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수많은 대립항 속 흐릿하게 비친 단 하나의 온전한 원초적 인간성을 향한 비행 - 도서 '마이그레이션'

글 입력 2023.06.28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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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마이그레이션>을 읽는 과정은 주인공 프래니와 함께 카론의 강을 건너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종말로 치닫는 저 너머로 가면서, 발은 배를 디디고 있지만 강물을 따라 그녀의 과거가 뒤죽박죽 섞인다. 프래니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대신, 과거를 통해 그녀가 누구인지를 알게 한다. 독자는 그래서 그녀가 열정적인 학자처럼 보였다가, 범죄자처럼 보였다가, 자살 희망자로 보였다가, 마침내 그 누구보다 야성적인 여자로 변해가면서, 그 끝에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하나의 인간으로 통합된다.

 

이 긴 여정에서 배가 마지막으로 종착한 곳은, 프래니와 독자가 예상했던 것처럼 희망 없고 우울한 죽음의 땅이 아니다. 맞춰진 기억과 조각들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머물지 않고 현재로 모인다. 야생과 문명, 악과 선, 사랑과 증오가 기억 속에서 한 단면만을 보여주면서 떠오르다가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에서 단 하나의 실체가 된다. 그런 방식으로 무의미 해보이고 가벼운 정보들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실존의 무게를 가진다.

 

프래니와의 여행은 그녀의 여행으로 완결되지 않고, 그 책을 읽는 현실에도 영향을 미친다. 세상의 모든 물체에 정서적 흔적을 지워가면서, 인간성을 냉소로 채우는 이 세상에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를 찾게 한다. 왜 그녀는 이 덧없고 희망없는 여행을 시작했는가? 왜 그녀는 죽음을 하나의 도구나 수단처럼 사용해가면서 삶의 희망을 찾으려고 했는가? 그리고 나는 왜, 무리해가면서 고집스럽게 이 책을 읽으면서 결정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논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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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그레이션>을 경험하는 방법은 독자의 경험, 사상, 태도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이야기는 크게 4가지 요소로 구분하여 이해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이 책은 멸종위기 생물로 분류된 북극제비갈매기의 여정을 따라가는 서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다. 북극제비갈매기는 가장 멀리 이동하는 철새로 연간 7만 900km를 이동한다. 이 이동하는 동안 갈매기는 일광, 온도, 먹이로 삼을 작은 물고기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인다. 작품의 배경에서 바다는 어류 대부분이 멸종해서 이들 역시 소수만 남은 상태다. 작품에서 조류학자들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들의 여정에 개입하려고 하는데, 주인공의 남편 나일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보지만 인간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에게 접근 불가능한 야생적 생물이자 멸종위기 종인 '북극제비갈매기'와 같은 존재들이 다수 등장한다. 작품에서 땅에 있는 가축, 애완동물로 키워지는 생물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인간에게 유익을 주고, 망가져 가는 자연에 대해 시선을 돌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색늑대는 굶어 죽어가다 인간들에 의해 '보호'되고, 어린 시절의 프래니와 선물을 주고받던 까마귀는 멸종된 상태다. 쥐와 바퀴벌레는 살아남았고, 그것이 사실상 기적에 가까움에도 인간은 없애려고 한다.

 

가장 피상적인 부분에서, 이 작품은 야생과 문명을 대립시킨다. 환경보호 시위대와 이미 멸종해버린 종의 이름을 딴 어선의 선원들이 부딪히고, 프래니의 핏줄부터 흐르는 야생성은 나일가의 사람들과 부딪힌다. 하지만 작품 내내 이들은 서로의 자리를 바꿔간다. 어선의 선원들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바닷거북을 구하고, 시위대의 남성은 프래니를 강간하려고 한다. 나일은 박제와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을 동시에 사랑하며, 프래니는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의 배를 타고 새를 쫓는다. 이 작품에서 새를 무식한 과정을 감내하면서 '보호'하려 하는 사람은 금발의 세련된 학자들이 아니라 무학력의 프래니다. 결국 북극제비갈매기의 떼들을 함께 바라본 것도 프래니와 어선의 선장이었다.

 

두 번째, 이 책은 '프래니'가 주인공인 이야기다. 프래니라는 주인공은 상당히 독특하다. 사실 지극히 문명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녀는 정말 구제 불능한 피를 타고난 사람이다. 그녀의 할머니는 너무나 자유로운 성정으로 자주 자신의 집을 떠나고, 자신의 남편이 아닌 아이를 임신한다. 그의 후대가 되는 프래니와 아빠는 살인을 저질렀고, 어머니도 자살했다. 프래니는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이곳저곳을 방랑한다.


