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상처를 딛고 성장하는 것,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것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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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관람 포인트에 관한 오피니언을 작성하였다. 그중 캐릭터 분석에 대해 아쉬움이 조금 남고, 각 인물의 매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싶은 마음에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어 나가고자 한다.
다만 뮤지컬은 배우에 따라 캐릭터에 관한 해석과 그 결과물이 굉장히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기에, 각 캐릭터의 절대적인 성격과 가치관을 특정하기에는 어렵다. 이는 각 인물에 관한 나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이 오피니언을 읽는 독자들도 뮤지컬을 관람하며 각자의 생각을 정리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번 오피니언의 주제는 <오페라의 유령>의 유일무이한, 그리고 사랑스러운 여자주인공 ‘크리스틴’이다.
1.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로, 수동적 객체에서 능동적 주체로
과거를 극복하고 현재로 나아가는 크리스틴의 성장은 팬텀과 라울의 대조적 상징성과 함께 이전 오피니언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다만 초반의 크리스틴이 왜 과거에 메인 채 수동적인 상태였는지를 뮤지컬 외의 맥락과 함께 더 구체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로, 크리스틴의 아버지(귀스타브 다에)는 크리스틴이 어렸을 적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나이는 파악할 수 없지만, 적어도 크리스틴이 성인이 되기 이전, 즉 그녀가 완전히 자립할 시기를 맞이하기 이전 사망했을 것이다. 이미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상태에서 귀스타브는 크리스틴의 유일한 보호자이자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기도 하였다.
<오페라의 유령> 넘버 ‘Wishing You Were Somehow Here Again’에서 크리스틴이 그녀의 아버지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You were once my one companion
You were all that mattered
You were once a friend and father
Then my world was shattered
- ‘Wishing You Were Somehow Here Again’ 中
두 번째로,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크리스틴이 오페라 극장에서 무용수로 활동할 때, 그 시기에 귀족 남성들이 후원자라는 명목으로 어린 무용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부모를 모두 여읜 크리스틴에게 그나마 남은 유일한 어른 보호자는 발레 코치인 마담 지리뿐이었고, 그 외에 그녀가 정신적으로 성숙해지거나 자신을 보호할 힘을 가질 수 있는 배경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전 극장주 르페브르는 그녀를 ‘정신이 다른 곳에 팔린’ 소녀로 묘사한다.
그 무렵 크리스틴에게 다가온 ‘보호자’가 한 명 존재한다. ‘음악의 천사’의 탈을 쓴 팬텀. 시간은 지났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아버지와 함께하던 소녀의 상태에 머물러있던 크리스틴에게 팬텀의 등장은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다. ‘음악의 천사’의 이야기를 들은 맥, 라울은 그것을 쉽게 믿지 않지만 크리스틴은 여전히 그가 ‘음악의 천사’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음악의 천사’는 크리스틴이 음악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도와주었어도, 그녀가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데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수동적이었고, 팬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라울이 크리스틴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할 때 그녀가 그 약속을 거절한 이유가 본인이 공연을 마치고 피곤해서, 혹은 식사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닌 ‘음악의 천사는 아주 엄격하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크리스틴의 지나치게 방어적인 행보의 근본적 원인은 위의 이유들에서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이는 곧 아래에 등장할 이야기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자신이 믿고 있던 음악의 천사가 그동안 오페라 극장에서 벌인 악질적인 행보의 주인공인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깨닫기 시작하며 크리스틴은 그의 살인의 대상이 될까 두려워한다.
이로 인해 그가 나타나지 않던 6개월간의 공백에도 크리스틴은 여전히 그가 다시 나타날까 두려워하고 있었고, 오페라 <돈주앙의 승리>에서 주인공 자리를 맡는 것을 꺼린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크리스틴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팬텀의 요구이지만 결국 라울과 극장주들이 계획하는 팬텀에 대한 배신이 되기에 그 사이의 딜레마 속에서 크리스틴은 혼란스러워하고, 도망치고 싶어 한다. 이는 현실의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나타내기도 한다.
No more memories, no more silent tears
No more gazing across the wasted years
Help me say goodbye
Help me say goodbye
- ‘Wishing You Were Somehow Here Again’ 中
이후 등장하는 넘버 ‘Wishing You Were Somehow Here Again’이 아버지와 크리스틴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결국 이는 크리스틴이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망령을 완전히 보내주려 하는 내용이다. 이 넘버를 기점으로 크리스틴이 아버지와 함께하던 과거에서 벗어나고, 팬텀이 아닌 라울에게 향하는 상징성을 통해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정신적 성장을 암시한다.
이후 크리스틴이 <돈주앙의 승리>의 주인공을 맡게 된 것이 그녀의 온전한 의지인지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녀가 회피하거나 도망치지 않고 팬텀과 맞서기로 결심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 그녀가 그녀 자신만의 선택을 하는 순간은 마지막 장면에서 팬텀에게 키스할 때이다.
라울이 팬텀의 함정에 빠져 올가미에 걸리고, 팬텀이 제시한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팬텀 자신을 선택하고 라울을 살리는 것, 혹은 라울을 선택하고 라울을 죽음에 빠뜨리는 것. 비록 크리스틴이 팬텀에게 키스한 것은 전자를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위는 오히려 제3의 선택지로 향한 것으로 생각한다. 단순히 라울을 살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그를 동정하고 있기에 자의로 할 수 있었던 선택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신기하게도 크리스틴의 초반의 모습은 팬텀과 닮았고, 성장한 이후의 모습은 라울과 닮아있다. 단순히 어둠에서 빛으로,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크리스틴이 과거의 일들로 상처받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려는 모습은 팬텀의 의존적인 성향과 유사하고, 앞으로의 결과를 알 수 없어도 오롯이 자신만의 결정을 내리는 모습은 라울의 주관이 강한 성향과 유사하다. 그래서 크리스틴의 성장을 살펴보려면 세 사람의 복잡한 관계성을 파악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 음악의 천사, 오페라의 유령, 그리고 외로운 한 남자
위에서 말한 크리스틴의 이야기를 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크리스틴이 팬텀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크리스틴과 팬텀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크리스틴은 어떻게 팬텀을 ‘이해’하게 되었는가?
