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내 삶이 사형 집행 중인 세계라면? - 7인의 집행관

글 입력 2023.08.2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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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 띠지 평면.jpg



내가 나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잃은 세계. ‘나’는 여섯 명의 사람에게 여섯 번의 사형을 집행당한다. 미친 자, 소심한 자, 영리한 자, 고지식한 자, 미인, 노인. 이 여섯이 사형의 집행관이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은 ‘7인의 집행관’이다. 죽음의 ‘시스템’이 정한 여섯 번의 사형이 집행된 후에도 사형이 집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7번째 사형의 집행관은 누구일까?


 

 

사형 집행 시스템


 

죽음의 시스템은 집행관의 재량에 따라 설정된다. 사형수인 ‘나’의 기억을 다 지울 수도, 일부만 남겨놓을 수도 있다. 사형 집행의 배경도, 제약의 정도도 모두 집행관의 선택에 따른다. 여섯의 집행관은 돌아가며 한 번씩 사형의 집행관이 되고, 나머지 다섯은 그 사형 집행의 참관인이 된다. 참관인은 그 사형 집행의 배경에 직접 등장할 수도 있고, 그저 시스템 외부에서 지켜볼 수도 있다.


첫 집행에서, ‘나’는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게 직업인 사람이다. 아버지인 보스는 매우 위험한 임무를 맡기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이 임무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 임무를 하러 간 곳에서 첫 사형 집행의 집행관인 ‘미친 자’를 만난다. 기억이 없는 ‘나’는 그자가 자신에게 어떤 앙심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미친 자’의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왕국’, ‘전쟁’ 같은 말을 내뱉으며 사죄한다.


 

“…모두가 너와 네 왕국(왕국이라고 해 버렸군)을 지키기 위해 한 일이었다. 내가 세상을 농락했다. (중략) 너에게 사죄한다. 내가 너를 미치게 했다. 스스로를 자격 없는 자라고 믿게 했다. 네 동생에게도 사죄한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희생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p48

 

 

극악무도한 행실에 ‘괴물’이라고 불리던 ‘나’로부터 진실한 사죄를 듣자, ‘미친 자’는 오히려 더 괴로워한다. 세 치 혀로 끝까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동시에 진심의 사과를 원했던 ‘미친 자’가 가장 원했던 것이기도 했다.

 

 

“내가 이 말을 하지 않은 이유는 누구도 이 사실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 아버지가 잘못된 전쟁을 했음을 인정하는 일이며, 그 싸움에서 죽은 내 부하들의 넋을 모욕하는 일이며, 네 동생의 죽음마저 모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략) 그러므로 내가 사죄할 때는 네가 죽을 때뿐이었다. 아무도 이 말을 듣지 못하고 네가 아무에게도 이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뿐이었다.”

 

p48

 

 

‘나’는 ‘미친 자’가 바라던 대로 사죄한 뒤, 말한 것처럼 망설임 없이 ‘미친 자’에게 칼을 찔러 죽인다. 이렇게나 절절하고도 논리적으로 이치가 맞는 사죄를 한 후, 그 이치에 맞게 단숨에 목숨을 앗아가다니. 동생의 죽음에 괴로워하던 ‘미친 자’에게도, 사형의 참관인이자 집행관들도 충격에 빠진다.


첫 사형 집행부터, 집행관들은 혼란스러워한다. 우선 그 시스템의 주인인 사형의 집행관이 시스템 내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죄수에게. 충격적이다. 또한, 시스템은 ‘나’의 기억을 앗아갔지만, 결국 ‘나’는 기억을 되찾았고, 결국 ‘나’만이 알고 있던 사죄를 말했다. 시스템의 허점 속에서 기억을 되찾은 ‘내’가 하는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 것인가? 여섯 번이나 끔찍한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고 판결 내린 이 괴물이라는 작자의 말에 왜 우리는 동요하는가?

