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우리는, 어땠을까?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
글 입력 2023.10.07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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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몸이 아파서 하던 일들을 잠시 멈췄는데, 그 새 <그해 우리는>을 정주행했다. 나는 로맨스 장르의 드라마를 여태 잘 보지 않았다. 특히나 <그해 우리는>과 같은 소위 '빌런이 없는' 잔잔한 로맨스 장르는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오롯이 몇 화, 몇십 분씩 내내 따라가야 한다는 점에서 잘 보지 않았다. 어쨌건 작년 초 본작은 엄청난 인기였고, 과 동기의 추천을 받은 차에 한번 보게 되었다가 일주일만에 홀린 듯이 정주행을 마쳤다.

 

<그해 우리는>. 다분히 불친절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해 우리는 누구였을까? 내가 처음 생각했던 그해 우리는 최웅과 국연수였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본작의 주인공이며 이 작품의 주제는 그 둘의 재회와 연애, 성장이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돌아보니 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우리는 꼭 최웅처럼, 국연수처럼 살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김지웅처럼, 채란처럼, 박피디처럼, 철물점 아저씨처럼, 김지웅과 국연수 옆자리의 학생처럼, 엔제이처럼, 구은호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각자만의 그 해를 보낸다.

 

 

"사람들은 누구나 잊지 못할 그 해가 있다고 해요. 그 기억으로 모든 해를 살아갈 만큼 오래도록 소중한." - 최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순간의 행복한 기억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버티는 힘이 된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는 매 순간 많은 것들과의 상실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갈대밭을 스쳐가는 바람처럼, 사랑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다 어기고 떠나는 법으로서 언제나 보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기억이며, 흔히들 남는다고 이야기하는 사진이나 SNS 같은 매체는 그것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매개의 역할 정도를 하는 셈이다. 다큐를 찍기 싫어하는 국연수에게 김지웅은 휴먼 다큐의 장점을 돌아오지 않는 시간과 추억에 대한 기록으로 설명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 모두의 그 해를 기록한다. 찌질하고 유치한 우리네들의 그 해,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그리고 그래서인지 더 아름다운 그 해들에 대한 찬가에 박수를 보낸다.

 

잊지 못할 그 해라는 표현이 이 드라마의 캐치 프레이즈와 같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전 문단에서 잊지 못할 그해에 대해 나름의 예찬을 했지만, ‘잊지 못할 그 해라는 것은 꼭 좋은 뜻만은 아니다. 우리는 좋건 싫건 안 좋은 기억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마치 우리와 같이, 모두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정신분석학에서 정의하듯, 사람의 증상과 행동방식은 대다수 유년기에 형성된 시니피앙에서 기인한다. 이런 트라우마로부터 생긴 여러 가지 결함을 얼기설기 엮은 채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던 '어렸던' 이들의 삶은 5년만에 국연수가 최웅을 찾으며 많은 것이 변화한다. 질투도, 부러움도, 사랑과 힘듦까지도 억누른 채 묵묵히 살아가던 김지웅도, 자신의 삶이 늘 혼자라고 생각하며 일찍 철이 든 어른아이 국연수도, 자신이 양부모님에게 폐를 끼칠까봐 무기력하게 살아온 웅이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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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행복과 안온을 찾은 그들의 삶을 응원한다.

 

 

나는 그 중에서도 김지웅의 삶이 특히나 인상 깊었다. 김지웅은 죽기 전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는다. 어머니도 김지웅에게 말로서 사과하지 않는다. 지웅은 가끔 찾아오는 어머니에게 분노를 표출하고 매몰차게 몰아내면서도 결코 현관의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는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분명히 김지웅에게 원망과 분노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결국 끊어낼 수 없는 천륜, 그가 돌아가야 하는 집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오롯이 미워할 수 없다. 그렇기에 생기는 양가감정을 김지웅은 대사를 통해 터뜨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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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웅과 어머니의 서사가 너무 갑작스럽게 삽입되었다 생각했는데, 그 모든걸 납득시킨 1분간의 토로.

 

 

아이가 일찍 철이 드는 것은 어른의 탓이다. 일찍 철이 들어버린 어른아이, 아니 무늬만 어른인 아이 지웅이가 울면서 어머니 앞에서 자신의 감정과 설움을 토해낸다. 그것은 자신을 버리고 가는 어머니에 대해 분노와 슬픔을 느끼는 8살의 그것이었고, 때때로 15살의, 열아홉살의 그것이었고, 이내 스물아홉 방송국 피디인 자신의 그것이었다. 화도 내고, 눈물도 흘리던 지웅은 결국 어머니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해왔던 자신의 결함을 처음으로 용기내어 마주한다.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살아봐요." - 지웅

 

 

그렇게 지웅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나보낸다.

