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거짓과 진실은 하나의 동전 : 영화 '비밀의 언덕'

글 입력 2023.07.1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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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진대.

 


우리가 배워온 도덕관념은 이제 보면 참 모호하다.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양보할 줄 알아야 하고, 욕심부려선 안 되고, 거짓말도 안 된다. 그런데 단어 하나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의문인 거다.

 

왜 그래야 할까? 양보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게 그리도 나쁜가? 설령 나쁘다고 한들 무슨 상관인가. 세상엔 절대적인 게 없다. 어느 누구에겐 나쁠 수 있지만, 다른 누구에겐 좋을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건데 이건 이러해서 저건 저러해서 좋고 나쁨을,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있을까.


삶이 고달픈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절대적으로 맞는 것이 없듯 절대적으로 틀린 것도 없다. 똑같은 걸 보아도 각자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반응도 달라지거늘. 하물며 '나'라는 사람도 언제나 모두에게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없잖은가. 자기 자신을 붙들며 살아가기도 바쁜 한낱 인간인데.


새삼스러운 사실을 되짚어 보려면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제 막 옳고 그름,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배우고 일상에 적용해 가던 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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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의 어느 초등학교. 이름표에 학년과 반, 이름을 달고 다니는 아이들. 카메라가 자주 비출 주인공은 '5학년 7반 이명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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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비닐과 포장이 마구잡이로 쌓인 문방구. 선생님께 드릴 선물을 고심하며 고르는 명은. 마지막 고민은 리본이다. 금색이 좋은 거라며 고르고, 집으로 향하던 중에 다시 문방구로 뛰어 돌아간다. 선생님은 그래도 분홍색을 좋아하실 것 같은데 바꿔도 되느냐며. 명은이의 성격이 가장 도드라진 첫 씬이었다. 뚜렷한 주관, 확실한 의사표현. 이 애가 채워갈 2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은 꽤 시원할 것 같다고 예감했다.


씩씩하고 당차보이던 명은이는 집안에선 꽤 조용하다. 엄마와 아빠의 투닥거림으로도 충분히 소란스러운 저녁상이니까. 그렇다고 둘의 관계에 눈치 볼 성격은 아니다. 관심은 티브이에 쏠렸다.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달라는 광고 캠페인에. 물끄러미 화면을 보다가 홀린 듯이 말한다. 우리도 전화해서 도와주자고.


엄마와 아빠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처지에 누굴 돕겠느냐며. 명은이가 진짜로 수화기를 들려하자 조금 더 엄한 자세로 그를 저지한다. 시무룩해도 별 수 없다. 안 된다고 말한 건 안 된다. 그러나 명은이는 하고 싶으면 어떻게든 해내야 한다. 반장 선거에 나간 것도 그렇다. 매번 해오던 애가 당연하게 반장이 되는 상황이라 아무도 나설 생각을 않는다. 반장 자리는 이미 있으니 부반장이나 해볼까, 장난만 치고.


이걸 가만히 두고 볼 명은이가 아니다. 반장 선거에 나가겠다고 다짐하고, 집에도 이 사실을 알린다. 엄마의 반응은 냉랭하다. 반장이 아니라 반장 엄마가 온갖 일을 다 해야 한다고. 도시락도 싸들고, 행사 때마다 나가서 얼굴 비추고. 시장에서 젓갈 장사하는 엄마에겐 그럴 여력이 없다. 하지 말라고 강경히 말하면서도 옷 사달라고 졸라대는 명은이를 내치진 못한다. 뭐, 명은이가 갖고 싶어 하던 옷은 아니었지만. 의견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참 똑 닮은 모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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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을 입고 할 말을 제대로 전달하고, 반장이 된 명은. '차렷, 열중쉬어, 차렷, 선생님께 인사'. 일어서서 이 구호를 외는 명은이의 표정엔 뿌듯함이 철철 넘친다. 공약으로 내세운 비밀 편지함에 담긴 아이들의 요청사항을 하나씩 해나가며 어엿한 솔선수범하게 반장 노릇을 해가던 명은.