 

 


시스템의 허점


 

그러나 이 동요는 사형 집행을 거듭할수록 더욱 심해진다. 첫째로는 ‘나’에 대한 신뢰의 문제. 제2 집행에서 ‘나’는 집행관 중 하나인 ‘미인’을 지키다가 죽음을 맞고, 제3 집행에서 ‘내’가 그 미인을 사랑했음이 밝혀진다. 제4 집행에서는 집행관과의 대결에서 실력으로 훨씬 우위에 있음에도 집행관을 죽이지 않고 거짓말쟁이를 자처하려는 ‘나’의 모습을 통해, 죽기 전 왕의 호위무사였던 제4 집행의 집행관에게 충성을 받아낸다. ‘나’라는 사람을 알면 알수록 집행관들도 이해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둘째로는 이 ‘조정자’에 대한 문제이다. 자신을 ‘조정자’라고 말하며 사형 집행 중 누군가가 나타나 집행을 방해한다. 집행관이 죄수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심지어 조정 시스템의 개입 때문에 네 번의 사형 집행 중 제대로 이루어진 집행이 없는 것이다. 특히 사형수에게 내기를 기억하라는 ‘조정자’의 말에 집행관들은 혼란을 느낀다. 이 사형 집행에 중 죄수가 누구와 어떤 내기를 했을지, 그들 내에서도 의심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집행 시스템은 선조의 유물이며 우리도 모르는 면이 많다. 집행관이 다들 선하여 악인에게 합당한 운명을 잘 구상하지 못하다 보니, 시스템이 죄수의 기억에 근거하여 그에게 고통을 줄 각본을 구상해 내는 모양이다.”

 

p181

 

 

노인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집행관들은 다섯 번째 사형 집행으로 넘어간다. 제5 집행의 집행관은 ‘미인’. 그리고 그 집행에서 이 이야기의 판도가 달라진다. ‘내’가 미인의 남편이자 ‘나’의 형이었던 왕을 죽인 그날을 되돌렸는데, 그날 ‘나’의 기억은 모두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왕뿐만 아니라 궁에 있던 여러 궁인을 무참히 학살했다. 그러나 시스템 속에서 다시 그날을 재현해 보니, 궁인을 모두 죽인 건 왕이었고, 왕은 이를 ‘귀신’의 짓이라 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죽기 전 ‘나’에게 끝까지 살아 ‘귀신’을 이겨달라고 말한다.


 

“우리 둘 중 하나가 남아야 한다면 나보다 네가 남는 것이 낫다. 나보다 네가 그자를 이길 가능성이 큰 줄을 우리 둘 다 안다.”

 

p270

 

 

그날 자신 대신 살아 ‘귀신’을 이기라는 왕의 말을 모두 보게 된 집행관들. ‘나’는 왜 왕을 죽이지 않았으면서도 그 죄로 인해 이러한 사형 집행을 받고 있을까? ‘나’는 사형을 당해야 하는 걸까? 사형 집행은 계속되어야 할까? ‘귀신’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쩌면 이 모든 기억마저 악랄한 ‘나’의 거짓이자 눈속임일까? 앞으로의 사형 집행은 어떻게 되는 걸까?


 

 

기억과 나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내’가 여섯 개의 다른 세계에서 계속해서 사형 집행을 받는데, ‘나’라는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형 집행 때마다 ‘나’는 기억을 잃기에, 여섯 명의 집행관을 처음 보게 되는 집행마다 그들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그런데 그 서술 속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전반적인 느낌은 늘 비슷하다. 그렇게 이전 생과 비슷한 방식과 느낌으로 그들을 대하다 보면, 결국 이전 생의 그들이 떠오르고, 이전 생의 ‘나’도 떠오르는 것이다.


 

내가 나라면.


기억을 잃고도 지식과 지력을 잃고도, 사고력과 판단력과 신체 능력과 경험을 포함해서 나를 규정하는 모든 것을 잃고도,

누구의 기억으로 어떤 인격을 갖든,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인생을 살든 내 근원에서 나온 나 자신이라면,

내게서 무엇을 없애든 ‘나’를 없애지 못한다면,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채로도 나를 유지한다면.