“She’s been taking lessons from a great teacher.”
“From whom?”
“..I don’t know, sir.”
크리스틴이 팬텀에게 레슨을 받던 당시에는 오직 그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즉, 그녀에게 팬텀은 자신의 노래 실력을 프리마돈나의 경지로 끌어올린 실체 없는 존재였다. 그러한 배경을 생각하면 크리스틴이 팬텀을 ‘음악의 천사’라고 착각하는 것이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팬텀이 거울을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크리스틴은 팬텀이 단순히 ‘음악의 천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했을 것이다. ‘The Phantom Of The Opera’ 넘버의 가사를 고려했을 때, 어쩌면 그녀는 그가 그동안 오페라 극장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의 주범인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In sleep he sang to me, in dreams he came
That voice which calls to me and speaks my name
And do I dream again? For now I find
The Phantom of the Opera is there – inside my mind
- ‘The Phantom Of The Opera’ 中
그리고 마치 판도라가 미지의 상자를 연 것처럼, 크리스틴이 팬텀의 가면을 호기심에 벗겨내자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내고 만다. 그녀가 무심코 벗겨버린 가면이 그의 치명적인 역린이라는 점, 가면 뒤 흉측하고 분노에 가득 찬 그의 모습, 하지만 결국에는 그동안 그녀를 가르친 경이로운 ‘음악의 천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해지고 약해진 그의 모습.
그리고 이후 오페라 <일 무토>에서 팬텀을 거역하고 비웃은 칼롯타가 두꺼비 소리를 내며 공연을 망치고, 팬텀의 이야기를 함부로 말하고 다닌 조셉 부케가 살해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크리스틴은 본인 또한 그 끔찍한 사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나 그녀는 그의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누구인지,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의 얼굴은 어떤 모습인지까지.
하지만 그러면서도 크리스틴은 팬텀에게 쉽게 저항하지 못한다. 단순히 그 저항의 대가가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그를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이유는 첫 번째로, 그는 그녀를 프리마돈나로 만들어준 고마운 존재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가 보여준 황홀경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그가 단순히 천사 혹은 살인자인 것을 떠나서 한 외로운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로움은 크리스틴 또한 그동안 살아온 인생으로 공감할 수 있던 것이었다.
But his voice filled my spirit with a strange, sweet sound
In that night there was music in my mind
And through music my soul began to soar
And I heard as I’d never heard before
(...)
Yet in his eyes all the sadness of the world
Those pleading eyes, that both threaten and adore
- ‘Raoul, I’ve Been There’ 中
하지만 위에서 말한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크리스틴은 자신과 라울, 그리고 오페라 극장의 사람들이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그 시작은 팬텀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라울의 계획에 동참하는 것, 즉 <돈 주앙의 승리> 무대에 주인공으로 그대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 후 예상치 못하게 무대 위에 팬텀이 등장하자, 그녀는 그의 가면을 벗겨낸다. 그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왜 크리스틴은 그가 분노할 것이라는 당연한 결과를 알면서도 그의 가면을 벗긴 것일까? 그것은 그녀가 더 이상 이전처럼 팬텀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와 동시에,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흉측한 얼굴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그에게 보내는 것이다. 그녀가 처음에 그의 가면을 벗겼을 때 놀라 시선을 피한 이후로, 그녀가 그의 맨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던 적이 있는가?
위의 행위와 더불어 크리스틴이 팬텀에게 입을 맞춘 행위는 그동안 팬텀을 ‘해치우려던’ 수많은 방법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팬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기에 ‘오페라의 유령’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해결책 또한 알 수 있었다. 팬텀은 단순히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뿐더러, 그것은 오히려 팬텀의 화를 돋울 뿐이었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를 알아내고, 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다.
다음 오피니언에서 팬텀을 더 자세하게 다룰 예정이긴 하나, 간략하게 잠시 그에 관해 얘기하자면, 그는 자신의 흉측한 얼굴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얼굴이 역린이자 저주라고 여겼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짚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크리스틴은 또한 팬텀이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물이었기에, 그를 ‘위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또한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그 메시지를 키스를 통해 전달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Pitiful creature of darkness
What kind of life have you known?
God give me courage to show you
You are not alone
- ‘Final Lair’ 中
그러므로 크리스틴과 팬텀의 관계는 단순히 성애적 관계로 해석하기에는 어렵다. 서로 음악적 영감을 주고받는, 마치 소울메이트 같은 관계이면서도, 각자 가진 외로움과 고통을 공유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비록 크리스틴과 팬텀은 이별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그들의 복잡하면서도 애틋한 관계는 그 이별을 더욱 애절하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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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의 시점으로 전개되던 원작 소설과는 다르게,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크리스틴이라는 인물을 더욱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 크리스틴의 연약한 면모가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녀가 그러한 성격을 가진 배경을 이해하고, 이후 그녀가 성장하며 타인까지 어떻게 감화하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다음 오피니언에서는 그녀를 사이에 두고 라이벌 구도를 이루는 두 남자, 팬텀과 라울에 대해서 다룰 예정이다.
[김민성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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