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뢰한.
일정한 직업이 없이 돌아다니며 불량한 짓을 하는 사람. 멜로 영화의 주인공들을 지칭하기엔 지나치게 투박한 단어다.
오늘은 특별할 것 없는 깡패와, 특별하지 못한 마담과, 판에 박힌 잠입 형사의 이야기. 깡패를 잡기 위해 깡패의 애인인 마담에게 접근하는 형사, 라는 클래식한 스토리. 통칭 무뢰배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려 한다.
그 사이에 놓인 더럽고 구질구질한 사랑도 함께.
1. 준길의 사랑: 폭력과 희망고문
작중 흉악범으로 나오는 준길은 한물 간 술집 마담 혜경의 애인이다.
그의 사랑은 흔히 '그거 사랑 아니야. 정신 차려.' 라는 이야기의 전형에 해당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술을 마시거나, 몸을 섞거나, 그렇지 않을 때는 혜경이 번 돈을 가지고 경찰을 피해 범죄를 저지르러 다닌다. 얼핏 보기에 준길의 사랑에 책임은 없다. 쾌락과 육체적 구속만이 가득하다.
영화를 보면 그런 의문이 든다. 준길이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영화 내내 준길은 혜경의 사랑을 이용하니까.
영화 후반부, 준길이 죽음을 당하는 장면에서야 우리는 준길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하는 여자와 도망가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준길. 그 허무한 죽음에는 무뢰한의 시시껄렁함에 가려졌던 혜경을 지키려 하는 일말의 소망이 있으니까.
2. 혜경의 사랑: 비참함과 도피
혜경은 자타공인 독한 년에 수전노 노릇을 하는 한물 간 마담이다.
그런 구질구질한 혜경의 삶은 온통 희생적인 사랑을 점철되어 있다.
힘들게 받아낸 돈을 모두 준길에게 주는 혜경, 경찰에게 쫓기는 준길을 숨기려다가 경찰에게 잡혀 조사받는 혜경. 혜경은 그런 구질구질한 신세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그런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비관을 가진 이중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혜경에게 사랑은 비참한 삶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자, 혜경을 더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원흉이다.
같이 살까? 라는 재곤의 말 한 마디에 희망을 걸 만큼 간절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하지만, 그럴수록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혜경 또한 무뢰한의 사랑을 하고 있다.
3. 재곤의 사랑: 무뢰한이 된다는 것
재곤은 셋 중 유일하게 건실한 삶과 직업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다.
그는 젊고 유능한 형사다. 재곤의 세계는 혜경에게 접근하기 위해 불량배의 삶을 연기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흔들린다.
그는 위태로운 혜경의 삶을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그러한 삶을 꿋꿋하게 살아가는 혜경에게 사랑을 느낀다. 결국 형사의 본분을 순간적으로 잊고 혜경에게 함께 살자고 얘기하게 될 정도로.
그러나 재곤을 준길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준길을 죽이게 되고, 그 길로 혜경과 결별해 형사로서의 삶을 다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무뢰한의 삶을 잊고 다시 형사의 삶을 살아가던 재곤은, 몇년 후 마약 사범을 잡기 위해 달동네에 갔다가 마약 중독자 남자를 간병하며 더욱 비참하게 살고 있는 혜경을 재회한다.
재곤은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혜경에게 칼을 맞게 되는데, 재곤은 그 후 혜경을 체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혜경에게 '새해 복 많이 받아라, XXX아.'라고 시시껄렁하게 말하며 혜경을 사랑하던 시절의 폭력배스러운 말투를 사용한다.
말 그대로, 무뢰한의 사랑이다.
불쾌한 사랑의 골짜기에서 구질구질하고, 비참하게 서로를 붙잡고 있는 무뢰배들의 이야기를, 무뢰한에서 접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