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정한 물음 [영화]

글 입력 2023.07.28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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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2023) 및

소설 '바깥은 여름'(김애란) 중 동명 수록작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겨진 이들의 내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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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매개를 넘치도록 갖게 된 우리는 매일같이 죽음을 접한다. 뉴스로, 책으로, 누군가의 입으로, 혹은 또 다른 무언가로. 어떤 죽음은 사회 공통의 경험이 되어 모두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기도 한다.

 

그러나 그 죽음은 멀리 있는 누군가에겐 하나의 '사건'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간단한 문장 몇 줄로 설명되고 요약될 수 있는, 어느 한 지점에 점처럼 찍혀있는 사건. 어쩌면 당연하다. 각자의 거리에 합당한 만큼의 무게를, 감당함직한 슬픔을 이고 살아가는 것은 외면과는 또 다른 결의 이야기이니.

 

하지만 누군가에게 그 '사건'은 삶 전체에 스며 영원한 '현재'가 된다. 나의 삶을 이뤄오던 존재를 상실하는 극한의 경험을 온 몸으로 '겪은' 이들의 경우가 그렇다. 겨우 매개를 통해서 상실을 '접했을' 뿐인 사람들이 갖는 종결적인 태도를 쉽사리 꿈꿀 수 없는 사람들. 누구보다 선명하게 남겨진 사람들.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그렇게 남겨진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 앞에 어김없이 떠오르는 내일의 해를, 계속될 현재를, 이어지는 삶과 그 속의 슬픔을, 떠올린 기억이 불러오는 그리움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해수, 그리고 에든버러에서 바르샤바로


 

영화는 김애란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 '도경'을 잃은 '명지'가 집을 떠나 이국에서 생활하며 겪는 일을 다룬다는 큰 전개는 동일하지만, 몇 가지 확연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과연 영화는 상상력을 통해 소설의 행간을 어떻게 메꾸고 있을까. 그리고 그런 여백의 채움으로 영화가 특히 뚜렷하게 전달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이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다름 아닌 '해수'라는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다. 해수는 한 사고로 가장 절친한 친구 '지용'을 잃었다. 그리고 그 사고는 명지의 남편이 당한 사고이기도 했다. 교사였던 도경이, 위험에 처한 지용을 구하려다 함께 휩쓸려 목숨을 잃은 것이다. 해수는 친구가 남긴 스케이트 보드를 항상 가지고 다니며, 지용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누나 '지은'을 돕는다.

 

 

[크기변환] 해수[포맷변환].jpg

 

 

이 오리지널 캐릭터의 가능성은 원작의 말미, 지은이 명지에게 보낸 편지 속 문장 하나에서 출발한다. "직접 찾아봬야 했는데, 방법이 없어 지용이 친구한테 연락처를 물었습니다."라는 간단한 경위에서, 영화는 지용과 지은, 도경과 명지 모두를 이어줄 존재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해수라는 인물이 영화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상술했듯 사고에 얽힌 인물들을 매개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명지라는 인물 한 명의 시선을 따라 흘러가지만, 영화는 원작에서 스쳐지나가는 존재를 하나의 구체적인 인물로 그려내며 이야기의 중심축을 하나 더 세운다. 이를 통해 소설에서는 명지의 시선이 미처 닿지 못했던, 편지를 통해서 겨우 짐작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남겨진 이'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두 번째는 해수라는 인물의 특성이 남겨진 사람들의 정적인(어쩌면 무기력한) 슬픔과 대비되며 우리를 계속 살게 하는 마음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나는 시간을 아끼거나 낭비하지 않았다. 도랑 위에 쌀뜨물 버리듯 그냥 흘려보냈다. 시간이 나를 가라앉히거나 쓸어 보내지 못할 유속으로, 딱 그만큼의 힘으로 지나가게 놔뒀다.

 

소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

 

 

극 초반의 명지가 등장하는 장면은 모두 어두침침하다. 매일 떠오르는 해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커튼을 꽉 닫은 채 명지는 침대에 누워 어둠 속에서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할 뿐이다. 야속하게도, 도경이 사라졌지만 세상은 굴러가고 자신의 삶마저 어김없이 이어진다. 명지에게는 이 사실이 못내 버거웠을 것이다. 눈 앞에 주어진 시간을 어찌 대할 힘조차 없다. 낭비에도, 절약에도, 극적인 비탄에 빠져있는 일에도 모두 어떤 힘과 의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명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멍하니 자신의 존재를 방치해두는 일이었다.

