨리는 필체가 나는 보였다. 세대가 지속되는 한 청춘은 불멸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75년에 쓰인 글에게 그 푸르름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느낌이었다. 머금은 사유가 깊어 문장문장마다 발이 자꾸 빠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어려웠다. 깊은 건 아름답기 쉽다는 걸 배웠다. 글이라는 건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한 본보기가 되었다. 삶이란 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서가 되었다. 읽고 또 읽었고 좋고 역시 좋았다. 그리고도 막바지까지 해소되지 않은 의문 하나. 그래서 프로방스는 대체 어떤 곳인가.


가고 싶었다. 가고 싶은 만큼 글로 읽고 사진으로 보고 영상을 시청했다. 그럼에도 가보고 싶었다. 오랜 염원이었다. 군복무 중에도 전역하고 프로방스에 갈 거라 다짐했고 작년 겨울의 메모 속에도 적혀 있었다. 나는 미라보 광장에 두 발을 딛고 서서 더운 내음을 들이마신 후 굽이굽이 올라가는 골목을 향해 걸음을 내딛고 싶었다.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을 눈치채고 길거리 카페 테라스에 걸터앉아 플라타너스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의 서늘함 속에서 내 앞에는 작렬하는 볕으로 코팅된 대리석의 광채에 눈이 부신 채 아무 음료나 시켜 놓고 여유로이 책을 읽고 싶었다.

 

다시 말해 나는 ‘실제로 그곳에 있고 싶었다’. 하나의 공간과 같은 시간 속에서 겹쳐 있고 싶었다. 가보지 않으면 영영 아득할 상상을 나의 현실로 바꿔내고 싶었다. 온라인에는 내 두뇌보다 박식한 정보글과 내 눈보다 아름답게 담아낼 풍경 사진, 내 기억보다 더 생생할 영상들이 있더라도 말이다. ‘그곳에 있음’이 의미하는 바가 단순히 나과 공간의 결합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를 둘러싼 모든 풍경이 티브이 채널을 돌리듯 한순간에 뒤바뀌고 나는 전부 처음으로 둘러싸여 있을 것이다.

 

변함없는 건 오직 내가 여전히 나라는 사실 뿐. 익숙한 나와 낯선 곳. 이 생경한 조합이 어떤 신비로움을 가져다줄지 나는 궁금했다. 그건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색감의 스파크일 것이다. (김화영은 이에 대해 작고 소중한 ‘비밀’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란한 텍스트가 부풀리는 환상의 맨얼굴을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과연 어떤 곳이길래 이런 글을 쓰게 만드는지. 사실 맹신하고 싶었다. 지중해의 행복이 피부에 새겨진다면 나는 이제 행복에 통달한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오직 행복한 자,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이도 이 땅 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라고 토로하는 자를 믿고 어느 여름을 걸 가치가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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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갔다. 2023년 7월 9일이었다.

 

베를린과 파리를 지나 마르세유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내린 후 공항에서 엑상프로방스로 가는 버스에서 막 내린 참이었다. 버스는 도착했고 나는 내렸으니 이론상 여기는 엑상프로방스. 오후 6시. 아직 여름의 햇살은 맑고 강했다. 캐리어 안에는 ‘행복의 충격’이 들어있었다. ‘한여름 심벌즈를 강타하는 듯 금속성을 내며 찌르릉거리는 햇빛’이라는 책 속 텍스트가 하늘에서 무심히 내리쬐며 내 피부를 힘차게 문지르고 있었다.

 

그 이후 3박4일 동안 나는 자주 책을 몸으로 읽었다. 책 한 권을 꼭 품에 안고 아무런 계획 없이 엑상프로방스의 심장부에 덜컥 당도한 사람처럼. 정말 그러하듯이. 책 한 권이 유일한 방문 목적이자 여행의 모든 대답이었다. 나는 오로지 이곳에 있기 위해서 이곳에 왔다. 두 눈을 뜨고 두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충만했다. 무엇을 보고 어디를 가든. 걷다 지치면 어딘가 걸터앉아 책을 읽었다. 읽다가 문득 앞을 내다보아도 연거푸 문장들이 선연하게 이어졌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 책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뜨개실처럼 어여쁘게 엮여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서사를 직조해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느꼈다. 아니면 시간이 흘러 미화된 지금 나의 착각일 수도 있다. 지나간 기억은 불가피하게 왜곡과 환상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책과 여행이 그러하듯이. 그리고 여행과 책, 기억이 꿈결처럼 뒤엉킨 올해 여름은 볕을 쬐어 몽롱해진 정신처럼 적당한 숙취가 감돌며 흘러갔고 그 기분만큼은 초겨울처럼 개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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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책에 있는 것과 없는 것.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 모두를 공평하게 압도하는 지중해의 거센 햇발. 공항에서 출발하는 엑상프로방스행 버스 앞에 줄 서면서 짐 두는 곳을 물어봤을 때 답해준 백발 할머니의 상냥한 목소리. 버스에 내려 조금 걸으니 눈 앞에 펼쳐지는 미라보 광장, 그 한복판에 ‘3층의 크고 드높은 분수, 그 위로 영원히 푸른 프로방스의 하늘을 등에 받들고 이제 막 목욕을 마치고 일어서는 반라 여인들의 조각상들, 그 아래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에 흐드러진 갈기를 털고 일어나며 포효하는 듯한 청동의 사자들, 아름다리 플라타너스가 길 양옆으로 늘어서서 흐드러진 잎새로 하늘을 덮는 쿠르 미라보의 드넓은 포도’가 정말로 있던 것. 그 바로 옆으로 삼면이 통창인 애플 스토어와 파이브 가이즈 매장. 묵직한 햄버거를 베어 물며 벽에 인테리어처럼 달아놓은 뉴스기사 인용구들을 하나하나 읽어본 것.

