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부의 얼굴들 - 2 [여행]

글 입력 2023.05.25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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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둘.


세부의 드라이버들은 폭풍처럼 차를 몰았다. 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바퀴가 밟고 지나가는 울퉁불퉁한 길의 표면이 내 몸에 그대로 전달되는 것처럼 온몸이 떨렸다. 나를 태운 차는 다른 차를 앞질렀고, 어떤 차는 다시 나의 차를 앞질렀다. 드라이버가 기어를 바꾸고 엑셀을 밟을 때마다 무언가는 내 뒤편으로 밀려났다. 우리의 차가 중앙선을 넘나들며 속력을 높이면 엔진이 승리의 함성처럼 자주 고함을 질렀다. 도로에는 빵빵, 하는 짧은 경적 소리가 자주 오갔다. 다른 언어로 터져 나오는 우리의 긴장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운전석에서는 동요 없이 기어가 딸깍이는 소리가 들렸다.

 

좁은 동네 길로 들어서도 차는 여전한 속도로 달렸다. 차도와 인도의 경계가 허물어진 길옆으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의 차 앞뒤와 좌우로 오토바이가, 혹은 다른 차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과 탈것이 겨우 한 뼘 거리로 가까이 붙으면 나는 마음을 졸였다. 몇 차례 당황스러움을 견딘 나는 고개를 빼들고 정지 신호를 찾았지만 신호등은 보이지 않았다. 차와 사람은 엉망으로 뒤섞인 채 나름의 속도와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기가 원래 운전이 거칠어요.”

 

조수석에 앉은 가이드가 여유롭게 핸드폰을 보면서 말했다.

 

“잘 수 있으면 좀 자두세요.”

 

그녀가 뒤를 돌아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잘 수 있으면.’ 그녀의 문장 속에는 필리핀의 샛노란 망고의 씨처럼 단단하고 유쾌한 뼈가 숨겨져 있었다. 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웃으며 손잡이를 꼭 잡았던 손을 슬며시 풀었다. 더위 때문에 손바닥이 축축해져 있었다. 반드시 세부의 지독한 더위 때문이었다.

 

아마도 시간이었을 것. 예상보다 훨씬 일찍 목적지에 도착해 벌써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곳에 짧게 머무를 손님인 나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서, 혹은 답답한 도로에서 보내야 할 자신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전자라면 고맙고 부담스러운 충성심이었고, 후자라면 아름답고 무책임한 자기애였다. 둘 중 무엇인지 헷갈려하면서 푸르게 펼쳐진 바다를 눈으로 먼저 만끽했다. 빨리 도달했기에 온기가 식지 않은 채 내 앞으로 배달된 바다였다. 나는 그 고요한 바다에 오랫동안 몸을 던져두었다. 속도에 치여 졸아든 긴장감이 차분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한참 뒤 흠뻑 젖은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돌아왔을 때, 드라이버는 활짝 웃으며 차 문을 열어주었다. 바다를 닮아 맑은 그의 눈빛에서 이전의 속도감을 읽을 수 없었다. 나도 그를 향해 한껏 안정된 웃음을 지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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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팀은 지금 되게 난감한가 봐요.”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기 전, 조수석에 앉은 가이드가 핸드폰을 보면서 말했다.

 

“다른 가이드한테 연락이 왔는데, 자기네 드라이버가 방금 애인한테 이별 통보를 받고 운전석에 앉아서 울고 있대요. 손님을 태웠는데 출발도 못하고.”

 

나는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어 옅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얼마든 속도를 낼 수 있지만 도저히 출발은 할 수 없는 난감한 사람. 이런 대책 없는 순수함이 지그재그로 세부의 거리를 내달렸다. 어쨌거나 우리의 차는 다시 움직였고, 천천히 달리는 오토바이 옆에 바짝 붙더니 굉음을 내며 순식간에 앞질렀다. 피로해진 몸을 감도는 약간의 멀미를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얼굴을 본 적 없는 세부 드라이버와 그를 떠나야 했던 연인의 슬픈 표정이 그려졌다.

 

‘나는 너를 떠나야 해. 그건 아마도 우리가 너무 빠르기 때문일 거야.’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서로 얼굴을 모르는 우리 세 사람은 사랑의 속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고, 이번엔 기묘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나는 곧 깊은 잠에 빠졌다.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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