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가장 믿고 싶은 거짓말에게

글 입력 2023.08.2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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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믿고 싶은 거짓말에게


내일에야 비로소 당신과 제가 한 공간에 있게 되네요. 물론 내일에도 우리가 마주 보는 일은 없겠죠. 저 혼자 멀리서 반짝반짝 빛나는 당신을 지켜보며 목이 터지라 응원할 뿐이에요. 나는 당신의 이름과 나이는 물론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힘들 땐 어떻게 대처하는지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 다 알지만, 당신은 제 존재조차 이 세상에 있는지 모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야 사랑받는 것이 당신의 일이니까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 인생에 이런 사랑이 존재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항상 가요에 관심이 많아 모르는 아이돌그룹이 없었지만 그저 그들의 화려한 외모와 무대를 좋아했을 뿐,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여긴 적은 없었습니다. 저에게 아이돌은 오락이나 취미의 영역이었죠. 


그러다 당신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엔 다른 아이돌과 다를 바 없이 수려한 외모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러다 순한 성격에 마음이 갔고, 그 외 당신이 지난 사소한 특징들이 모두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뭐에 홀린 것처럼 하루 종일 당신의 영상만 찾아봤을 때, 어떻게든 당신의 정보를 많이 모으고자 낯선 커뮤니티에 가입했을 때 비로소 내가 당신의 팬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살면서 흘려보냈던 숱한 아이돌처럼 당신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줄 알았습니다.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지금 전 이 글을 쓰고 있네요.


나를 모르는, 다른 세상에 사는 이에게 사랑에 빠지는 감각은 참 기묘했습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한때 열정적으로 응원했던 스타가 비도덕적인 행동으로 실망감을 안겨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당신의 팬이 되었을 때는 좋아했던 이에게 실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이라 더욱 날카롭게 경계했었죠.

 

연예인이 구설에 휘말릴 때마다 그 연예인을 사랑했던 팬들이 실망과 슬픔과 허무와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 자신을 모르는 이에게 마음을 다하는 그들의 순정이 늘 신기했습니다. 같은 입장이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음은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연예인은 언제 어떻게 구설을 일으킬지 모르니 미리 마음을 주지 말자니, 이런 식의 철저한 계산은 사랑에 빠진 이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가 아는 당신은 당신이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아이돌이 그렇지만 당신은 특히 힘들고 어두운 이야기를 하지 않잖아요. 아주 가끔 힘든 경험을 토로해도 그 시기가 다 지나고 극복했을 때 무용담처럼 털어놓지, 타인에게 슬픔을 이해받으려 하지 않죠. 그렇게 당신이 주는 정보는 늘 제한적이서 제가 '아는' 당신보다 제가 '상상하는' 당신이 더 많습니다. 

 

어느 날 길을 걸으며 내 힘으로 알 수 없는 당신을 상상하던 그때, 내가 모르는 당신이 실제로는 몹시 실망스러운 사람이면 어쩌지 싶다가도 일단은 내 방식대로 믿고 싶다고 다짐하던 그때, 저는 이 마음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확실함 속에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함 속에서 믿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에 다다르니 당신이 훗날 저를 실망시킨다 해도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지 미리 겁먹고 경계할 필요는 없겠다는 해방감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렇게 당신을 향한 마음을 굳히고 2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2년 동안 저의 사랑은 더욱 견고해졌고, 당신도 한결같이 순수한 모습으로 묵묵히 자기 일을 해나갔습니다. 당신이 지닌 수많은 장점 중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부분은 바로 '성실함'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당신은 거창한 야망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대신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채우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언뜻 봐서는 유약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혼란스러운 아이돌 산업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단호함이 엿보이죠. 

 

당신의 그러한 면모는 시도 때도 없이 불안에 시달리는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막막한 미래에 숨이 막히고, 안정적인 길을 닦지 못한 나를 자책할 때면 어김없이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왠지 당신은 당신이 여태 그래왔듯이 내게도 덤덤하게 잘하고 있다고, 하루하루 할 일을 해나가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해줄 것 같았거든요. 물론 저 좋을 대로 상상한 것에 불과하지만요. 


