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성의를 들여 살아내는 삶 [영화]

글 입력 2023.06.1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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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2015)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 알의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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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할머니 댁에서 봉지 가득 감자를 얻었다. 직접 심고 길러서 캔, 제철을 맞은 작물. 동글동글하고 흙냄새가 진했다. 날이 더워지니 입맛이 없어서, 간식 겸 끼니 삼아 먹으려 감자를 몇 개 꺼내 씻었다. 고르지 못한 표면과 홈에 엉긴 작은 흙덩이들이 물을 만나자 비 냄새가 났다. 좀처럼 흙 따위를 만질 일이 없는 요즘, 새삼스러운 냄새에 마음 어딘가가 환기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잘 씻은 감자의 밑부분이 살짝 잠길 정도로만 물을 넣고 밥솥에 푹 찌자, 익는 동안 껍질이 톡 터져 아주 포슬포슬하게 잘 익은 감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금이나 설탕을 살짝 쳐서 먹거나 으깨서 마요네즈를 섞어 먹으니, 미미하던 식욕이 무색하도록 금세 몇 개를 해치우게 됐다.

 

한 일이라곤 감자 몇 개를 물에 씻고, 찌고, 간을 조금 해서 먹은 것뿐인데 이상하게도 잘 갖춰먹었을 때의 뿌듯함이 몰려왔다. 한 며칠은 언니들에게 꼭 한번 해 먹어보라며 추천을 할 정도로, 즐거웠던 식사. 먹는 일에 큰 열의가 있는 편은 아닌지라 그건 꽤 드문 경험이었다. 왜였을까. 엄마가 할머니로부터 알아온, 찜기가 필요없는 새로운 조리법이 아주 성공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좋아하는 감자를 꽤 오랜만에 직접 쪄서 먹었기 때문일까.

 

가만 생각을 해보니 이것도, 저것도 모두 맞았다. 정확히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우선 그 감자는 다른 이의 손을 거의 거치지 않은 것이었다. 따지자면 내가 접할 수 있는 세상의 많은 감자들 중, 가장 그 출신이 명확한 것이라고나 할까. 잘 포장된 채 마트 매대 위에 가지런히 놓인 감자 역시 누군가의 노고와 정성으로 길러졌겠지만, 밭의 생김새며 그곳까지 가는 길이며 그 밭을 가꾸는 이의 모습이며 하는 것들을 모두 알 수 있는 검은 봉지 속 감자는 아무래도 좀 특별했다(감자를 직접 기르지도 않은 내가 이런 기분이 들었다는 건 좀 웃기지만, 이 특별함은 친숙함 정도로 칭해두기로 한다). 내가 '아는' 감자. 그 속에 담긴 노력과 마음이 아주 선명하게 와닿는.

 

또 단순하지만 어떤 조치를 통해 훨씬 나은 결과물을 얻었다는 점이 소소한 성취감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더 나은 결과물이라는 것은, 일차적으론 새 조리법을 통해 얻어낸 더 간편하지만 더 맛있는 찐 감자이고, 나아가선 평소보다 조금 더 나를 위하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툭하면 끼니를 대충 때우고, 좀처럼 돋우어지지 않는 입맛을 MSG의 폭력적인 감칠맛으로 끌어올리는 내가 직접 찐 슴슴한 감자를 먹었다는 것. 그 정도가 미미한 것은 스스로도 알았지만 그래도 나를 좀 더 챙길 수 있는 음식을 먹은 기분이었다.

 

식단을 계획하고, 재료를 구해서, 밥을 지어 먹고, 뒷정리를 하는 일련의 과정. 이건 내가 감자를 쪄 먹었을 때처럼 뿌듯함을 느낄 만한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모든 과정이 그저 귀찮고 짜증스럽게 여겨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해야 하는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은데, 왜 겨우 먹는다는 이 단순한 행위에 이토록 많은 손길이 필요한 걸까. 장을 보러 가는 시간마저 아깝게 느껴져서 문 앞 배송을 시키고, 이미 완성되어 데우기만 하면 되는 음식을 사 먹는 것이 요즘의 생활이었다.

