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특별한 상황, 평범한 사랑 [영화]

이누도 잇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글 입력 2023.10.25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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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다루는 영화는 너무도 많다. 아니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아주 벗어난 영화가 오히려 드물다. 그러나 어쩐지 대놓고 ‘사랑은 이렇게 특별한 거야’라고 말하는 영화를 자주 찾지는 않게 된다. 어떤 이(들)가 사랑에 빠진다, 사랑 속에서 행복을 찾다가 끝끝내 그 행복에 다다를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사랑에 좌절해 이별하거나(새드엔딩) 혹은 사랑이 주는 다른 방식의 특별한 행복을 깨닫는다(해피엔딩). 영화 속 ‘특별한’ 사랑은 대게 이렇듯 특별하지 않은 방식으로 작동하고, 나는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들의 이런 흔한 반복이 낯간지러워 회피하고 말았던 것.


사랑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감정이다. 때론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특수한 인류 최대의 관심사 중 하나다. 다만 누군가의 사랑이 언제나 특별해야 할 이유도 없다. 사랑을 특별한 위치로 격상시킨 후, 그 사랑에 인위적 고통을 가하여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을 우리는 ‘신파’라고 부르며 조롱한다(사실 나는 그런 ‘신파’를 만나면 대체로 눈물을 쏟지만). 특별함에서 벗어난 가장 보통의 사랑. 그런 마음으로 만든다면 사랑을 다룬 영화가 훨씬 사랑스러웠을 텐데, 라는 생각으로 추천 받았던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나의 그 얕은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작은 확신과 함께 엔딩 크레딧을 맞이했다.


이누도 잇신의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을 본다.


벌써 몇 년이 지난 여행 사진을 보며 회상에 잠기는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목소리에는 행복감보다는 초연함, 쓸쓸함보다는 경쾌함이 묻어있어 지금의 회상이 가슴 벅차거나 그다지 슬프지 않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목소리의 주인공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의 시선에서 시작되는 사랑 이야기는 지나치게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아프지도 않은, 덤덤한 결말을 맞게 될 것임을 우리는 어렴풋이 예감한다.


대학생인 츠네오는 자신이 일하던 마작 게임방에서 이상한 소문을 듣는다. 수상한 할머니가 매일 낡은 유모차를 끌고 나타난다는 것. 손님들의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그는 우연히(로맨스 영화에서는 ‘우연’이라는 단어를 ‘운명’으로 자주 치환해 특별함을 부여하지만) 언덕을 굴러 내려오는 낡은 유모차를 목격한다. 놓친 유모차를 향해 절박하게 소리를 지르는 할머니 대신 유모차를 살펴보던 그는 두려움에 떨며 식칼을 휘두르는 조제(이케와키 치즈루)를 만나게 된다. 우연에 기대어 시작된 그들의 만남은 호기심과 호의를 거치며 한걸음씩 더 나아간다.


병을 앓아 걷지 못하는 조제의 공간은 차양막으로 시선을 가린 유모차와 주워온 책들로 둘러싸인 방뿐이다. 세상과 단절된(혹은 스스로 단절한) 조제에게 바깥은 산책과 독서를 통해서만 흘끗 볼 수 있는 미지의 공간이자 유모차 속에 숨어서 관음하는 은밀한 욕망의 대상이다, (“어찌나 산책 타령을 하던지”) 반면 그 미지의 공간에서 침입해온 츠네오는 세상의 모든 욕망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는 왕성한 식욕으로 밥을 뚝딱 해치우고,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하고, 사랑과 상관없이 섹스를 한다. 조제의 시선에서 츠네오는 ‘한심한’ 대학생이 되고, 츠네오의 시선에서 볼 때 조제는 ‘매우 수상한’ 타인이 된다. 너무 다른 삶을 사는 그들이므로, 그들은 기어코 서로의 삶을 흔들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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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네오가 언제 어디서든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는 반면, 영화의 초반부까지 조제가 무언가 먹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성욕과 식욕이 자유로운 츠네오와 달리 조제는 ‘식칼’이 상징하는 일차적 안전 욕구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 “꽃”이나 “고양이”를 눈으로 직접 보며 갇힌 공간을 벗어나 바깥으로 향하고 싶은 것이 조제의 다음 단계 욕망이다. 욕구가 늘 충족되고 있기에 공허해진 욕망을 채우고 싶은 것이 츠네오의 욕망이다. 욕망의 결이 서로 다를 때 서로의 존재가 그 욕망 너머를 넘보도록 만드는 만남에서 사랑은 출발한다. 그 동행은 점차 속도를 올리고,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진다. 언젠가 비틀거리고 때론 넘어질 테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과정에서 그것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아름다운 영화에서 주어진 상황은 분명 특별하다. 걷지 못하는 여자와 어딘가 공허한 남자. 무언가 결핍된 인물들의 우연한 만남은 영화 속 사랑이 설정한 특별한 배경이다. 그러나 이토록 특수한 배경 속에서 피어난 사랑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 둘은 아주 평범하고, 그럴듯하며, 익숙한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함께 먹고, 섹스를 하고, 여행을 하면서, 좌절된 욕망으로 ‘깜깜한’ 곳을 천천히 함께 빠져나온다. 그리고,


 
“그곳이 예전에 내가 살던 데야. 깊고 깊은 바닷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너랑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주었을 때, 언젠가 예사로운 현실이 다가오고 그 현실 너머에서 함께할 서로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당신과의 “가장 야한 섹스”는 끝이 난다. 그리고 우리는 아주 평범하게 이별한다. 당신이 사라진다면 다시 깊고 어두운 바닷속을 헤매겠지만, 서로가 채워준 힘으로 “헤엄쳐 나”올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단단해졌으므로, 비록 한낮의 길 한가운데서 뜨거운 눈물을 쏟아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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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에는 시공을 초월할 영원의 사랑도, 불확실성을 이겨낼 낭만적 사랑도 없다. 감정을 아프게 찌르는 신파도 없다. 결핍과 욕망과 우연과 현실에 기댄 사랑만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며 결코 울지 않았다. 우리의 평범한 사랑도 이별도 대체로 그렇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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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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