당신은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죠. 이 세상 모든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사랑이 숨겨져 있다고, 그래서 사랑을 발견하는 눈이 필요하다고, 이런 사랑을 느끼는 순간 행복해질 거라고. 처음 그 말을 봤을 땐 그저 멋진 말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요즘 들어서야 당신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사랑이란 건 달콤한 환상일 뿐이라고, 다들 원하는 걸 받고 싶어서 먼저 줄 뿐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당신 덕분에 사랑을 발견하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사랑이 전혀 다르게 인식되었습니다. 사랑은 제로섬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주는 것만으로도 받는 만큼 충만한 사랑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제 존재조차 모르는 당신을 사랑하면서 깨달았습니다.


장황한 사랑 고백을 쓰긴 했지만, 사실 당신과 저를 이어준 아이돌 산업이 마냥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산업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돌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을 '받는' 것이니까요. 사람은 불안정합니다.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사랑해도 상대방은 내가 싫을 수 있고, 그래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죠. 하지만 아이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저를 싫어할까 봐, 제 애정을 부담스러워할까 봐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절 모르니까요. 안다고 해도 저는 '팬'이라는 안전한 신분으로 최대한 예쁘고 부드러운 반응만 돌려받을 수 있겠죠. 


팬이란 존재는 아티스트에게 몹시 중요한 건 맞지만, 무력할 때가 더 많습니다. 당신이 힘들고 지칠 때 바로 알아줄 수도 없고, 진심 어린 말 한마디 전하기도 어렵죠. 확실히 이 부분은 우리 관계의 한계라고 할 수 있죠. 그런데 저는 이 한계가 우리 사이를 특별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당신 말고도 친구와 가족 등 수많은 이를 사랑하지만, 그들과 저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는 각자의 감정을 그 자체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합니다. 갈수록 복잡해져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제가 책임감, 죄책감, 열등감, 원망 등과 같은 감정 없이 순수하게 사랑하기만 할 수 있는 관계는 아이돌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만나본 적도 없는 스타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비난하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당신에 대한 사랑을 확신합니다. 제가 당신에게 사랑 말고 무슨 감정을 느끼겠어요. 


어쩌면 저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만큼 용기가 없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라는 안전한 대상을 두고 사랑을 연습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방어적인 제가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당신이 큰 도움이 되었어요. 내가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는 것처럼 남들도 날 이렇게 사랑하겠구나,  나도 내 주변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돌려줄 수 있겠구나,를 배웠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도움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하죠.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저를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요. 당신의 말에서 저는 후자에 속하겠죠. 당신 입장에선 누군진 모르겠지만 나를 좋아해 주는 익명의 팬을 콕 집어 지칭하는 그 명확한 구분에 왠지 그 말에 믿음이 갔습니다. 당신 말대로 당신을 사랑하는 저는 행복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저는 당신을 아무리 좋아해도 저 자신보다 더 좋아하진 않을 것입니다. 당신도 제가 그러기를 더 바랄 것 같거든요. 당신은 수시로 나를 괴롭히는 자기혐오에서 저를 지켜주는 방파제 같은 존재입니다.


아마도 이 편지는 평생 답장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높은 확률로 당신은 영원히 저를 모르겠죠. 그래도 이 구구절절한 고백의 끝에서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내게 준 행복만큼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가르쳐준 사랑만큼 당신도 당신 자신을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한 수많은 팬이 당신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가 아는 당신이 당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스위스의 심리학자이자 의사인 카를 융은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 뒤에 남겨진 그림자를 보듬으라고 조언했습니다. 물론 전 당신이 알아서 잘해 낼 거라 믿지만, 그래도 혹시나 제가 모르는 당신이 아이돌이 아닌 당신을 방치한다면, 융의 조언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아이돌이 아닌 당신으로서도 행복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아이돌을 뜬구름 같은 존재라고 말합니다. 지독한 현실에 발붙이며 살던 저는 그 뜬구름을 타고 행복했습니다. 때로는 에어백처럼 냉혹한 현실에서 저를 보호해 주기도 했죠. 당신에게도 불특정 다수의 애정이 뜬구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당신도 저처럼 이 뜬구름 같은 애정에 의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의지되는 팬이 되기 위해서 당신의 바람대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행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당신도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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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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