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영화가 아이들의 시선으로 사회를 말하는 방법 [영화]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을 보고
글 입력 2023.10.08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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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미래다.”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친 선생님이 나와 우리 반 친구들에게 이 말을 건네셨다. 그땐 선생님의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일은 잊고 지냈다.

 

다양한 것을 겪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했는데, 학구적인 것과 더불어 사람과의 관계를 몸으로 체감하며 배우곤 했다.

 

한때, 가장 친했던 친구와 겨울방학에 의견 차이로 사이가 멀어졌던 적이 있다. 단순한 오해였지만 날카롭게 신경을 내세우는 대신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랬더니 눈이 내리던 골목길은 금세 수목원 내의 온실이 되어 나와 친구의 관계를 푸릇하게 살려줬다.


 

그럼 언제 놀아? 친구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친구가 때리고... 나 그냥 놀고 싶은데!

 

- 영화 <우리들> 中

 


영화 <우리들>에는 이런 대사가 있다. 만연하는 갈등, 분열, 다툼. 어른들이 구축해 놓은 사회에서도 가장 바라는 것은 위 대사 같은 사회가 아닐지.

 

그런 이유에서, 때때로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엔 사회를 반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을 느낄 수 있는 영화 하나를 소개하려 한다.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이다.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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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세계 2차대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 영화에는 2008년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내 나이 또래만한 남자아이(브루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부잣집 도련님 아들로서 가족들과 베를린에서 살고 있었지만, 아버지가 유대인 수용소장이 되기로 결심한 후 폴란드 수용소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수용소에서 생활하던 다른 또래 유대인 남자아이, 슈무엘을 만나게 된다. 나이대도 비슷한 데에다가 함께 놀 또래가 없어 외로웠던 두 아이는 급속도로 친해지게 된다.

 

슈무엘과 시간을 보내며 수용소에 호기심이 생긴 브루노는, 슈무엘의 아버지를 찾아주고자 수용소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 가스실 안에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다.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모든 것을 말한다



아이들의 시선에선, 어른들의 구축해놓은 사회의 모든 민낯이 드러나지 못한다. 하지만 때때로 순수함은 이 세상 어느 빛보다 환하게 빛나 사회의 정곡을 찌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 브루노의 순수함이 그 빛처럼 도드라지는 장면이 몇 있었다. 그는 수용소를 ‘농장’ 혹은 ‘막사’라고 생각했다. 그저 새로운 곳에서 놀 친구가 없는 외로움에 그쪽으로 놀러 나가고, 당시 나치가 금을 갈랐던 유대인 친구 슈무엘과 친해지게 된다.

 

반면, 아버지는 나치 사상에 완전히 지배되어 조국을, 또 가족을 위해 수용소장이 되고 유대인을 학살하는 등 잔혹하게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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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수용소에 대한 좋은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아버지와 측근 사람들이 선전 영화를 함께 시청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브루노는 천장 문틈으로 그 영화를 몰래 지켜본 후, 상영실에서 나온 아버지를 안아주며 이렇게 말한다.


 

난 아빠가 좋은 일을 하리란 걸 믿고 있었어.

 

-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中

 

 

영화를 보며 분명 나는 그 시대 사람도, 나치 사상을 추앙하는 것도 아닌데 어딘가 깊숙이 찔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 말을 들은 브루노 아버지의 심정이 궁금해졌다. 과연 아버지 랄프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을까? 참혹함을 뒤로 숨긴 채 가면을 쓴 아버지. 그리고 그런 어른과 사회를 온전히 믿는 순수한 브루노, 아이들은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회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다.

 

 

 

나뉜 두 곳, 이어지는 한 마음


 

영화는 의도적으로 철창으로 나뉘는 슈무엘과 브루노의 모습을 자주 연출한다. 브루노는 수용소 밖 잔디밭에서, 슈무엘은 수용소 안 운동장에서 대화하며 우정이 싹튼다.

 

그러던 중 브루노와 슈무엘은 영화에서 작은 갈등이 생긴다. 함께 브루노의 집으로 놀러 와 빵을 먹던 슈무엘이 나치 대원에게 발각되자, 브루노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와 압박에 그만 당황하고 말아 슈무엘을 모르는 아이라고 말한다. 자신도 모르게 거짓말을 한 브루노는 나치 대원에게 잡혀간 슈무엘을 걱정한다. 자기 행동을 후회하며 수용소를 몇 번이고 찾아갔지만, 슈무엘은 보이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 다시 슈무엘을 만나게 된 브루노는 진심 어린 사과를 그에게 건넨다. 슈무엘은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두 사람은 수용소 철창을 가운데에 둔 화해의 악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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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영화의 장면들은, 아무리 사회가 유대인을 격리해도, 이 아이들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철창 사이로 맞잡는 두 손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어쩌면 화합해 세상을 바꾸는 몫은 이제 막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달려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은 편견 없이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 힘이 있으니까. 때론 어른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한다. 그들을 '어리다'고만 판단할 수 없다.

 

이쯤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이 다시 떠오른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학습하며 사랑해 나가야 하는 미래였다. 그 말씀을 속에 다시 새기며 지금 내가 유일하게 가진 순수함은 무엇인지, 그것으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거듭 고민하게 되는 밤이다.

 

 

[박정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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