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불가해한 욕망의 탑 [영화]

테일러 핵포드, <데블스 에드버킷>(1997)
글 입력 2023.09.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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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성과 상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영화 장르를 '오컬트'라고 부른다. 인간이 축적한 지식으로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곳을 향해 가는 이런 영화 장르를 나는 무척이나 흥미롭게 생각하는데, 이러한 영화들은 주로 악령이나 악마와 같은 미신적인(혹은 미심쩍은) 존재들의 힘을 빌어 인간의 불완전성을 낱낱이 고발하기 때문이다. 오컬트 영화 속에서 우리의 불완전성은 미지의 존재로부터 명징하게 지적받는다. 종교적 차원에서 인간은 완전한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완벽한 피조물이지만, 윤리적 차원의 인간은 사실 불완전하고 어두운 존재들과 더욱 닮았다는 것, 혹은 기어코 닮아간다는 것.


최근에 만난 어떤 영화는 악마와 인간, 지옥과 현세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흥미롭게 육박해온다. 흔히 끔직한 악행을 저지른 인간을 악마에 비유하지만(악마 같은 인간), 사실은 악마가 인간의 형상을 비유하여 만들어진 존재일 수 있다는 의심을 짙게 만드는 영화(인간 같은 악마). 이런 영화는 소름과 전율을 동시에 전달하고, 세계는 마침 어둡게 깊어진다.


테일러 핵포드의 영화 <데블스 에드버킷>(1997)을 본다.

 

 


탄생



울먹이는 한 소녀가 법정에 앉아 있다. 그녀가 내뱉는 진술은 끔찍한 그날을 정확히 묘사한다. 어느 하교 시간, 그녀의 선생이 그녀의 "블라우스 속"으로 그리고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 넣었다는 것. 공포에 질린 그녀의 진술이 계속되는 동안 피고인석에 앉은 선생은 그날의 끔직한 유희를 되새김하는 듯 책상 아래서 음흉하게 손을 움직인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 앉아 있던 로맥스(키아누 리브스)가 발견한다. 피고인의 행동을 보며 당황한 표정이 역력한 그는 피고인의 변호사다.


진실에 집중한다면 재판의 진행이 무의미한 명백한 상황. 지금껏 단 한 차례도 패소한 적 없는 유능한 변호사인 로맥스는 갈등에 빠진다. 진실을 겸허히 따라 당연한 패배를 받아들일 것인가, 진실을 희석해 다시 승리를 거머쥘 것인가. '모두 이길 순 없다'는 삶의 명백한 진실은 오히려 그의 욕망에 불씨를 당긴다. 성폭행 피해자인 소녀는 로맥스의 거센 신문 앞에서 무고한 선생의 삶을 몰락시키려는 반항적 가해자의 위치로 전락한다. 상처받은 하나의 인격을 완전히 추락시키는 일조차 서슴지 않고 로맥스는 더러운 승리를 택한다.


술로 죄책감을 가볍게 달랜 후 승리감에 깊이 도취한 로맥스가 향하는 곳은 인간의 모든 욕망이 바벨탑처럼 높게 쌓아올려진 도시, 뉴욕이다. 뉴욕의 한 거대한 회사에서 파격적인 조건의 스카웃 제의를 받은 로맥스는 사랑하는 아내 메리 앤(샤를리즈 테론)과 함께 지체 없이 뉴욕으로 향한다. 부와 명예, 모든 것이 넘치도록 제공되는 새로운 터전에서 로맥스는 성경과 교회에 입각한 어머니의 삶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다. (뉴욕을 성경 속 타락한 도시의 상징인 바빌론으로 비유하며 걱정하는 그의 어머니는 욕망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기보다는 회피하는 인물로 보인다) 이제 그의 삶을 지배하는 건 회사의 사장인 존 밀턴(알 파치노)이다. 평탄했던 욕망은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서 광대하게 펼쳐지고, 악은 자연스럽게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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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수상한 의식을 위해 동물을 살육한 한 주술사 사건의 승소를 시작으로 로맥스는 현대판 바빌론에 완전히 입성한다. 동물의 혀에 못을 박아 "침묵을 만들어" 내겠다는 주술사의 의식은 타락한 도시에서 욕망의 실현은 진실의 침묵을 전제(해야)한다는 암시처럼 보인다. 이 의식은 앞서 성폭행 사건의 진실을 침묵시켰던 로맥스의 행위와 다르지 않다. 욕망=악이라는 도식은 성급한 오류지만, 적어도 진실과 연루되었을 때 그것은 공식처럼 성립한다. 거주와 환경 그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술과 섹스와 돈의 세계에서 로맥스의 삶은 결코 낯설지 않고, 기꺼이 진실을 죽이는 악이 되면서 그는 오직 성공만을 위해 달려간다.


