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막이 내리고도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나는 지금까지 춘향에 대해 감히 알지 못했다. 몇번이고 재관을 마음먹게 한 무용극 춘향 : 날개를 뜯긴 새] 리뷰. 앞으로는 국립정동극장에서 열리는 모든 극을 반드시 놓치지 않기로 관람하기로 결심할 정도였다.
과거에 멈추어 버린 춘향의 이야기를, 주체적인 여성의 시선으로 다시금 들여다보는 세심한 해석과 연희와 무용이 과감하게 어우러진 흥미진진한 무대, 음향과 무대 장치를 아우르는 다층적인 연출. 열흘 가까이 지난 지금도, 내 한쪽 발목 언저리는 춘향이 피눈물을 흘리며 고고히 서 있던 운명의 늪에 담가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까지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는 일곱 가지 이야기를 남겨 본다.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306/20230601085308_fvhbqwps.jpg)
#어머니로부터
춘향전에서 주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어머니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점이 정말 인상깊었다. 관기로서의 운명을 대물림해줄 수밖에 없는 비극. 처절한 어머니의 몸짓은 절망과 분노, 회환을 담아 끝내엔 마치 발버둥치듯 흘러나왔다.
신성하리만큼 웅장한 감각을 주는, 거대한 운명 앞에 가느다란 달빛을 등지고 선 작은 제단을 형상화한 것 같은, 어머니의 무대를 통해 막을 올린다. 무대 한가운데 앉아 기도를 올리다 마침내 기생으로서의 삶, 그 운명에 맞서고자 온몸을 뒤흔드는 모습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안타까운지.
이처럼 어머니와의 관계성으로 시작하는 첫 번째 막이 춘향의 개인사적인 면모, 한 인간으로서의 삶에 집중하게 만들어주었다. 이 운명과 출신의 불합리함, 부당함. 또한 그로 인해 족쇄처럼 매이고 날 적부터 예견되고 만, 숨쉬듯 자연스러운 삶이 아닌 치열하게 내 존재를 증명하고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버둥쳐아 하는 삶. 아마도 춘향은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깨닫는 것이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그 삶이 춘향의 앞에도 펼쳐질 것임을.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2).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306/20230601085315_wabmuyhf.jpg)
#뜯긴 날개
그렇기에 춘향의 날개는 처음부터 이미 꺾여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출생이라는 거대한 운명이 춘향의 날개를 꺾었다.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사랑스럽게 생글 웃으며 어머니와 거닐던 춘향은 검은 거대한 풍파에 맞아 바닥에 내팽개쳐진다. 기이한 방향으로 뒤틀린 팔. 뒤로 꺾인 팔은 아무리 날갯짓을 하려 해도 그저 몸부림으로 남을 뿐. 자신의 아이를 지키지 못한 비통한 심정으로 오열하며 춘향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담기니 그 치열함의 서사가 더욱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춘향은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머니도 춘향을 사랑했다. 이토록 초반부부터 압도적일 정도의 기량과 분위기를 잡아가는 극의 흐름이 인상적이었다. 이미 내가 알던 춘향전이 아니었다. 아주 거대한 춘향의 세계, 그녀의 내밀한 삶 속을 들여다 볼 준비를 해야 했다. 대단한 몰입감이다.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5).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306/20230601085329_qnnxhcyu.jpg)
#당신은 몰랐던 이몽룡
몽룡과의 서사의 서사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룬다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한 운명적 만남이 아닌,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필연적 만남이 있었다. 개연성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로부터 물동이를 끌어올리되 이를 그대로 극 속에 붇지 않는다. 꺾인 날개를 지니고 살아온 춘향, 그리고 몽룡 역시 양반가의 자제로서 얽힌 운명 속에서 꺾인 날개를 품고 살아오고 있었던 것. 이를 담담하고 사랑스럽게 묘사하는, 한 쌍의 학을 닮은 듯한 춤의 선이 오래도록 시선에 남았다.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306/20230601085335_bnmawiol.jpg)
#존재를 위하여
이몽룡은 과거를 보러 먼 길을 떠나고, 남원에 홀로 남은 춘향은 새로 부임한 변사또에 눈에 들어 수청을 들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전에는 저 말이 얼마나 비열한 것인지 인지하지 못했는데, 다시 들으니 한 여성의 인격을 짓밟아버리는 끔찍한 말이더라. 변사또의 위력은 굉장하다. 몽룡의 등장 이후 시종 부드럽게 흐르든 공기를 순식간에 없애 버리고 어둡고 검은 춤사위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무용은 굉장히 절도 있고, 때로는 형이상학적으로 느껴질 만큼 오묘해 더욱 압도적이다.
