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순간이 눈부셨던 당신에게 [영화]

글 입력 2023.10.1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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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잘 회상하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사진을 찾을 때가 아니면 이전에 찍은 사진들도 잘 보지 않는다. 행복했던 과거는 특히 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노력은 과거를 동경했을 때 따르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면 지금 보다 젊은 날의 나 자신이 너무나도 눈부셔서 감당이 되지 않았다. 눈부신 과거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찬란했던 과거를 회상하는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은 1920년대 예술계 거장들이 즐비한 파리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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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파리 풍경의 나열로 영화가 시작된다. 센강, 에펠탑, 루브르 박물관, 비에 젖은 거리 등 파리에 대한 환상을 만들기에 충분한 풍경들이다. 파리를 가보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당장이라도 비행기 티켓을 끊고 싶은 욕망을, 파리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시작이다.

 

주인공 '길' 또한 파리에 대한 무지막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길은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이지만 낭만적인 소설가로 전향하려 한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약혼자 '이네즈', 그리고 현학적인 태도로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이네즈의 친구 남편 '폴' 사이에서 길은 답답함만을 느낀다. 늦은 새벽 홀로 파리의 뒷골목을 걷던 길은 낯선 이들의 마차에 이끌려 1920년대로 이동한다.

 

1920년대의 파리는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피카소 등의 예술가들이 살았던 시대이며 길이 동경하는 '황금시대'이다. 길은 새벽마다 이 시대를 누구보다 즐긴다. 특히 당시 예술가들의 뮤즈였던 '아드리아나'를 만나 사랑의 감정을 나눈다. 하지만 아드리아나와 함께 1920년보다 더 이전인 벨 에포크 시대로 시간이동을 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게 되며 현재로 돌아온다. 자신이 동경하던 1920년대의 인물이 아드리아나인데, 아드리아나는 그 시대에 권태를 느끼고 더 이전인 벨 에포크 시대를 동경하고 있는 것이다. 그제서야 길은 깨닫게 된다. 과거에 대한 동경은 현재에 대한 부정이라는 것을.

 

"과거에 대한 향수는 부정이야. 고통스러운 현재에 대한 부정."

 

"가치있는 글을 쓰고 싶다면 환상들은 없애야 해요. 

과거에 살았다면 행복했을 거란 환상도 그중 하나겠죠."

       

'부정(denial)' 이란 현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처음 부터 그런 일이 없었다고 여기는 방어기제이다. 일상에서도 '현실 부정' 또는 '현실 도피'라는 단어를 흔하게 사용한다. 믿고 싶지 않은 상황을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무의식적 작동이기에 자신의 부정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주인공 길이 자신의 현실 '부정'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담은 영화이다.

 

이 '부정'의 키워드는 영화 속에서 자주 우리에게 힌트를 주고 있다. 영화 초반부 이네즈의 친구 남편인 폴은 길에게 어느 시대에 살고 싶냐고 묻는다. '1920년대 빗속의 파리' 라는 대답에 폴은 길이 현재를 부정하고 있다고 답한다. 당시 길은 이해하지 못한다. 폴이 자신을 향해 내뱉는 조언 조차 부정하고 싶은 현재의 일부분일 뿐이다. 하지만 폴은 길의 상태를 정확하게 지적했다. 약혼자 그리고 약혼자의 부모님과의 여행에서도 집중하지 못한 채 온갖 낭만에만 젖어드는 길의 모습은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는다.

 

길이 자신의 글을 보여주는 장면 또한 길의 상태를 예측 가능하게 한다. 약혼자 이네즈는 몇 번이고 길에게 글을 보여달라 요청한다. 현재 시점에서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글을 1920년대의 헤밍웨이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읽어달라 부탁한다. 길은 현재를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순간이 눈부셨던 당신에게


 

길이 과거의 파리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것을 개인의 한 인생으로 축소시켜 해석하고자 한다. 시간여행을 하는 길은 '현재의 나 자신'이다. 아드리아나는 '과거의 나'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에 내가 전성기라 생각한 시점으로 이동하여 과거의 나를 만나지만 과거의 나는 대과거의 나로 돌아가고자 한다. 결국 모든 시점에서 나는 과거를 동경한다. 현재를 부정하면서. 그렇다면 현재를 부정하며 만족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내가 그토록 동경하는 순간일 것이다. 미래의 나를 상상해 본다면 지금으로서 생각할 수 없을 다른 종류의 고뇌와 부담을 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미래의 나 자신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반짝이는 순간들을 그리워할텐데, 지금의 내가 사사로운 걱정들에 사로잡혀 반짝이는 하루들을 도외시한다면 미래의 내가 얼마나 안타까워할까?

 

각박한 현실을 겨우 이어나가는 젊은이들에게 '현실을 즐겨라' 또는 '현재에 만족하라' 라는 말은 너무나도 가혹하게 들린다. '미드나잇 인 파리' 영화에서는 '현재를 살자'가 아닌 '나의 모든 순간은 전성기'라는 메세지가 들렸다. 인간의 머릿 속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중 과거에 대한 생각이 주를 이룬다고 한다. 그만큼 과거를 동경하며 산다. 심지어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았던 과거 조차 불만족스러운 현재에 의해 쉽게 미화되곤 한다.  고된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과거를 떠올리는 이유는 그저 기억나는 것이 과거 밖에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지금의 이 순간도 미래의 내가 도망쳐 도달하고 싶어하는 황금기이다. 결국 나의 모든 순간들은 전성기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저 인식 차원의 문제이지만 현재를 전성기로 인지하고 살아간다면 현재를 보는 시각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주어진 현실이 너무 벅차 과거가 그리울테지만 이 벅찬 하루 하루 또한 나의 전성기라는 것을 기억해보자.

 

 

[임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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