 

세잔 영화관 앞 흐드러지게 만개한 이름 모를 분홍색 꽃 더미. 그 근처 정원이 딸린 아늑한 가정집에서 내리 3박을 지낸 것. 오밤중에 물이 없어 컵을 빌려 부엌에 우두커니 서서 수돗물을 들이킨 것. 베이지색 대리석의 광장 바닥이 미끌거리던 것.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문질러졌을지 헤아려 본 것. 이끼로 뒤덮인 바위 모양의 분수. 따스한 웜톤의 건물들. 노을이 지는 곳으로 홀린 듯 따라갔던 저녁. 눈에 보이는 빵집에서 눈에 보여서 구매한 맛대가리 없던 빵. 책을 다시 펼쳤던 어느 고즈넉한 공원. 끝없이 골목을 걸었던 것. 나무 사이로 전등만 삐죽 튀어나와 있던 가로등.

 

유일하게 예약하고 갔던 세잔의 아틀리에. 그 정원 속에서 헤매며 책 속에 등장하는 ‘공터의 풀밭’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아 세월의 변화를 실감했던 것. 그럼에도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었던 것. 태양과 나무와 그림자. 구름 한 점 없던 하늘. 36도. 더웠지만 메마르지 않았던 것. 물을 사러 들어간 마트에서 사과도 함께 산 것. 계산하다 직원이 말을 건 것. 한국어를 공부한 적 있다는 그녀의 한국어 발음에 대해 열성적으로 칭찬한 것. 하지만 나의 영어 실력 역시 그녀의 한국어와 비슷해서 대화를 마무리 지을 타이밍을 호시탐탐 노린 것.

 

골목을 걷다가 등장한 생 소뵈르 대성당. 들어가니 다들 어딘가로 모이길래 따라갔다 얼떨결에 합류한 프랑스어 성당 가이드. 성당 관리인이 데려간 은밀한 대문, 열고 들어가니 펼쳐지는 네모나고 아리따운 정원, 그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기둥들에 새겨진 조각의 의미에 대해 삼십여분 가량 설명을 들은 것, 프랑스어라 나는 알아듣지 못한 것, 나한테 질문할까 봐 노심초사한 것, 도망칠 기회를 엿본 것, 결국 도망가지 못한 채 끝나고 수줍게 ‘메흐시’하고 나온 것. 그 신비한 정원의 풍경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 도심 한복판의 아기자기한 회전목마.

 

혀끝에서 사르르 녹는 바나나맛 소르베. 그늘에 있고 바람이 불지만 열기가 몸을 감싼 것. 느지막이 일어나 정오가 넘어 밖에 나오니 줄지어 열려있던 벼룩시장. 거기서 ‘푸타’라는 비치타월을 11유로 주고 산 것. 도시 곳곳 셀 수 없이 자리한 플라타너스 나무. 벤치에 앉아 소풍처럼 먹었던 납작복숭아와 체리. 지중해를 위해 구입한 올리브색 스윔팬츠. 테라스, 테라스, 또 테라스. 길바닥에 당연하듯 깔린 의자와 테이블. 제 자리인 마냥 들어찬 사람들. 오후 3시의 맥주 한 잔. 유명하다는 마들렌 가게가 마침 휴무였던 것. 외식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파프리카맛 레이즈 감자칩. 맥주 두 병을 마시다 드러누워 나는 예술을 해야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마지막 날 밤. 지치지도 않는 매미 소리를 듣다가 잠들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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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여행을 시작하게 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어도 삶은 계속해서 흐른다. 책처럼 느끼거나 목격하면 신기했고 책에 있지만 이제는 없거나 새롭게 발견했다면 그것은 나의 것으로 찬란했다. 책에 있는 건 숙제 같았고 책에 없는 건 여행이 되었다.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미라보 거리의 벤치에 잠잠히 앉아 프로방스는 절망이 오래 지속되기 힘든 곳이라 생각했다. 방 안에서 홀로 비탄하다가도 밖으로 나와 이토록 산뜻한 햇살과 흩날리는 나무, 도시를 다정히 감싸 안은 온화한 건물과 바닥, 여유 속에서 늙지 않는 테라스의 사람들 사이를 통과하다 보면 불어오는 너울 바람 한 움큼에도 모든 절망이 씻겨 내려갈 것만 같았다.

 

행복감으로 아득한 광경 앞에서 나 하나쯤의 절망은 무력해지다 주저앉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 도시에 물들어 가는 것이다. 고작 3박 4일이라 내밀한 추억들을 간직하기보단 고작 구경꾼일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내 인생의 과업을 해냈다. 진실로 가보지 않고서는 해소될 수 없는 영원한 질문에 대한 답을 몸소 찾으러 다녀왔다. 그것은 바라는 바를 기어코 이뤄내는 일종의 성취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남은 프로방스, 청춘의 프로방스, 스물네 살의 프로방스는 내가 그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한 이상 늘 그 자리에 행복한 채로 남아있다. 기억은 점점 옅어지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함께 공존한다는, 그 명백한 사실이 먼발치에서 나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 글을 찾아 읽게 될 마음처럼. 못 사 먹은 마들렌 먹으러 언제든 다시 들리라는 듯이.

 

 

[문충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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