모든 것을 잃고도 내가 나일 수만 있다면.

어느 세계에서 어떤 기억으로 살든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p499

 

 

나의 기억과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앗아가도 ‘나’를 앗아가지 못한다면. 즉, 나의 모든 과거의 전사를 다 빼앗겨도 내가 나를 빼앗기지만 않는다면. ‘나’는 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진짜 ‘내’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시스템이 온갖 차원을 동원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았음에도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았던 소설 속 ‘나’처럼. 어쩌면 내가 나로 온전히 살기 위해서는 소설 속 ‘나’처럼 어떻게든 살기 위한 끈질긴 생명력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도 없으면 내 한목숨 부여받은 값을 안 하는 것은 아닐까.


특히 제3 집행 때는 아예 겉모습도 바꾸는데, ‘나’의 내면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매 집행 속 ‘나’는 놀라우리만큼 질기고 강한 생명력과 기술을 가진다. 팔 한쪽이 문드러질 만큼 폭력을 당하고, 살점을 떼어먹는 고통을 당해도, ‘나’의 정신상태와 생각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결국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러나 내면에 단단하게 각인된 ‘내기’를 위해서였음을, 그리고 그 내기는 결국 온 세계를 위해서였음을, 그리고 그것은 단 한 명의 부탁을 들어 주기 위했음을 알게 되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이다.


 

“살아라. 네가 살아야 한다. 내 가슴에 칼을 꽂는 한이 있더라도 네가 살아라. 세상을 모두 부순다 해도 네가 살아라. 그 일이 네 남은 삶을 지옥으로 바꾸더라도 그리해야 한다. 그것이 네가 감당할 형벌이며 네가 수행할 임무다. 내 목숨을 네가 받았으니 나를 지키듯이 너를 지켜라.”

 

p271

 


남은 생이 모두 형벌이 되는 삶이 궁극적으로 온전한 이타적인 삶을 지향한다는 설정. 글로 풀어내기만 해도 이렇게 어려운데, 이 어려운 설정을 다양한 차원의 세계관에서 완성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특히나 이것이 여섯 번 죽어도 일곱 번 살아나는 ‘삶’에 대한 이야기라면, 더욱이 이런 문구는 직접적으로 삶의 의지에 대한 울림을 준다. 단 한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곱 생의 목숨까지 거는 삶. 그리고 그것이 결국 세상을 구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삶


어쩌면 우리 모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것으로 결국 나의 세계를 구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아닌지. 나를 규정하는 건 기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억을 만들어 준 한 사람 덕분이 아닐까? ‘나’는 여섯 번이나, 그리고 마지막 집행관의 사형까지 하면 여섯 번을 넘는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도 다시 자신을 되찾고 기억을 되찾았다. 매 집행, 매 세계에서 늘 같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약속을 지켜야 하는 대상들을 만났고, 그리고 마지막에 ‘나’를 만난다.


결국 나를 구성하는 건 기억이 아니라 마음이 아닌지. 내가 받았던 마음, 내가 줬던 마음,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던 마음, 그것을 소중한 감정들을 모두 응축했던 마음.


 

기억은 결코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

 

p500

 

 


살아내


  

 

“모든 세계에서 당신은 당신이었어. 어떤 기억과 인생을 부여받든 당신은 한 번도 다른 사람이었던 적이 없어. 어떤 모습으로든 당신이었어. 무엇을 빼앗기든 당신이었어. (중략) 살아. 계속 살아서 그 자식이 영원히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만들어.”