방과 후마다 남아서 비밀 편지함 속 종이들을 읽고, 방법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힘들지 않느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명은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다. 너무 재밌고 좋다고. 이어지는 칭찬의 말은 명은이를 더 기분 좋게 한다. 집안에서는 받지 못한 칭찬과 신뢰. 이 모든 걸 반장 역할을 통해, 선생님을 통해, 아이들을 통해 얻고 있으니 힘들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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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완벽한 모습 뒤엔 비밀이, 즉 거짓말이 쌓여있다. 명은이는 반장이 되고서 실감했다. 반장 엄마들이 해야 하는 일들을.

 

하지만 바쁜 엄마를 학교에 부를 수 없어서-어쩌면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럴싸한 핑계를 만들어냈다. 할머니가 많이 아프셔서 병간호를 하신다고. 비밀 편지함에도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안에 채워진 종이들은 친구들의 열띤 참여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오로지 명은이 혼자 한 일이다. 교실이 더 교실다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은 도서관을 만들고, 반 친구들의 생일을 챙겨주었겠지.


꽤 번듯하게 꾸려가던 명은이의 세상은 이내 균열이 난다. 전학생 혜진의 등장으로.


혜진은 명은과 참 다르다. 애써 잘 지내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책상을 붙여 자신의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나눠 먹는 아이들과 달리 화단에 앉아 컵라면을 먹고. 무엇보다 결점으로 치부될 수 있는 자신의 배경을 전혀 숨기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히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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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짓기도, 학교 생활도, 적당한 거짓으로 성실하게 덮어온 명은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혜진이 지닌 사실들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한 겹도 감추려 들지 않는 모습이. 타인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는 당당함이. 모범적인 이야기로 채운 명은의 원고지는 우수상에 그치고, 솔직하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은 혜진 자매의 글은 최우수상을 탄다.


그럼, 영화는 거짓말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명은의 모범적이고 듣기 좋은 말은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듯 그럴싸한 교훈을 주려는 게 아니다. 거짓은 더 커다란 거짓을 불러오긴 한다. 명백한 사실이다. 지어낸 것엔 반드시 허점이 있기 마련이므로 증명이나 증언 따위가 필요하다.


하지만 진실과 거짓 둘 중 무엇이 더 나은지는 모른다. 어느 누구도 아주 진실하지도, 아주 거짓되지도 않다. 어찌 보면 혜진도 그렇다. 명은의 거짓말을 눈 감아주고 오히려 친하게 지내던 혜진은 대상에 명은의 글이 지목되자 은근히 명은을 멀리한다.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선에서만 친구로 지낼 수 있었던 거다. 그런 점에선 솔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밖에도 '절대 선'처럼 보였던, 이상적인 인물들 사이의 문제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악에 가까웠던 자신의 엄마가 선으로 뒤바뀌는 순간을 명은이 목도한 거다. 우리는 친숙하고 익숙한 대상일수록 은연중에 잘 안다고 생각한다. 명은이가 자신의 가족 개개인이 이렇고, 저렇고, 그렇다고 정의 내렸듯이. 그러나 모순은 인간 모두가 지닌 것이고, 무엇 하나 특출 나게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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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거짓을 말한다. 거짓은 그저 거짓일 뿐이다. 분하게 여길 필요도,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새 범주를 일부러 만들 필요도 없다. 다만 개인이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만큼 거짓을 말할 뿐이지. 오로지 사실만 말한다고 해서 그게 옳은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는다. 명은이 가족에 대해 쓴 솔직한 글을 가족들이 보았다면, 명은이의 예상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가족에게 상처가 되었을 거다.


그러니 이 사실은 선생님과 명은, 둘 사이의 비밀로 남겨두어야 한다. 혹은 할머니까지 세 사람. 극과 극은 결국 하나다. 거짓의 반대극이 진실이라면, 거짓과 진실은 어떤 식으로든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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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적은 종이는 뒤집어 비밀이 되고, 텅 빈 종이에 새로운 진실을 써내려 가고. 누군가가 건넨 '거짓말'을 '비밀'이라고 생각한다면, 거짓은 그렇게까지 나쁜 게 아니었음을 문득 깨닫는다.

 

 

[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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