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신기루를 유리병 안에 담을 수 있다면 - 연극 유리별 프로젝트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기억과 가벼워질 나의 삶
글 입력 2023.05.17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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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과 영상만으로 온전히 남길 수 없는 추억이 있다고 믿는다.

 

마치 신기루처럼, 영원히 남을 듯 강렬하다가도 손 닿으면 사라지는 추억들 말이다. 그래서 글로 감상을 기록하는 걸 좋아하게 되었나 보다.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그 신기루를 내 뇌에 간직하기 위해서.

 

바로 그 추억을, 유리병에 담을 수 있다면 어떨까? 기억이 날아가기 전까지라면 언제든지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그 순간을 만날 수 있다면? 이 마법 같은 일이 가능한 곳이 바로 <유리별 프로젝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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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 전에 아쉬운 점을 조금만 말하자면, 자극적인 소재가 조금 피곤했다. 주변인의 갑작스러운 병사, 마약, 동반자살 및 자살 시도, 우울증과 삼각관계까지. 자극적인 소재들을 지나치게 한 연극에 모아두었다고 느꼈다.

 

파멸에 이른 요한을 보면서 연극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고민해야 했는데, 그래서인지 극본가가 이 인물을 향해 가졌을 애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

 

분명 빛나는 청춘이었을 텐데, 그의 환한 순간들은 아주 잠시, 그것도 주미 혹은 가족과 함께일 때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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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요한(배우 류영빈)의 동생 바울(배우 신효근)은 형이 말한 대로 ‘유리별’에 행복했던 순간을 담아왔다며 한가득 유리병을 안긴다. 유리병이라는 단어를 유리별로 잘못 발음한 것에서 시작되어 “그래, 그 유리별에 행복을 저장해 봐!”라는 요한의 한마디를 기억하며 바울은 꾸준히 행복한 순간들을 유리병에 담아온 것이다. 산에서 다람쥐와 오래 마주했던 기억, 함께 갔던 여행, 어느 겨울날의 공기까지. 유리병의 뚜껑을 연 요한이 마주한 것은 전부 행복한 순간들뿐이다. 그는 곧바로 그 행복에 중독된다.

 

유리별은 꼭 마약같이 요한을 붙잡는다. 연인 주미(배우 문주하)가 ‘혹시 신종 마약이야?’라며 걱정할 정도이다. 바울은 끊임없이 ‘삶이 너무나 무거울 때, 유리별 속의 행복한 기억들이 삶을 가볍게 해줄 것’이라고 말하지만, 요한의 삶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요한에게는 떨쳐내지 못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 미숙(배우 문주하), 동생 바울과 함께 떠났던 바다 여행이 바로 그 기억이다. 바울의 유리별 속에는 여행이 마냥 행복한 기억으로 자리잡혀 있지만, 사실 그날의 여행은 미숙이 바울과 요한을 죽이고 본인도 자살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요한은 마냥 행복하게만 남아 있는 유리별 속 그날의 기억이 괴롭다. 바울에게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는 동생의 아름다운 추억을 자신이 망칠까 두려워한다.

 

결국 요한은 바울에게 어머니의 동반자살 시도를 털어놓는다. 그러나 그의 토로는 바울의 추억을 망치지도, 유리별을 망가뜨리지도 않는다. 바울은 이미 미숙에게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뒤였고, 어차피 유리별 속의 기억들은 바울의 기억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리별 프로젝트는 어머니와 동생의 합작품이었다.

 

가만히 곱씹어보니 나는 이 연극에서 요한과 바울보다는 미숙이 더 궁금했던 것 같다. 미숙은 편모 가정의 가장으로, 인생의 풍파를 거칠게 헤쳐 나간 인물이다. 사귀는 남성들은 매번 질이 나쁜 인간들이었고, 막내 아들에겐 지적 장애가 있었다. 술 혹은 마약에 중독되어 요한의 기억 내내 판단력이 흐린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도 그는 유리별 속 기억의 주인이다. 햇살을 받으며 다람쥐와 눈을 맞추었던 기억을 귀히 여길 줄 알고, 자살 여행이라 생각하며 갔던 바다의 아름다움에 감동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인생은 무거웠지만, 유리별에 저장해둔 기억만큼은 가볍고 따듯하다. 자살을 시도하던 요한이 유리별 속 기억의 주인을 알고 눈물을 흘릴 만큼.

 

그제야 바울이 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알 것만 같았다. “유리별을 모아야 해요, 저장을 해야 해요!” 기록은 내가 나를 돌아보았을 때만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나를 돌아보았을 때도 필요한 것이다. 내가 해둔 기록이 누군가의 삶을 가볍게 해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기억과 추억, 행복은 마치 모래처럼 내 손을 빠져나간다. 유리별 속의 순간들도 언젠간 유리병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게든 그 기억을 보관하려 애를 쓸 것이다.

 

삶이 너무나도 무거운 순간, 그 기억이 나를 가볍게 해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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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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