춘향의 이야기는 현실과 과거를 교차해가며 이어진다. 현실 속에서 이어지는 끝없는 고문, 그리고 과거를 통해 나타나는 몽룡과의 아름다운 추억. 춘향은 그 가운데에서 자신의 운명을 돌이키며 내면으로 들끓는 절망과 분노를 표출하고, 끝끝내 저항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낸다. 춘향의 마음을 나타낸 한 장면이 인상깊다. 그녀는 흔들릴지언정, 휘청일지언정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마음으로 지탱하며 검게 사그러가는 무대 위에 끝까지 서 있었다.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4).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306/20230601085349_xogicxwk.jpg)
#신성한 의지
유명한 설화이나 춘향전의 인물 춘향이 신성한 이미지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슬프게도 그 출신 때문이었을지. 혹은 몽룡에 기대어 펼쳐지는 서사가 더 강하게 다가왔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극에서는 숭고하기까지 한 춘향의 의지가 느껴진다. 그렇게 느끼게 한 표현, 연출이 정말 놀랍다. 춘향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었으나 이 극에서는 그저 한 개인으로서 살아가고자 했던, 나를 지키고자 했던 한 사람으로서 묘사된다. 아주 굳건하게.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6).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306/20230601085400_othzwpnl.jpg)
#서사를 담은 연출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분명 무용극을 보고 있는데 왜 끊임없이 대사가 있었던 것 같을까. 무용과 음악, 극 위의 모든 연출이 어우러져 그 자체로 아주 풍부한 서사를 담는다.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듣는 대사. 그 이야기.
변사또가 고문을 일삼는 장면 중에는 검은 끈에 칭칭 감겨 공중으로 붕 뜨인 춘향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몸에 감겨 바닥에 질질 끌려 가는 여러 개의 검은 가닥이 마치 검은 피를 흘리는 십자가를 연상시켰다. 그런가 하면 감옥에서 만난 춘향과 몽룡은 그 창살을 사이에 두고 타고 오르내리며 안타까운 손짓과 눈빛을 주고받는데 아무 말이 오가지 않아도 그 행동에서 오는 위로와 걱정, 애달픔과 분노의 정서가 생생하게 와 닿았다.
살피고 보니 배역을 맡은 무용단뿐 아니라 연출을 담당한 창작진의 라인업이 무척 단단했다. 연희 무용극 [춘향 : 날개를 뜯긴 새]에는 국립정동극장 예술단 지도위원 이규운이 직접 안무를 맡았으며, 연출에는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드라큘라], [셜록홈즈 1, 2] 등의 작품을 이끈 노우성이 참여했다. 그리고 '연희집단 The광대' 대표인 안대천 연희감독과의 협업을 통해 극이 완성되었다고. 여기에 '자장가', 판소리 춘향가 눈대목 '쑥대머리' 등 편안한 편곡을 이끌어내는 작곡가 강학선과 국립정동극장 예술단 타악팀의 연주, LED 바닥을 적용한 감각적인 무대 등 인물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요소가 무척 깊이 있게 존재했다.
![[국립정동극장] 춘향 날개를 뜯긴 새_ 공연사진 (7).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306/20230601085409_apfenqpk.jpg)
#닫힌 결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닫혀 있다. 결말이 정해져 있다. 변하지 않는다. 결국 죽음을 눈앞에 둘 때까지 주어진 운명에 저항하고 저항하던 춘향을 몽룡이 구해주는 것. 하지만 무엇을 보여주느냐가 다르다. 이 극은 아주 노련하고 박진감 넘치게 관객에게 춘향전을 새로이 바라볼 시선을 주었다. 역경의 순간 비추어지던 수많은 춘향의 내면 묘사. 또한 그 점에 무게를 확실히 싣고 싶었던 것인지 결말의 비중이 무척 적다. 몽룡이 춘향을 구하는 씬을 길게 다루지 않는다. 짧고 임팩트 있게 정리할 뿐.
극 말미에 이르러, 누군가는 우리가 알던 춘향의 이야기와 별 다르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춘향은 그저 거세게 발버둥칠 뿐 자신이 처한 운명 속에서 결국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변사또는 끝내 춘향을 놔주지 않았으며 그의 손아귀를 헤집고 나올 수 있었던 건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온 몽룡 덕분. 물론 몽룡 역시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으며 두 개의 꺾인 날개가 만나 빚게 된 운명적 결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춘향이 자신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몽룡과 맺어진 것으로, 결국 몽룡으로부터의 구원 역시 그 근원은 춘향에 있다고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만 확실한 것은 이 극은 단지 백마 탄 왕자의 서사를 담지 않는다는 것. 이 해방은 춘향의 처절한 전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자 하는 춘향의 의지는 단 한번도 꺾인 적이 없었다. 극은 이 점을 아주 길고 깊은 호흡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변치 않는 닫힌 결말이나,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결말이다. 어쩌면 춘향은 이미 승리했던 것이다.
춘향은 한 순간도 자신을 잃지 않고 지킴으로서 존재의 승리를 쟁취했다. 춘향은 억압당했으나 자유로웠다. 설령 몽룡이 찾아와 춘향을 구하지 않았다 한들, 그리하여 사약을 마시고 이승을 떠나는 몸이 되었다 한들, 너무나 큰 비극이고 잔인한 운명이지만 차라리 춘향에게는 그것 또한 어떠한 의미에서는 해피엔딩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이 극은 춘향전의 닫힌 시간선을 열어 그녀의 내면을 들여다보아, 한 개인의 눈물어린 의지로 점철된 새로운 역사를 '보여주고자' 했다.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의 문제. 이 극에서 내게 내밀어 준 춘향의 삶, 그 해석이 가슴에 거대한 울림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