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대로'가 아니어도 [사람]

글 입력 2023.06.08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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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가 아니어도


 

푹푹 찌는 더위라고 칭하기엔 아직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감이 있지만, 확실히 요즘 밖을 나서 보면 살갗에 닿는 태양빛이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다. 한창 더운 시간의 땡볕에 있을 땐 건조하면서도 뜨거운 공기가 몸 구석구석을 따끔하게 찔러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더위에는 쥐약이라 그런지, 매사에 기운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자꾸 늘어지고, 무언가를 시작하기 힘들어졌다. 

 

이렇게 계절을 타기 시작했다는 건 또 흘려보낸 시간의 뭉텅이를 마주해야 할 때가 왔다는 뜻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달력의 페이지를 6월까지 넘기게 되었다. 이번 달에 할당된 날들을 다 보내고 나면 어느덧 올해의 절반을 지나오게 되는 셈이다.

 

이맘때 쯤이면 꼭 하게 되는 말이 있다. 뭐 했다고 올해가 벌써 반이나 지나간 거지. 습관적인 푸념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뼈가 있는 자조이기도 하다. 분명 반 년 내내 누워있기만 하면서 지낸 건 아닌데, 막상 돌아보면 남은 게 없는 것 같아 불안해진다. 나의 시간이, 다시 말해 나라는 사람이 시시한 공백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약간의 강박과 함께 그동안의 기록들을 들춰본다. 

 

소소하게 이런저런 일들을 해오긴 했다. 일도 하고, 여행도 가고, 공연도 보고,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도 보고. 그런데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 건 이런 일들이 공식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류의 일은 아니기 때문이겠지. 내 생활이 현상 유지에 불과한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백조는 물 위에 떠 있으려 쉼 없이 발을 구른다는 말처럼 나는 현재를 영위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결과적으로는 한 군데에 고여버린 것과 마찬가지인 건 아닌지 의문스럽다.  

 

긴 인생에 좀 고여있는 시기가 있으면 어떤가 싶다가도, 공백을 공백 그대로, 무위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 같은 세상에 억울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런 숨 막히는 풍조의 일선에 자발적으로 서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나이기도 하다.

 

이번 4일간의 연휴도 그랬다(연휴 사이 징검다리로 낀 평일이 있었지만 이 날은 감사하게도 쉴 수 있는 날이었다). 이렇게 큰 단위로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어떻게든 이 시간을 잘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은 국내 여행을 다녀오고, 하루는 얼마 전 개봉해서 보고 싶었던 영화를 보러 나갔다. 휴식도 필요하니 마지막 날엔 집에서 꼼짝않고 책을 읽거나 밀린 예능을 보며 뒹굴거렸다.

 

그렇게 나흘의 휴일을 마무리하면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지겹게도 또 불안함이었다. 쉴 거면 제대로 쉬든, 놀 거면 제대로 놀든, 뭔가를 하려면 제대로 할 것을. 알차게 시간을 써 보겠다고 채워넣은 일정은 막상 지나고 보니 어정쩡하게만 느껴졌다. 즐거웠던 것은 맞는데, 애매하게 남은 피곤함과 지출 내역을 안고 다시 일상을 굴려나가려니 왠지 모를 불만족이 피어올랐다. 어째서 쉬는 일마저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걸까, 하는 자책이 몰려온다.

 

요즘은 항상 이런 식이다. 분명 무언가를 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뭘 하든 뒤따르는 불만족. 대체 어떤 걸 충족하고 싶기에 매사에 이런 감정들이 찝찝하게 들러붙을까.

 

그래도 조금이나마 다행인 건 최근 들어 내 안을 들여다보는 법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러고보면, 항상 나는 '제대로'의 강박에 매여서 지내왔다. 그게 무엇이든, 단 하나라도 제대로 매듭 지어진 느낌이 들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튼 도착 지점이 필요했다. 주어진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보면, 적어도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동안은 내가 무가치하다는 기분이 들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요즘의 생활 운영 방식 자체가 그런 효능감을 느끼기가 어려운 상태다. 쉬어가자는 결정은 분명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히 맡은 바와 적을 두고 있지 않으니(지금 하는 일들은 임시적이니) 붕 뜨는 느낌에 불안이 당연하게 뒤따른다. 그렇게 비어 있는 도착 지점을 채우기 위해서 나는 '제대로 해내야 할 무언가'의 자리에 '쉬기'를 놓아두는 지경에 이르렀다.

 

제대로 쉬기. 할 거면 제대로 뭔가를 하고, 아니면 제대로 쉬자. 작년 연말 다이어리에 써놓은 말이다. 지금의 공백이 전혀 후회되지 않을 정도로, 당분간은 쉬고 싶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주 질리도록 쉬어보자.

 

하지만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쉬는 것마저 '해내야 하는 일'의 범주에 넣어두고 압박을 느끼면서 어떻게 말 그대로 마음 편히 쉴 수 있단 것일까. 그렇게 애매하게 남은 강박과, 내가 입고 쓰는 것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상황이 맞물려서 제대로 쉬지도, 제대로 일하지도 못하는 이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말 못할 불만이 계속 쌓여만 가고 있었다. 이번 휴가 끝의 허무함과 짜증은 그렇게 쌓여온 불만이 펑 터져버린 탓에 생겨난 것이었고.

 

결국 이걸 해결하기 위해선 처음의 전제를 뒤엎어야 했다. 뻔한 얘기지만, 사람이 매사 제대로일 순 없다. 뭐라도 일을 벌이는 게 어쩔 수 없는 내 천성이라서,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서, 예민한 성격상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어서, 생각했던 것만큼 제대로 쉴 수 없다면 그냥 그렇게 생활하면 된다. 이 일기인지 뭔지 모를 두서 없는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한 것도 그런 받아들임의 일환이다. 내 모든 것이 명확할 수 없듯 가끔은 이렇게 처음과 끝이 명확하지 않은 기록도 필요한 순간이 있겠지.

 

어쩌면 완벽하지 못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익혀가는 게, 지금의 공백기를 통해 얻고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무언가를 위하지 않는 쉼에 도달하는 법을 알고 싶다. 내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 목표를 끌어오지 않아도 되는 법을 알고 싶다. 그걸 알기 위해 지금의 이 애매한 시간들을 거쳐가는 중이었으면.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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