하지만 프래니는 나일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의 피에 흐르는 야생성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녀의 불안은 몽유병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드러난다. 그녀가 잠에 들 때면, 그녀 안에 있는 야생성이 눈을 떠 나일의 목을 조르고, 새들을 풀어주고, 야생의 뜰로 뛰쳐나간다. 작품의 중반쯤에는 자신을 강간하려는 남자의 목을 칼로 쑤시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또 다른 면모는 어떤 생물을 구할 때도 주저 없이 발휘된다. 그녀는 물에 빠지거나, 차에 깔린 사람을 달려가 구하려고 한다. 세 번째 부분에서 좀 더 설명하겠지만, 나일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깊게 매료되지만 동시에 그녀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

 

나일과의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 수록, 나일과의 사랑의 결실인 자식을 낳고 싶어질 수록 프래니는 자신의 야성적인 자아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나일과 아이를 가지고 싶으면서도 가지고 싶지 않은 척하고, 나일의 곁을 종종 떠나면서도 자신을 붙들어주지 않음에 묘한 원망을 느낀다. 그녀는 때로 자신이 나일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끔 사로잡힌다. 이런 프래니의 마음은 크게 두 가지 사건에서 폭발하게 된다. 아이를 유산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더러운 피가 아이를 살해했다고 상상하며, 나일이 죽었을 때는 사고로 죽었음에도 재판장에게 그를 자신이 죽였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그런 그녀는 나일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 부분부터는 나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세 번째, 이 책은 '프래니'가 '북극 갈매기를 쫓아야 했던 이유'를 찾는 이야기다. 프래니가 갈매기를 쫓은 이유는 순전히 나일 때문이다. 프래니 만큼이나 나일 역시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철저하게 문명화된 세계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상위층 부모를 만나 표면을 중시하는 어머니와 동료들 사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생명의 바다와 살아있는 생물에 깊게 매료된다. 젊고 능력 있는 교수가 된 그는 진심으로 자연물을 보호하고자 하며 일에 매진한다. 그러던 중, 나일은 자신의 강의실을 뛰쳐나가는 학생 아닌 학생, 청소부 프래니를 만난다.

 

프래니는 공인된 자격증은 없었으나 그 누구보다 새들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 앞서 말했듯 그녀는 스스로가 두려워할 정도의 야생성을 보존하고 있었고, 나일은 그녀에게 바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나일은 그녀와 함께 지내면 지낼수록 자신이 프래니라는 새를 새장에 넣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한 생각의 확신은 프래니가 몽유병으로 생물 보호 지역으로 갔을 때, 그녀를 쫓아간 후에 호수에 빠져죽을 뻔하면서 확고해진다.


호수에 빠져 몸에 힘이 빠져있을 때, 자신이 돕지 못한다고 울먹거리면서 그를 꺼내는 프래니를 보면서 그는 묘한 감성이 들었던 것 같다. 여기부터는 나의 해석이지만, 나일은 그녀가 자신을 그토록 원초적인 상태에서 연결되었다는 확신 아래에 그녀의 새장을 열어줬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일은 그녀가 찾아 나선 어머니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프래니가 그것을 핑계 삼아 자신의 야생성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일은 방랑과 떠남을 구분하면서, 그녀가 한 번도 떠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마치 까마귀들이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프래니와 서로 선물을 주고받았던 것처럼, 그들이 함께 까마귀 알을 부화시켰던 것처럼, 새장의 문을 열어젖혀도 그들은 야생 속에서 공존할 수 있다.

 

이렇게 나일과 프래니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때 쯤에, 프래니가 멸종된 지 알았던 야생 올빼미를 피하기 위해 차를 틀었던 것이 나일과 상대 운전자를 죽음으로 내몰게 된다. 프래니는 절망하지만, 그대로 자살하는 대신 살아있는 것을 긍정한다. 이 시점부터 그녀는 자신의 야생성을 순수한 생명력으로 전환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법정의 처벌을 통해 자신의 마음에 묵혀뒀던 어떤 부분을 청산하고, 가석방 이후로 나일의 방에서 그녀에 대한 사랑과 딸을 낳고 싶었던 이유에 대해 쓴 글을 보게 된다. 그리고 북극제비 갈매기가 죽지 않았다면,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에 자신을 뿌려주고 그렇지 않다면 육지에 남아있는 생물들의 지양분이 되기 위해 매장해달라는 유서를 본다.

