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억의 캐비닛: 일리야 밀스타인 展

글 입력 2023.10.02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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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미술엔 참 많은 하위 장르가 있다. 그래서 전시회를 가게 될 때면, 그건 회화를 보러 가는 것일 수도 있고 조각을 보러 가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심지어 회화 하나만 생각하더라도 그 내부 장르는 또 여러 갈래로 나뉜다. 당장 회화 안에 유화도 있고, 수채화도 있고, 판화도 있고 그 외의 다양한 영역들이 있으니 정말 다양한 미술 장르가 있다는 게 실감이 난다. 그런데 대부분 전시회를 보러 갈 때엔 회화의 범주 안에서도 유화, 수채화, 판화의 영역에 속한 작품들을 주로 봤던 것 같다. 그 점을 생각한다면, 최근에 다녀온 전시회는 좀 색다르다. 왜냐하면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의 전시회를 보고 왔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작품을 대상으로 한 전시회를 다녀온 적이 있나 하고 상기해 봤을 때, 이전에 장 줄리앙 전시를 보러 갔던 것 그리고 디자인 페어에서 보았던 것을 제외하면 떠오르는 게 없다. 그만큼 일러스트레이터의 전시회를 다녀온 경험이 적은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번에 다녀온 전시는 더더욱 궁금하고 매력적으로 와닿았다. 왜냐하면 일러스트를 그리 많이 본 적이 없는 나에게도 다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을 보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 전시 소개 >


뉴욕 타임즈, 구글, 페이스북, 구찌, LG전자 등

수많은 세계적 브랜드들의 러브콜을 받는 작가, 일리야 밀스타인


Cabinet 1: 단독 또는 둘의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들로 구성

Cabinet 2: 인물들이 함께 등장하는 작품으로 일상적인 장면을 그려낸 작품들 관람 가능

Special Cabinet: 일리야 밀스타인이 직접 기획에 참여한 공간 및 오리지널 드로잉 전시

Cabinet 3: 일리야 밀스타인이 표현하는 군중의 양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

Cabinet 4: 인물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작가의 신작들을 발견할 수 있는 섹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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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Estate)> ⓒ Ilya Milstein



먼저 Cabinet 1에서는 일리야 밀스타인의 내밀한 기억의 서랍을 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명 혹은 두 명의 인물들이 나오는 작품들로 작품이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선이 자연스레 인물에 집중되는 효과가 있었고, 그 인물의 내면과 사고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었다. 이 섹션은 작품 <티레니아해 옆 서재>의 타이틀을 그대로 딴 제목을 하고 있었는데 섹션 전체의 분위기가 잘 와닿는 이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중에서도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여름(Estate)>이었다.


나뭇잎 사이를 뚫고 닿아오는 따사로운 햇빛, 그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는 지중해 그리고 그늘진 곳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나른하게 몸을 기대고 있는 인물에게서 느껴지는 이 자유로운 분위기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이탈리아를 가본 적은 없지만, 크로아티아에서 보았던 아드리아 해의 아름다웠던 그 모습을 연상하면서 감상하니 더욱 낭만적이게 느껴졌다. 지상 위의 무릉도원은 아마 저런 순간을 두고 말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닐까? 즐거운 듯 살짝 미소짓고 있는 인물에게서 나도 모르게 부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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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Rumination)> ⓒ Ilya Milstein



사색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관람객에게도 즐거운 일이다. 나 역시 사색에 빠져들고 싶은 순간을 만드니까. 일리야 밀스타인은 그런 순간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포착해서 담아내는 작가였다. 서재 시리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티레니아해 옆 서재>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색이라는 작품의 이름까지 완벽해서 이 작품이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눈 내리는 날에 밖에 나가지 않고 머그잔에 따뜻한 음료를 담아두고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 이건 그야말로 완벽한 조합이다. 그 아늑하고 완벽한 순간을, 이 젊고 유능한 예술가는 맥시멀하면서도 굉장히 세밀하게 잘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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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오후의 휴식(Afternoon Break)> ⓒ Ilya Milstein



