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인자의 기억법 [도서/문학]

기억할 수 없는 그의 기억들
글 입력 2023.11.05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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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다.

 

책의 머리와 말미에 공空으로 시작하여 공空으로 끝나듯 페이지 곳곳은 비어있다. ‘ * ’ 모양 아래 적힌 짧은 글들은 마치 알츠하이머에 걸린 주인공 ‘나’가 기억하고자 여기저기 남긴 기록의 흔적 같다. 메모의 순서가 뒤엉키고 기억의 진위 여부가 뒤엉키는 경험을 독자에게 전해준다.

 

그는 살인자이자, 수의사이자, 시인이자, 아버지이다. 이 중 셋은 실상이고 남은 하나는 허상.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무엇이 후자인지 단번에 알 것이다. 실상이 셋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주도권은 허상이 잡는다. 실상과 허상을 넘나드는 주인공이 거의 유일하게 기억하는 팩트는 본인이 살인자란 점이다.

 

열여섯에 아버지를 죽인 후 그는 삼십 년 동안 사람을 죽인다. 그동안 그의 살인을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그러나 그가 마흔다섯이던 해에 쾌감 없는 살인을 끝으로 그는 “남들은 잘 모르는 자신만이 아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비밀로 한 채 평소 해왔듯이 수의사로 그저 평범하게 산다. 실제 살인 경험을 썼을 뿐인데 메타포 달인으로 얼떨결에 시인이란 소리도 듣고. 이렇듯 한물간 살인자로, 평범한 수의사로, 애매한 시인으로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그에게 희망이 생긴다.

 

그의 ‘딸’ 은희는 그의 마지막 희망이다. 딸을 희생양으로 노리는 듯 보이는 그녀의 ‘약혼남’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는 살인을 꾸미며 다시 활력을 얻는다. 이 활력은 더 완벽한 쾌감을 바라는 희망이 아닌 ‘아버지’로서 느끼는 책임감과 보호본능이다. 아버지임이 허상인 것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이 스토리는 나름 감동적이다.


귀하디 귀한 은희가 그의 요양보호사였다니. 그가 은희를 죽였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결말로 갈수록 혼돈은 배가 된다. “혼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혼돈이 당신을 쳐다본다.” 읽다 보니 그의 경험처럼 혼돈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다. 정신을 맑게 하고자 첫 장으로 돌아가 읽기 시작한다.

 

다시 읽어도 별다른 점은 없다. 아침, 점심, 저녁에도 두부구이를 먹는 그처럼 똑같은 두부 반찬을 먹는 느낌이다. 딱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김치 곁들여 먹듯 매콤한 설움이 온다는 것. 그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던 아버지처럼 악몽을 꾸고 있구나. 어머니와 여동생을 보호하려 했듯 ‘딸’을 보호함으로써 자신의 수치와 죄책감을 망각하는구나. 그는 두려운 게 맞구나. 마라탕 먹다 사레들려 울듯, 내 눈에서 뭔가 찔끔 나온다.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그가 외우던 반야심경 구절이 내게도 와닿는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몰입을 내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있다. 그가 보인다.

 

책을 덮자 문득 이겼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에 이긴 걸까. 잘 모르겠지만 이겼다는 느낌은 있다. 이제 나도 그처럼 망각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자고 싶을 뿐이다. 이 책은 세 번으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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