 

잠시 작품의 밖으로 빠져나와보자. 내가 포커스를 맞춘 감이 있지만 최웅과 국연수의 관계, 즉 드라마의 메인 주제가 클라이막스로 치닫던 극후반부에 갑작스레 김지웅의 서사와 대사만 몇분간 지속되는데, 충분히 부자연스러울 수 있었던 상황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늘 웅이 가족에서도, 웅이와 국연수의 관계에서도, 다시 찍게 된 다큐멘터리에서도 관찰자로서 한 발짝 뒤에서 자신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죽여온 김지웅이 애증의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은 그 연출과 대사의 내용을 통해 관객을 납득시켰다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서 <그해 우리는>우리가 단순히 최웅과 국연수만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국연수는 어려웠던 가정환경 때문에 인간관계에 있어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간다. 자신은 행복할 자격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며 성공만을 위해 피상적인 효율성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런 국연수에게 최웅은 비효율 그 자체이며, 방송 촬영부터 연애까지 최웅만 엮이면 비효율적이게 되는 자신의 일상이 불만족스럽다. 나름의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던 때의 어느 날, 일 때문에 다시 최웅을 만나며 그녀의 삶은 다시 비효율 속으로 빠져든다.

 

가난의 잔인한 점은 남에게 베푸는 것조차 막는다는 것이라는 언급이 있었다. 이를 조금 넓혀서 생각해보자면, 가난은 선택지를 지나치게 좁게 만든다. 국연수에게 있어 당면했던 가난은 자신과 자신의 유일한 가족, 할머니를 지키기 위해 일과 성공 이외의 것을 사치라 느끼며 살아가게 한다. 웅이와 마주하며 연수는 잃는 것이 두려워 잃어갔던 많은 것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처음으로 가지게 된 선택지에 국연수는 결국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바로 한국에 남는 것. 프랑스로 떠나 더 나은 성취를 이루는 것보다 내 인생의 그 해를 빛내준 사람들이 있는 한국에 남기로 국연수는 생애 처음 자신을 위한 결정을 내린다.

  

 

"내 인생 별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꽤 괜찮은 순간들이 항상 있었어. 내 인생을 초라하게 만든건 나 하나였나봐." - 국연수

 

 

사람은 유년의 아픈 기억을 스스로 다시 마주하고 극복할 때 어른이 된다.

 

어른이 된 웅이, 연수, 지웅이 그 외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란다.

 

작중 재미있게도 자주 언급되는 키워드 중 하나가 건물이다. 건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둘이다. 정상급 아이돌인 엔제이는 건물의 구매에 집착한다. 이유는 사람도, 인기도 변하지만 건물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변화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최웅의 그림에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건물과 자연만을 그린다. 사람은 변하지만 건물과 자연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이유다. 지웅은 휴먼 다큐의 장점으로 그 순간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을 꼽는다. 이는 흘러가는 시간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바꾸어 놓는 것에 대한 동경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변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예찬한다.

 

늘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평화로움을 추구하며 사는 최웅이 국연수에 관련된 일만 생기면 늘 요동친다. 국연수가 없던 5년간 최웅은 그러한 공허한 조용함을 그림으로 표현해 성공을 맛본다. 누아 작가는 최웅에게 그의 그림은 공허하다고 비난하며 비평가는 최웅의 그림이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최웅이 과거의 아픔으로 인해 가진 불변함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친부에게서, 국연수에게서 버림받은 것에 대한 그의 불안감은 변하지 않는 자신만의 그림 세상으로 그를 가두게 한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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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최웅 역시도 변한다. 파리로 떠나기 전 그는 자신을 버린 친부를 멀리서 쳐다본다. 친부 역시 그를 알아본다. 하지만 어ᄄᅠᆫ 사과도, 변명도, 대화도 없다. 최웅은 자신의 아픔을 담담히 마주한다. 악몽으로 나올 정도로 비참했던 버림받는 순간이었지만, 그 역시도 국연수에게 훌훌 털어버리고 난 후에는 더 이상 아프지 않다. 매몰차게 자신을 버리고 떠난 국연수 역시도 돌아왔고, 곁에는 새로운 소중한 사람들이 있다. 최웅은 변해가는 것 역시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깨닫고 흐르는 시간 속의 순간을 온전히 향유하는 법을 배우며 파리행 비행기에 올느다. 작가는 변하지 않는 것을 동경함과 동시에 결국 변해가는 것 역시도 그마다의 아름다움을 가짐을 역설한다. 또한 우리가 가지는 그 변해가는 시간 속에 스쳐 지나는 순간들을 온정적으로 바라본다. 돌아온 최웅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인 추측으로는, 사람을 그리지 않던 최웅이 자신의 그 해를 빛내준 사람들을 그리며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좋을 것 같다.

 

다큐멘터리 촬영이 이 드라마의 주 소재이다보니 감독의 시점이 언급된다. 순수 창작물이 아닌 다큐멘터리 역시도 인간이 찍는 이유는, 객관적이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어 묻어나는 카메라 뒤의 인간의 시선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두에게 아름다웠던 순간이 있다. 우리는 때로 그 찰나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존재다. 힘든 시간에도 버티고 돌아올 든든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그 시간과 그 시간을 함께 향유하고, 만들어준 모든 고마운 사람들.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봐 준 그해 우리는의 카메라 뒤 누군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김우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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