그런데 일리야 밀스타인이 유명한 건, 맥시멀하게 정말 많은 것을 담아내면서도 이 모든 것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묘사한다는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이 화풍이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널리 와닿은 것은, 그가 다양한 기업들과 협업을 하며 커미션 작품들을 두루 냈던 점도 크다. 이번 기억의 캐비닛 전에서는 그가 한 여러 커미션 작품들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단연코 한국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아무래도 LG전자와 함께 한 커미션 작품이다.


그가 LG전자 커미션으로 만든 작품은 한 점이 아니라 여러 점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늦오후의 휴식>은 Cabinet 1에서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LG전자 커미션 작품이었다. 휴식을 취하며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누워있는 인물 주변에 다양한 것들이 시선을 끌었다. 소파 위 협탁의 메모지르 보면 LG 로고가 그려져 있기도 하고, 인물의 오른편 위로는 LG전자 제품일 게 분명한 공기청정기가 자리잡고 있다. 가장 오른쪽의 서랍장 같은 가구 위에는 민화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가 그려진 한국 그림책이 보인다. LG전자와 협업을 하면서도 그저 기업에만 집중한 게 아니라 그 기업이 속한 국가, 그 국가의 문화 같은 것들을 충분히 숙지한 후 작품을 그렸다는 것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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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하루를 위한 시작(A Fresh Start to a Fresh Day)> ⓒ Ilya Milstein



이런 작가의 세심함은 Cabinet 2의 여러 인물들을 담아낸 작품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두 번째 섹션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LG전자 커미션 작품 <새로운 하루를 위한 시작>을 보면 4인 가족과 고양이로 이루어진 가족의 따스하고 가족적인 분위기가 물씬 난다. 이 작품 속 공간은 밀스타인 본인의 집과 실제로 비슷하게 그려졌는데, 가만 보면 냉장고가 LG 것이다. 그리고 냉장고 한 면에 보이는 병들을 보면, 한글이 쓰여져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음료들이 있다. 박카스나 복분자, 소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반의 여러 장식들을 보다 보면, 부부의 금슬을 상징하는 목각원앙이 보이고 호랑이가 그려진 청화백자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밀스타인의 작품은 원경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조망한 다음, 반드시 근경에서 세부적인 디테일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관람객이 의식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았다. 물론 그것을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더 즐겁게 감상하려면 그 디테일들을 파악하고 곱씹는 재미가 있어야 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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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The Raconteur)> ⓒ Ilya Milstein



여러 사람을 그린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들을 잘 들여다보면 따스한 분위기가 잘 느껴진다. 그가 사람들을 이런 시선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작품에도 그 온기가 남아있는 듯하다. 그래서 두 번째 섹션에 있는 작품들은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 보면서 마음이 푸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소소하고 특별할 것 없지만, 분명히 마음 속 깊은 곳에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고 새로운 힘을 불어넣어주는 그런 일상적인 순간들을 밀스타인이 잘 담아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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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캐비닛>



전시공간을 이어가다보니, Cabinet 2와 Cabinet 3 사이에 스페셜 캐비닛 공간을 마련해 둔 것을 볼 수 있었다. 첫 섹션에 있었던 <티레니아해 옆 서재>와 동일한 모습을 배경으로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실제로 티레니아해를 바라보는 것마냥 책상 앞에 앉아볼 수 있게끔 공간을 구성해둔 것이었다. 포토존이기도 한 동시에 이 공간에는 앞선 섹션에서 살펴보았던 작품들을 작가가 드로잉한 작은 작품들까지도 살펴볼 수 있었다. 관람객이 전시에 좀 더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안배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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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여름, 이스트 빌리지의 늦은 밤(Wee Hours in the East Village, Summer 1983)>

ⓒ Ilya Milstein



그러나 Cabinet 3으로 넘어가면 조금 느낌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Cabinet 2에서도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좀 편하고 가족적인 분위기 혹은 일상적인 순간을 담은 작품들이 많았다고 한다면 Cabinet 3에서는 군중이 등장한다. 서로에게 친밀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냥 평범하고 일반적이며 서로를 스쳐 지나가기 바쁜 군중들. 그래서 얼핏 보면 무엇을 나타내기 위한 그림인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는 작품들도 있다.


