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술과 취약한 해방

글 입력 2023.09.1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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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의 효능에 관해 생각한다. 술은 그야말로 유흥의 도상인데, 나에겐 그 자체가 즐거움이라기 보단 술로써 느낄 수 있는 감각에 매료되는 것에 더 가깝다. 술은 기꺼이 취약해지는 일이다. 정체 모를 긴장감으로 빳빳해진 신경들을 하나씩 달래는 돌봄이자 거칠게 끊어내는 외면이다. 얼마나 솜씨 좋게 신경들을 제거하고 살려두었는지에 따라 술은 유흥으로의 기폭제가 되기도 호전적인 훼방꾼이 되기도 한다.


운 좋게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를 넘나드는 취함에 다다르면 왠지 나라는 핵심에 더 가까이 가닿은 기분이 든다. 마주한 내 모습이 초라하든 봐줄만 하든 내면에 접속한 느낌은 그 자체로 묘한 쾌락을 준다. 그 흥분은 은밀하고도 강력해서 미처 포장하지 못한 날 것의 나를 타자에게 전시할 용기를 선사한다. 이는 맹수가 다가오는 것을 위험으로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로 비非본능적인 어린 초식동물의 모습과도 같다. 

 

이따금, 아니 사실 아주 빈번히 그 순간을 찰나로 느낀 채 고주망태가 되어버리지만. 접속의 순간을 ‘순간’으로만 만들지 않을 수 있는 이들이야말로 술의 대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가가 되진 못해도 취약한 해방의 순간을 좋아하는 나로서 술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처사다. 


우스꽝스러운 생각도 한다. 과거에는 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그토록 끔찍한 고문을 가했을까.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하는 밤을 단 며칠만 보냈어도 원하지 않는 정보까지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살을 저미는 것보다야 주량 이상의 술을 먹이는 것이 서로에게 덜 폭력적이지 않았을까. 


물론 고문을 가해도 속내를 열지 않는 이들에게 무아지경의 만취 상태는 그리 겁낼 만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신경이 끊어져도 결코 해방되지 못하는 긴장 속에 갇힌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다량의 술을 거쳐서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못하는 것들이. 그렇게 굳건히 지켜지는 것들에 나는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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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도 그런 긴장의 흔적이 있다. 가족의 역사이며 챕터는 폭력이다. 정작 당시에는 잊고 살았다가, 성인이 되어 알코올이 머리를 헤집는 날이 많아지며 새롭게 연결된 기억과 감각이다. 술 한 잔 걸치지 않고서는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던 그 경험을 나는 뒤늦게 바라보았다. 홀로, 미숙하게. 


어느 순간 가족의 풍경이 새롭게 보였다. 그런 역사가 있었나, 같은 역사가 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평온했던 지난날들에서 저마다의 애씀이 느껴졌다. 과도한 순진함으로 가장한 미숙한 성숙을 수행하며 나와 가족들은 웃고 있었다. 이해가 어려웠다. 그렇게라도 지키고 싶은 우리 관계와 그렇게 해야만 이어질 수 있었던 우리 관계가 같은 뿌리라는 것이.


몇 번의 시도와 몇 번의 실패 속에서 나는 또 한 번 그 역사를 마주보았다. 역시 술의 도움을 받았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내가 알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직 이해가 가지도, 아물지도 않은 물음들에 대한 답을 듣고 싶은 동시에 그 답을 알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던 마음의 갈피를.

 

20년은 다 되어가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처음 제대로 누나들과 나눴다. 나의 기억과 그들의 기억은 미묘하고도 결정적으로 달랐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지도 않았다. 더 이상 내 마음도, 무슨 말을 할지도, 무슨 말을 뱉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거대하게 쌓인 말과 감정을 배설했다. 결과를 알 수 없는 무모한 도박을 걸어도 될 만큼 내 안엔 배팅할 코인이 무더기로 있는 것 같았다. 그 풍족함이 나는 싫었다. 접속이 불쾌했고 그 순간을 찰나로 만들고 싶었다. 술을 먹었다.


화끈한 놀음꾼이었던 나의 기세는 다음날 숙취와 함께 옅어져 갔다. 무슨 말을 어디까지 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시 원점이다. 숱한 실패 속에서 어렴풋이 깨닫는다. 놀음의 세계와 달리 대화의 세계에선 큰 한 방보다 작은 여러 방을 날리는 것이 더 큰 배포가 필요하다는 것을. 마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술의 대가처럼. 


여전히 배포가 작은 나는 큰 한 방을 위해 못 다한 말들을 쌓아간다. 신체의 모든 구멍이 입 구멍이 되어 말이 새어나가면 어떨까 상상하며. 언젠가 가벼워질 수 있을까. 이미 살아갈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것은 아닐까. 무엇을 바라는 걸까. 어떤 나와 접속해도 외면하지 않을 수 있는 그 오랜 찰나를 기다리는 걸까. 술의 효능 따위는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는 삶을 기다리는 걸까. 우후죽순 생겨나는 물음들에 대답하지 않은 채 다시 삶에 흘러간다. 술과 헤어질 수는 없겠다. 고 아직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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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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