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외사랑 예찬론 - 웹툰 '왕세자 입학도' [만화]

잘 짜여진 이야기의 힘
글 입력 2023.10.22 14:02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가장 가슴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무엇일까.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과 사랑에 빠져 버린 로미오와 줄리엣, 사랑했던 기억을 점점 잃어버리고 마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주인공... 다양한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하지만 수많은 사랑 이야기 가운데 가장 아프면서도 아름다운 것은 어쩌면 외사랑의 이야기가 아닐까. 내 마음을 나도 상대방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데도 나 혼자서만 계속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조그만 가능성도 없는데 그 미련을 놓지 못하는 것. 이루어진 적 없고 이루어질 리도 없는 이 사랑은 아마 '나'에게는 가장 아픈 사랑이리라.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아픈 건 알겠는데, 이게 왜 아름답다는 것일까?

 

사실 나는 이처럼 아픈 외사랑을 해본 적이 없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 떄문이다.


웹툰 [왕세자 입학도]에서 놀이패의 일원으로 등장하는 '도영'은 성균관의 유생이자 세자를 보필하는 '영달'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도영이 살짝씩 드러내는 연심을 단호하게 밀어내는 영달을 보며, 또 안타까우리만큼 큰 신분의 차이에 자신에게 마음을 접을 것을 권하는 동료를 보며 도영은 괴로워한다.


영달이 도영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을 것임을 도영도, 영달도, 독자도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도영은 처음 느끼게 된 연심을 쉽게 저버리지 못한다. 그 와중에 맡게 된 놀이패에서의 역할은 하필이면 사랑하는 여인을 다른 이와 맺어주고 홀로 힘들어하는 도령이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대사에 도영은 자신도 모르게 깊이 몰입하게 된다.

 

내 사랑을 말할 것 같으면 별 하나 뜨지 않는 캄캄한 밤에 웬 휘영청 밝은 달이 떠버린 것이오.

이 웬걸, 세상 저 둥그런 빛 덩어리만 보며 따라가는데 거, 왠지? 기분이 묘해?

나는 분명 달빛을 받고 있는데 이상하게 그림자가 없소.

빛에 닿으면 그 검은 흔적으로 달빛과 고리라도 삼을 수 있는 것 아니오?


별 하나 뜨지 않는 캄캄한 밤에 휘영청 떠 버린 밝은 달은 그 얼마나 눈부실 것인가. 그 달빛에 눈을, 그리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을까.

 

 

왕세자 입학도.PNG

[출처] 네이버 웹툰 왕세자 입학도 59장 '그림자 없는 달'

 

 

하지만 그 달에는, 잔혹하게도 그림자'조차' 없다. 달빛에 그림자라도 진다면, 그것이 설령 실체가 아닐지언정 그 흔적인 그림자만으로도 위안을 삼을 수 있건만,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도영의 외사랑이다.


손끝이 저릿저릿 아려도 오로지 내 것.

마주치려 하는 눈빛도 오로지 내 것.

옷 끝자락 스치지 못해 허공을 움키는 손도 오로지 내 것.

언제까지고 맞추고 싶은 발걸음도 오로지 내 것.

꿈결에 그리는 마음도 오로지 내 것.

내 것이 너무 많아 버거워 천지신명께 빌고 빌어도 둘로 나뉠 수 없는 것.

결코, 결코 닿지 않을 그림자 없는 달을 좇는 것.


외사랑이 아픈 것은 '내'가 오롯이 져야만 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보답받을 수 없음에도 커지는 마음을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기에, 또 그 마음의 짐을 나눠 가져 줄 수 있는 대상은 그림자 없는 달과 같은 그대뿐이기에. 극중 인물인 '도령'으로서 시작한 대사는 결국 도영이 애끓게 뱉어내는 외침이 되며, 도영은 끝내 눈물짓고 만다.


이 장면에서 도영은 탈을 쓰고 '도령'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말하는 도영의 얼굴을 독자들은 볼 수 없다. 그런데도 도영의 마음은 독자들에게 절절하리만큼 전해진다. 나 역시, 읽은 지 수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그 장면을 처음 본 순간이 기억난다.


사랑 이야기는 흔하다. 외사랑 이야기도 드물지는 않다. 하지만 이처럼 아름답게 외사랑을 표현한 장면은 정말로 만나기 어렵다. 한 편의 시와 같은 대사가, 탈 밑으로 흘러내리는 도영의 눈물이 비치던 마지막 장면이 잊히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이처럼 잘 짜인 이야기는 사람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다. 도영도 이미 벗어났을지 모르는 오래된 외사랑 이야기에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는 한 독자로서, 나의 외사랑 예찬론은 앞으로도 꽤 오래 지속될 것만 같다.

 

 

[유지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2.22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