하지만 그 작품들도 밀스타인 특유의 통찰력이 담겨 있기 때문에, 원경에서 먼저 조망한 다음 근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1983년 여름, 이스트 빌리지의 늦은 밤>의 경우 벽에 그려진 키스 해링 특유의 시그니처 마크 때문에 이 작품 속 배경이 미국이고 그 미국 중에서도 뉴욕일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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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밀스타인의 이 날카로운 통찰력은, 군중을 활용해서 사회 비판적인 메세지를 드러내고자 할 때에도 예리하게 발휘되었다. 주로 그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평화롭거나 즐겁거나 안락한 모습들이었지만, 사회를 비판하고 대중들에게 자신의 뜻을 드러내고자 할 때 밀스타인은 작품 속 사람들에게서 표정을 앗아갔다. 난관, 고통,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웃음과 함께 그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특히 이런 작품들에서는 검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서슴지 않고 조성했다. 이렇게 일리야 밀스타인이 의도한 작품들을 보면,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안온함이 없기에 역설적이게도 그가 던지는 메세지가 더욱 극명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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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binet 3 후반부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메세지를 담은 작품들을 보고 다소 복잡해진 생각을 안고 들어선 Cabinet 4은 분위기가 전환되는 영역이었다. 마지막 섹션인 이곳에서는 그의 최신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최신작 중에서도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인류가 영장류의 왕으로 등극하여 지구를 정복하듯 살아왔지만, 기후위기도 눈앞으로 닥쳐온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대로 가다간 인류의 미래가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하게 되곤 한다. 상당히 경각심이 들게 되는 순간이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일리야 밀스타인은, 아예 인류의 자기중심적 사고로부터 탈피해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렇게 사람이 담기지 않은 작품들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After Man, '인류 이후에'라고 번역되는 작품들을 볼 때 상당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하게 작품만 놓고 보면 판타지적인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면, 오랜 시간동안 항상 자정하며 재정비했던 자연의 흐름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과연 인류가 자연이 스스로를 재정비하는 그 변혁기 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의문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정말 인류가 다 사라지고 나서 생존한 생명체들만 사는 세상이 온다면, 그 세계는 과연 어떨까. 현 인류가 아닌 또 다른 지성체가 나타나 자연을 정복하려 할까?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자연스럽게 의문을 던지는 일리야 밀스타인에게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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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리야 밀스타인의 작품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국내에선 없었는데, 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첫 전시에 자리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이아트뮤지엄에서 하는 전시는 항상 기획과 배치까지 잘 되어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를 믿고 전시회에 간 것이었는데 이번에도 잘 준비된 전시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전시 벽면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걸 매번 노루페인트에서 하는데, 이번에도 영역별로 잘 어울리는 색으로 구역 구분을 명확하게 해준 점이 좋았고 필요에 따라서는 바닥의 질감까지 변화를 줘서 해당 공간에 대해 관람객이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안배한 것 역시 좋았다.


사람들이 가진 내밀하고 따뜻한 기억들을 디테일하게 잘 잡아내면서도,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것 역시 서슴지 않는 일리야 밀스타인. 그의 냉철한 통찰력과 파고드는 탐구정신 그리고 이를 세밀하게 풀어내는 능력이 온전히 조화를 이루기에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그에게 수많은 커미션 작품들을 의뢰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앞으로 그의 작업 방향성이 또 어떻게 변화해갈지, 오래도록 지켜보고 싶어졌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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