 

지용의 누나 지은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른쪽 몸에 마비가 온 이후 병실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지용의 사고 이후 반쯤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을 뿐이다. 하나뿐인 동생과 시설 생활을 하면서도, 생활력을 잃지 않고 빵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제빵사 시험을 준비하려 했던 지은이다. 하지만 동생을 잃은 지은은 모든 생기를 잃고 재활마저 포기한 채 하루하루를 꿈 꾸듯 보낸다. 해수가 매일같이 빵을 사들고 찾아가 그의 안부를 챙기지만, 무반응으로 일관할 뿐이다.

 

반면 해수는 가까운 누군가를 잃었다는 점에서, 상실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지만 이 둘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인물이다. 해수가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은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직접 몸을 움직이며 지용의 흔적을 마주하고, 지은의 재활을 응원하고, 선뜻 찾아가기 어려운 명지와의 연락을 중개하는 것이었다. 영화가 마냥 무거워지지 않는 것도 이런 해수의 동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그런 동력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어린 소년 특유의 회복 탄력성, 안정적인 가정, 조금 다른 상실의 성질(감히 경중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과 친구 간의 통상적인 차이를 얘기하는 것이다) 등 해수라는 인물의 특성과 배경이 다른 두 인물과 차이가 나기 때문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영화가 그려내는 명지와 지은, 해수 사이의 대비는 곧 명지와 지은의 무기력한 순간들을 절대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그런 시간마저 필요함을, 어쩔 수 없는 순간들을 인정해야 함을 보여준다. 다만 해수의 존재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런 한없는 슬픔과 무기력함에서 나아가 삶을 꾸려가기 위한 결심에는 그를 뒷밤침해주는 무언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해수가 전달한 편지를 읽고, 명지가 범람하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터트리듯 처음으로 마주했던 것처럼.

 


[크기변환] 바르샤바[포맷변환].jpg

 

 

그리고 이러한 정동의 대비는 원작과 영화 사이 공간적 배경의 차이와도 맞닿아 있다. 원작에서 명지가 집을 떠나 도착한 곳은 영국 에든버러였던 반면, 영화에서는 폴란드의 바르샤바였다. 왜 굳이 이 곳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영화는 바르샤바라는 도시의 특성을 여러 차례에 걸쳐 보여준다.

 

명지는 여느 관광객처럼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바르샤바에 유학을 와 있던 옛 친구 현석의 안내를 따라 몇 개 정도의 족적을 남기는데, 명지가 방문했던 곳들은 모두 애도의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치에 대항해서 일어난 바르샤바 봉기 당시 희생된 이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비, 쇼팽의 심장이 잠든 대성당.

 

그리고 바르샤바를 떠나는 날,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서 목격한 1분간의 묵념. 명지는 도시 전체가 하나의 슬픔을 기리기 위해 멈춰있는 광경을 묵묵히 바라본다. 애도해야 하는 대상에 모두가 일상에서 잠시 눈길을 돌려 적극적으로 애도를 표하는 것이 이 바르샤바라는 공간이다.

 

명지의 출신지가 광주인 것도 이의 연장선상이다. 개인의 비극이 사회적 요소와 결부되어 있는 공간. 추모와 애도가 사회 곳곳에 녹아있는 공간. 마땅히 기려야 할 것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는, 개인의 마음에 더해져야 할 동적인 무언가가 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이 다정한 물음은 중의적이다. 이런 물음을 던져주는 어떤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영영 떠나게 된 이들은 그들이 가닿고 싶은 곳에 도착했을 것이라 감히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남겨진 이들은 또 어떠한가. 가고 싶은 어딘가가 있다는 것.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것. 삶의 존속을 가정하는 이 다정한 물음은 이렇게 얘기한다. 존재하라. 어디서든. 당신이 원하는 곳에서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지금도 이 물음을 필요로 하는 상처를 품은 이들이 각자의 내일을 마주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행보를, 이 영화의 제목을 빌려 응원한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오늘은 차마 행선지를 떠올릴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당신의 발길이 어디로든 향하기를 바라며.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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