 

비단 나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아마 그건 삶의 속성이 너무 복잡해졌기 때문이겠지. 분명 처음엔 '먹고 살자'고 시작한 일들의 복잡함에 짓눌려, 우리는 '먹고 산다'는 삶 본연의 단순함을 잊게 된다. 그 타성에 젖어있던 와중에 나에게 굴러들어온 것이 몇 알의 감자였고. 그리고 그 포슬포슬한 것들은 자연스레 잊고 있던 영화 한 편, 가장 중요한 단순함을 품고 있던 영화 한 편을 의식 저 밑에서 끌고 올라왔다.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


  

2018년에 김태리 주연의 동명 영화로 한국에서 로컬라이징된 바가 있어, 해당 버전이 더 널리 알려진 듯도 하다. 다만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일본의 원작 시리즈, 그 중에서도 여름과 가을을 배경으로 하는 첫 번째 편이다. '리틀 포레스트: 여름과 가을'(2015), '리틀 포레스트2 :겨울과 봄'(2015), 그리고 이 두 편의 요약 및 합본인 '리틀 포레스트: 사계절'(2018)까지, 일단은 총 3개로 이루어진 시리즈이지만, 시리즈물로서는 특이하게도 이 영화에는 사건이랄 것이 거의 없다. 첫 번째 공식 소개문을 잠시 인용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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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생활하다 쫓기듯 고향인 코모리로 돌아온 이치코. 시내로 나가려면 한시간 이상이 걸리는 작은 숲 속 같은 그 곳에서 자급자족하며 농촌 생활을 시작한다. 직접 농사지은 작물들과 채소, 그리고 제철마다 풍족하게 선물해주는 자연의 선물로 매일 정성껏 식사를 준비한다. 음식을 먹으며 음식과 얽힌 엄마와의 추억을 문득 떠올리는 이치코에게 낯익은 필체의 편지가 도착하는데..
 

 

이 소개문에 적힌 줄거리가 '여름과 가을' 편 속 서사의 전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장면 대부분이 주인공 이치코가 고향 코모리에서 혼자 끼니를 지어먹는 모습을 계절의 흐름에 따라 담아내고 있다. 그런 만큼 등장인물도 대화 장면도 적어서, 비는 사운드는 대부분 이치코의 나지막한 나레이션으로 채워진다. 계절마다 일곱 개 정도의 요리가 등장하며 흐름의 중심을 만들고, 각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얻고 조리하는 과정이나 그에 얽힌 이치코의 회상이 에피소드처럼 엮여있다.

 

절절한 서사도, 화려한 연출도 없이 그저 한적한 마을에서 논과 밭을, 나아가 생활을 일궈나가는 모습을 담아내는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같기도, 유행하던 일상 브이로그 같기도 하다. 하지만 특유의 잔잔함과 소박함은 밋밋함이 아닌 묘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그 매력은 영화가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에 집중할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바쁜 일상에 치이는 현대인들에게는 음식을 차려먹는 일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에게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고, 오랜 시간을 들여 조리하는 과정은 웬만하면 생략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생략은 각종 상품의 형태를 한 채 손쉽게 거래된다. 조리에 시간을 직접 들이기보단 이미 만들어진 것을 마트에서 간단히 구입하고, 창고에 쌓아놓듯 냉장고에 던져둔다. 불과 용기를 사용하는 일마저 줄이려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그만인, 물에 타서 넘기면 그만인 음식들. 이들의 주방에는 일상의 피로함을 줄이기 위한 효율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혹은 주방을 이용할 일마저 없도록 상을 차리는 과정을 일괄 구매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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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생략해왔던 것들, 좀처럼 들여다볼 일이 없던 과정에 집중한다. 이치코의 소박하고 정갈한 주방을 잠시 살펴본다. 하나하나 라벨링 된 조미료들, 생활감이 묻어나는 조리기구들, 주방 구석구석 모든 요소에 정성스런 손길이 닿아 있다. 그 모습처럼, 이 주방에서는 정직함만이 작동한다.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은 최대한 직접 길러 구한다(자급하지 못한 재료의 경우 빵에 쓰는 밀가루 하나마저 그 이유를 설명한다). 치댄 빵 반죽을 발효시키려면 따뜻하고 습한 계절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한 병의 식혜를 얻기 위해서는 직접 수확한 쌀로 끓인 죽과 꼬박 하루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흔히 귀향 생활하면 연상되는 한가로움과는 달리, 코모리에서의 생활은 전혀 팔자 좋게 늘어져있기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코모리에서의 생활은 부족해보인다는 감이 없다. 오히려 충만해보인다. 시골의 일상을 제대로 굴려나가려면 느림에도 불구하고, 가 아니라 느리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로 하루하루를 촘촘히 채워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느려야만 하는 것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해, 영화는 그 모든 과정을 놓치지 않으려는 여유로운 속도감과 담백하지만 정직한 시선을 갖추고 있다. 빵과 식혜처럼 필연적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한 요리들이 가장 먼저 배치된 것에서는 그런 영화의 태도가 비유적으로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항상 시간 단위로, 분 단위로 하루를 쪼개가며 무언가에 쫓기듯 살아오지 않았던가. 분명 내 손으로 채워온 빼곡한 캘린더인데, 어느 순간 삶의 중심은 내가 아닌 나의 일정이 되어버리며 정작 마음 어딘가는 텅 비어버린 것 같은 아이러니를 우리 모두 겪고 있다. 처음 재료를 길러내는 일부터 아날로그 방식으로 안치고, 끓이고, 볶고, 절이기까지. 하루하루를 제 손으로 일궈나가는 이치코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효율의 원리로 최대한 '처리'해오며 잊고 있던 것들 속에 담긴 질문이 이따금 떠오른다. 다른 무엇도 아닌 내가 일상을 굴리는 주체가 된다는 느낌은 어떤 것이었나. 그러니까, 성의를 들여 살아내는 삶이란 무엇이었나.