욕망을 따라 악에 물드는 로맥스와 달리 아내 메리 앤은 뉴욕의 생활에서 불안을 느낀다. 로맥스 동료 아내의 반응에 따라 몇 번이고 벽에 칠할 페인트의 색을 바꾸고, 파티장에서 로맥스 없이 홀로 남겨지는 일을 두려워하는 메리의 모습은 성경 속 길잃은 어린양의 비유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녀의 구불구불한 머릿결은 양의 털을 연상시킨다. 밀턴의 유혹에 흔들린 그녀가 머리를 짧게 자른 순간 어린양은 목자의 보호에서 완전히 벗어나 무방비가 된다.) 남편 로맥스를 믿고 함께 떠나왔으나 정작 그녀를 보호할 사랑의 상대는 통제 어려운 성욕과 탐욕에 물들었으므로, 사랑의 개념조차 붕괴시키는 악의 화신 밀턴의 영적 공격을 홀로 견디지 못한 그녀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전염병처럼 삶을 좀먹어가던 악이 사랑의 죽음을 불렀다. 타락한 도시에서 벌어진 모든 희극과 비극이 밀턴에 의해 계획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로맥스는 분노에 차 밀턴을 찾아가 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이내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치명적 진실을 전해듣는다. 밀턴이 악마라는 초월적 존재이고, 자신이 밀턴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악마의 아들이며, 그의 성욕을 당겼던 치명적인 욕망의 대상 크리스타벨라(코니 닐슨)가 이복 남매라는 것. 인류의 금칙인 근친상간을 통해 로맥스와 크리스타벨라의 아이를 낳아 자신의 뿌리를 뻗겠다는 밀턴의 계획, 그리고 그 대가로 그가 제시한 탐스러운 제안.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악의 화신과 삶의 모든 것을 잃고 절망할 사랑의 목자 사이 갈림길에 선 로맥스는 다시, 방아쇠를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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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압도적 악의 존재인 밀턴은 그가 보여주는 세속에서의 전능함(우리는 이 단어를 대체로 신에게 바치지만)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평상시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영화 속 누구보다 화통하고 쿨한 인상을 남긴다. 모든 부와 명예가 모여드는 중심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밀턴은 악이 일상 속에 스며들어 어울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존재이자, 선과 악을 판단하는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는 질문이다. 객관적 악의 존재임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그에게서 우리가 동경하는 어떤 삶의 방식을 보게 되는 것. 우리가 돼야 하는 것과 우리가 되고 싶은 것의 괴리는 신과 악마, 윤리와 악의 차이만큼 깊다.


법률을 다루며 세속의 모든 부와 명예를 거머쥔 밀턴이 스스로를 비유하는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난 모나리자의 치마 속을 헤집는 손과 같아. 놀라움 그 자체라고." 밀턴의 손은 유려하게 몸을 더듬는 손이며, 성폭행 장면을 떠올리며 수음하는 선생의 손이고, 진실을 말하는 입을 가리는 손이다. 정의를 위해 만들어진 법은 윤리의 강제이지만, 그 법이 오히려 악을 자유롭게 만든다는 주장은 지금의 우리가 자주 마주하는 끔찍한 진실이다.


악을 통제하는 선한 신의 논리가 세상에 현현한다면 어두운 손을 치우고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다. 그러나 관음하는 신의 윤리("신은 지켜보는 걸 좋아해. 장난꾸러기지.")보다 불편하지만 이익이 되는 물신(자본)의 논리가 실리적이며, 나의 위신을 보호할 자기애가 오히려 절실하다. 우리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외는 동시에 실리를 쫓아 자기를 보호하는 선택을 일삼는다. 요컨대 우리가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한다는 것. 악은 우리의 나약한 부분을 파고들며, 밀턴의 입을 빌려 이렇게 조롱한다. '나는 너에게 나를 물리칠 기회를 줬어. 그 기회를 걷어찬 건 너 자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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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부, 로맥스의 마지막 결정은 인간의 의지와 사랑으로 악의 유혹을 충분히 물리칠 수 있다는 흔한 교조적 메시지로 보인다. 그러나 러닝 타임은 끝나지 않는다. 밀턴은 모습을 바꿔서, 말하자면 부활과 같은 방식으로 다시 등장한다. 신약이 메시아 예수의 부활을 말하므로, 동위의 초월적 존재인 악마의 부활도 가능하다는 것. 마치 꿈에서 깨듯 과거의 법정으로 돌아가 진실을 선택한 로맥스에게 다시 한 번 드리우는, 이번엔 명예라는 형태로 은밀하게 속삭이는 유혹은 모든 형태의 욕망을 냉정히 물리칠 수 없는 인간의 슬픈 한계를 선언한다. 목숨을 걸고 물리친 욕망조차 쉽사리 다시 돌아올 수 있다. 지극히 불합리한 인간의 욕망은 이성으로 불가해한 초자연적 현상이다. 우리는 욕망의 현상을 다룬 이런 영화 장르를 오컬트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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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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