 

p492-493, 미인(비영)이 ‘나’에게

 

 

마지막 집행관은 귀신이다. 귀신이자 ‘나’다. 그렇다고 ‘내’가 귀신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 속 귀신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래 고민했다. 진실한 신의 진신(眞神)인가, 아니면 혼돈의 신인 암흑신인가? 이 소설에서 꼭 마지막 ‘귀신’의 존재가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사람들이 사형 집행 내내 ‘사기꾼의 세 치 혀’라고 여겼던 ‘나’의 말은 모두 진실이었고, 사람들이 진실이라 믿었던 사형 시스템 내에는 거짓이 섞여 있었다. ‘나’를 죽이기 위해 존재했던 집행관은 이제 ‘나’를 살리기 위해 새로운 집행을 열고, 목숨을 바쳤다. 한 번의 거짓과 어리석음의 대가는 이리도 큰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 어긋남을 고치는 사람들이다.


‘나’의 마지막 집행은 ‘내’가 가장 지키고자 했던 사람에게 직접 받는다. 자기 행동이 대의를 위했다고 하더라도 손에 묻힌 피가 없지 않기에 겸허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지막 집행은 놀랍게도, ‘현실’이다. 우리가 사는 이 현실도 어쩌면 내 삶에 대한 속죄의 집행일 수도 있다. 이 현실이 내 삶의 사형식일 수도 있다. 너무 암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삶이 내가 진짜 나로 사는 ‘진짜 마지막’ 삶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 속 ‘나’처럼 악착같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삶은 원래 다 하나뿐인데도.


 

결국 이것이 네 판결이다.

네가 준 각본이고 네가 정한 내 죽음의 방식이다.

차이는 없다.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버티며, 살기 위해 내가 가진 생명을 다 써야 한다는 것만은.

그 어느 세계에서든 생은 하나뿐이었고 죽음도 하나뿐이었으니.

 

p554

 

 

이 소설이 판타지가 아니라 SF인 이유는 간단하다. ‘귀신’의 사형 집행 부분이다. 귀신이 등장했을 때부터, 나는 이 이야기 전체가 가상현실 속의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맞는지 아닌지 정확히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과거 왕조가 있었던 시대에서 시작하지만, 현재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영혼을 전자 인격 형태로 시스템에 저장할 수 있는 미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인간이 아닌 신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난해하지만 흥미롭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이 이야기를 사랑 이야기로 보는 것이 가장 좋다. 자신이 한 약속은 모두 지키려고 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 ‘나’는 엄마와의 약속도, 선우와의 약속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이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우의 명령을 끝까지 실행하기 위해 형벌의 삶을 끈질기게 살아냈고, 끝까지 선우에게 자신을 바친다. 그리고 그 판결이 현실이라면, 삶이라면, 이 또한 미친 듯이, 끈질기고 악착같게,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해내는 것이다.


이 시스템은 왜 있는 것인지, 시스템의 근원은 무엇인지. 이 시스템이 작동되는 현실은 단편적으로 어떤 곳인지, 이들의 배경은 왜 왕과 신하가 있는 시대였어야 했는지. 신(神)과 용은 왜 등장했어야 하는지, 그 시대에서 말한 사람들이 잊었다는 ‘진짜 세계’는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나’를 구성하는 것을 기억이 아닌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아니라 사실 영혼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그렇다면 영혼은 어떤 의미인지. 많은 궁금증이 남는다. 2013년의 소설이 10년 만에 다시 개정되어, 수정을 거쳐 2023년, 지금 나오게 된 이유가 있을 텐데. 난해한 문학일수록 현실의 메타포나 상징에 빗대어 생각하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았던 것은 이 소설이 반복적으로 힘 있게 전하는 메시지다. ‘살아라’는 것. 너의 생(生)을 지키기 위해 온 전력을 다하라는 것. 어떻게든 목숨을 지켜 내라는 것. 내가 나로 살기 위한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강렬한 메시지. 최근 드라마<악귀>의 메시지와도 비슷하다. 초인적인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결국, 가장 인간적이고 근본적인, 내가 나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다. 이 삶이 내 영혼의 마지막 삶이라면, 심지어 사형식이라면. 좀 더 악착같이 붙들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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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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