 



내용이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삶


 

이치코의 친한 고향 후배인 유타는, 자신이 도시로 나갔다가 다시 코모리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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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리랑 거긴 말 자체가 달라. 사투리 같은 거 말고. 자기 몸으로 직접 한 일과 그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 자신이 책임지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런 거잖아. 그런 걸 많이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믿어. (...) 여기를 나가서 처음으로 코모리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었어. 내용이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삶을 살았구나, 하고.

 

 

내용과 책임이 있는 말과 삶. 성의를 다해 살아내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하는 것 같은 유타의 말을 듣고 나면 포스터 속 "정직한 한끼"와 같은 표현이 아주 묵직하게 느껴진다. 밥 한 그릇을 두고 코모리의 습기 속 온몸이 흠뻑 젖도록 땀을 흘리며 벼를 베어 본 사람이 몸소 느끼는 바는 터치 한 번으로 쌀을 배달받는 나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겠지. 물론 모두가 이 영화에서처럼 자급자족을 해야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어떤 생활을 하든 텅 비지 않은 말을 하기 위해선 자신이 지금 일궈나가고 있는 생활을, 시간을, 공간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종을 심고, 잡초를 거두고, 벼를 베고, 짚단을 정리하고. 코모리의 사람들은 일련의 행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느리고 투박한 시간들이 필요한 이유를, 이 모든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들이지, 다. 그렇게 온 몸이 짓눌릴 정도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면서도, 정작 본래의 목적은 잊은 채 스스로를 소홀히 하기 일쑤다. 나를 아끼기 위해 시작한 일들이 나를 해친다. 책임지고 말할 수 있는 것들, 그러니까 나를 둘러싼 일들과 매일 직접 해나가고 있는 일들. 이를 통해 내가 무엇을 향하고 있으며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강력한 일상의 관성에 매여있다보면 스스로도 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내뱉게 되는 말들은 붕 뜨게 될 뿐이다.


단순히 시골과 도시 생활의 이분법으로 보긴 어렵다. 둘의 표면적인 대비는 결국, 자신이 무엇을 왜 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에 대한 이야기다. 열심히만, 바쁘게만 살아서는 나에게 성의를 다했다고 말할 수 없다. 왜 그토록 부단히 노력했는지, 처음의 마음을 되묻는 기회를 스스로에게 준 적이 없다면 말이다.

 

그래서 영화는 조용히 일깨운다. 시간을 들일 만한 것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일 필요에 대해, 가장 중요해서 가장 단순하고 가장 집요한 일에 대해, 잊고 있던 것들에 대해. 그리고 나는 감히 물음을 던져본다. 오늘 당신의 한끼는 무엇을 위한 동력인가.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과연 무엇을 위한 성의인가. 나에게 별안간 굴러왔던 감자 몇 알과 이 영화처럼, 이 물음을 통해 당신이 지겨운 관성 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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