 

북극제비 갈매기는 멸종되었지만, 프래니는 나일의 연구를 통해 그들 중 몇몇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녀는 온갖 역경을 견뎌가면서 그들을 쫓아간다. 프래니를 향해 고정되어있지만 결국 세계 전체를 향해 있었던 나일의 동경과 사랑에 보답하고, 그녀 자신 역시 더 멀리 자연슬버게 비행하기 위해. 그리고 결국 그녀는 그것을 이룬다. 그녀만큼이나 북극 제비 갈매기, 그리고 바다는 끈질기게 살아남는 기적을 보인 것이다.

 

네 번째, 이 책은 '프래니'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이야기다. 과거는 나일과 프래니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지만, 배를 타고 떠나는 선원들의 이야기가 중점이 된다. 다양한 인물상이 있고 각자의 인물들은 프래니와 다른 경험을 하지만, 지면상 선장 에니스 말론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에니스 말론은 만석을 뜻하는 골든벨을 울리기 위해 배에 오른다. 그는 정말로 물고기를 잡는 데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아이들과 아내를 다시 만나기 위한 자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고기가 멸종위기에 처해있어 돌아오는 돈도 없는 상황에서 그의 선택은 썩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프래니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라고만 대답한다.

 

하지만 그가 바다를 향하게 된 데에는 좀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우선 그의 아내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 상태다. 아내는 자신이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고, 에니스는 그 곁에 머무르고 싶어했지만 아내가 거부했다. 아내의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 품위있는 모습을 서로 보여주고 싶어하는 아내와의 심리적 공명, 가족의 이별이 가져올 파멸적인 망상을 어깨에 멘 에니스는 바다로 자신을 이끌었다. 에니스는 처음에 프래니를 버거워했는데, 조류학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프래니가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볼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었다. 그정도로 그는 취약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가 바다를 대하는 마음은 상당히 이중적이다. 온갖 강박과 불안, 희망없는 행동을 반복하고자 하는 그는 바닷속에서 죽음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프래니와 에니스의 조우는 에니스가 술에 깨기 위해 물에 빠진 것을 프래니가 구해주면서 이루어졌다. 에니스는 자신이 죽을 의도가 없었다고 이야기했지만, 위험을 지나치게 감수하는 그의 강박적인 태도에 죽음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바다에서 그 누구보다 생명을 발견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죽음의 이미지를 드리운 바다에서 생명을 그린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애당초 멸종위기의 물고기들을 찾으면서 만선을 꿈꾸는 멍청한 짓이 그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가 평생을 바쳐온 바다라는 공간에서 생명을 발견하면, 그의 삶에도 어떤 희망이 비추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 아닐까 싶다.

 

에니스의 마음은 상당히 프래니와 비슷한 면모가 있다. 프래니 역시 자기파괴에 가까운 과정을 통해 삶의 단서, 그러니까 희망과 살아있다는 감각을 찾고자 몸부림쳤다. 그래서 프래니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에니스와 함께 항해해주겠다고 이야기하고, 이들은 실제로 끝까지 함께 항해해 물고기도, 새도 발견한다. 에니스는 물고기를 잡을 생각도 바다의 생명력을 느낀다.

 

에니스와 프래니의 만남은 프래니가 위치추적기를 달아놓은 두 마리새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멸종위기종이지만 폭풍을 스스로 뚫고 오래 항해해 번식할, 삶을 이어나갈 땅을 찾아낸다. 에니스와 프래니 역시 그랬다. 파도 속에 삼켜진 단 한 마리의 새는 나일일수도, 그의 어머니일수도, 아니면 에니스와 프래니 안에 존재하던 수많은 간절하고 절망적이어서 아름다운 파편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이 그곳에 도달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정말로 이 글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이그레이션>은 나에게 수많은 감상을 남긴 작품이다. 이 혼란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는 작품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나는 이 작품을, 문명과 야생의 대립과 혼합이 아니라, 인간 안에 가장 원초적인 인간성이 가장 야생적이라는 말로 정리하고 싶다. 살아있다는 것은 새장을 닫아도, 그 사이를 뚫고 팔을 뻗고 자라나는 것이다. 문명을 통해 가장해도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야생성은, 다른 사람과 호흡하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먹을 것 없는 바다를 거쳐 그 긴 비행을 버텨내고, 마침내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다음 생을 이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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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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