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나라 전기소설 속 판타지의 흔적 [문화 전반]

애정전기소설의 미학과 소설사적 의의
글 입력 2023.06.20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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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소설이란 지식인의 불우한 처지, 남녀의 비극적 사랑이라는 모티프를 초현실성, 환상성, 낭만성에 곁들여 구현해낸 한국 고전 소설사의 초창기 양식이다. 그 중 '만복사저포기'와 '주생전'은 남녀의 애정결연을 주된 줄거리로 하는 애정류 전기 소설에 속한다. 


현실계와 이계라는 이원적 세계상, 인물 특성 등 전기소설은 이후 소설사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형과 상상력의 초기 형태라는 점에서 그 의의와 중요성이 상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기존 고소설사 연구가 그 내용상의 특징, 인물, 서사전개방식 등 그 구성적 의의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엔 다소 소홀했던 애정 전기소설의 미학적 부분에서의 의의를 찾아보고자 한다.

 

 

시녀가 그 명령대로 가서 뜨락에 술자리를 베푸니, 시간은 벌써 사경이나 되었다. 시녀가 차려 놓은 방석과 술상은 무늬가 없어 깨끗하였으며, 술에서 풍기는 향내도 정녕 인간 세상의 솜씨는 아니었다. 

 

양생은 비록 의심나고 괴이하였지만, 여인의 이야기와 웃음솔가 맑고 고우며 얼굴과 몸가짐이 얌전하여, '틀림엇ㅂ이 귀한 집 아가씨가 담을 넘어 나왔구나' 생각하고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 '만복사저포기' 중

 

 

달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누각의 북쪽으로 연못이 훤히 보였다. 수면 위에는 갖가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꽃밭 사이로는 길이 굽굽이 나 있었다. 그는 이 길을 따라 슬금슬금 걸어갔다. 꽃밭이 끝나자 집이 있었다. 멀리 포도 아래 한 채의 집이 보였다. 사창은 절반이나 열러 있었고, 촛불이 높이 타오르고 있었다. 촛불 그림자 밑으로는 붉은 치마, 푸른 옷소매가 나풀거리는데, 영락없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옆에는 열 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머리채는 곱게 뒤로 땋아 내렸고, 얼굴은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소녀의 맑은 눈이 살짝 옆을 흘기는 모습은 흐르는 맑은 물결 위에 가을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 '주생전' 중

 

 

'만복사저포기'의 양생은 부처님과의 저포놀이에 승리해 한 아리따운 여인과 가지게 된 술자리에서 마치 이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기이함과 이상함을 느낀다. '주생전'의 주생이 몰래 선화네 집 담장에 숨어들어가 그 담장 안의 풍경과 선화의 아름다운 외모를 묘사하는 부분도 마찬가지다.

 

전기소설의 주된 서술상 특징인 화려한 문언문과 감각적인 문체로 초현실적이고 비현실적인 상황의 낭만성을 극대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체는 그 분위기만으로 독자가 남녀간 사랑에 빠진다는 그 사건과 진행에 몰입하게 한다.


토도로프는 환상성을 '머뭇거림'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기이하고 낯선, 현실세계의 법칙을 깨는 것들 앞에서 이 사건을 이해할 새로운 존재법칙을 찾지 못했기에 저 대상을 어떻게 이해할지 머뭇거리는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인귀교환과 명혼담 모티프를 주된 서사로 활용하고 있는 전기소설에 유독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초현실적 존재인 귀신의 등장 앞에 남자주인공은 기이함과 기묘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귀신을 외면하지도 못한다. '기이한이야기'라는 '전기' 장르의 특성상 그 환상성과 초현실성은 이미 그 명칭에 내재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전기소설의 전기적 요소들은 사실 모두 초현실적이고 허무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장치들이다. 하지만 그 허구성은 독자들에게 뜬금없이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허구적 사건 전개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더욱 작품을 아름답고 재미있게 읽는걸 가능하게 한다. 


본래 소설이란 허구성과 사실성을 동시에 지닌 허구적 이야기이다. 오늘날 여러 영화, 드라마, 소설과 같은 작품에서 허구적 이야기라는걸 알고 있음에도 종종 개연성을 지나치게 무시하거나 고증이 틀린 작품들에 독자들은 불편함을 느낀다. 이야기의 몰입과 집중을 방해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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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독자의 '읽기'로 비로소 그 가치가 완성된다. 수많은 독자들에게 소설이란, 이야기란 작가가 창조한 또다른 허구적 '세계'를 의미한다. 작가가 설정한 장치들은 그 세계의 법칙이 되고 창조한 인물들은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되어 독자들은 마음대로 그 세계 속 인물들의 세계에 때론 공감하고 또 때론 공감하지 못한다. 


전기소설이 개연성의 유무를 뛰어넘는 초현실성을 주된 줄거리로 하고 있음에도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는 그 이야기의 전개방식이 환상적이고 낭만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전기소설 특유의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문체와 분위기가 있다. 


감각적이고 섬세한 문체는 환상성을 극대화시키고 비현실성을 낭만적으로 해석해 독자로 하여금 그 이야기의 '기이성'에 더욱 몰입하게 한다. 세상엔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이야기와 현실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허구성과 사실성의 비율이 그 정도를 결정할 것이다. 


고소설때부터 발전된 현대의 소설은 그 이야기의 체계성과 논리성이 크게 발전해 작가가 창조한 하나의 세계라는 의식이 강하다. 때문에 독자들은 소설을 읽을때 그 개연성과 현실성에 민감하다. 소설 속 세계를 또다른 허구의 정교한 세계라고 인식하고 소설 속 이야기에 몰입하기 때문이다. 


고소설의 작자는 현실의 작가에 비해 그 객관성과 중립성이 떨어진다. 특히 전기소설의 주된 작자였던 소외된 사대부계층이 자신의 바람을 허구적 세계에서 실현하고자하는 욕망에서 창작이 시작된 경우가 많다. 때문에 때로는 객관성을 지키지 못한 남성 사대부 작자의 이기적이고 평면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도구적 존재로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남녀의 애정결연과 사랑이라는, 전시대를 관통하는 인류의 소망과 욕망을 다소 치우친 시각으로나마 아름답고 솔직하게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다.

 

현실의 어려움과 소외된 처지를 잠시나마 잊게 하는 아름답고 기이한 이야기. 오히려 현실 세계같지 않은 수많은 기이한 풍경들과 사건들이 이야기를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사회고발형 소설도 물론 있지만, 전기 소설이란 읽는 사람이 그 아름답고 낭만적인 이야기에 빠져 재미를 느끼고 현실의 욕망을 대리 충족할 수 있는 허구성이 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도가니>와 같은 현실고발형 소설과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작품 중에서 후자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심심파적, 재미 등 현실의 어려움을 잠시 잊고 몰입할 수 있는 아름잡고 기이한 초창기 기록된 이야기 장르였다는 점에서 그 소설사적 미학과 의미가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박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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