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견문을 성찰로 바꾸는 비일상의 힘, '나의 뉴욕 수업'

타국에서 진정한 나 자신을 마주하다
글 입력 2023.05.16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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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사람인지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알아야 한다. 나에 대한 질문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사색만으로는 결론 내릴 수 없다. 대신 바깥세상에서 밀려오는 끊임없는 자극이 필요하다. 내 심경의 내핵에 일어나는 아주 미세한 변화까지도 관찰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저마다 경험해온 세계의 경계선 안쪽을 맴돈다. 균일한 삶의 리듬이 체화된 채로, 늘 바라보는 풍경 안에서 익숙한 공기를 맡으며 살아간다.


물론 그런 일상마저도 나의 발자취가 완성한 세계다. 하지만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거쳐온 길들이 순수한 욕구만을 쫓은 결정은 아니었다. 갈림길 앞에서 발걸음을 망설일 때는 늘 현실적인 고민이 뒤따랐다. 때로는 합리적이라고 여겼던 행동이 실수였던 순간도 많다. 그래서 내가 굳힌 삶의 규칙에 스스로를 적응시켜야 하는 아이러니가 언제나 우리 일상에 함께한다. 그렇기에 매일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나의 진실된 갈망을 마주하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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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unsplash의 Claudio Schwarz

 

 

『나의 뉴욕 수업』(아트북스, 2023)은 그런 현실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의 내면 구석구석을 들여다본 이의 경험담이다. 미술사를 전공한 조선일보 문화부 출판팀장 곽아람의 뉴욕 기행문으로, 단일한 목적 안에서 노력과 성취를 반복하는 일상의 맥락을 끊어내고 스스로와 직면하게 된 이야기를 담았다. 직장생활 중에 1년간의 단기연수 기회를 얻게 된 그는 뉴욕으로 떠나며 티슈바인이 화폭에 담은 ‘창가의 괴테의 모습처럼 살겠다 다짐한다. 로마에 당도해 낯선 대도시에 매료된 괴테처럼 ‘세계의 서울’ 뉴욕에서 맞닥뜨릴 새로운 영감을 향해 모험적인 발걸음을 옮긴다.


 
“예전과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누구의 딸이라든가, 어느 회사 직원이라든가 하는 틀에서 벗어나 그저 나 자신으로, 자연인으로 살면서 세상과 맞붙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나를 더 잘 알게 되리라 믿었다.” pp.8-9
 


하지만 책의 부제처럼 저자가 점차 닮아간 인물은 다름아닌 에드워드 호퍼였다. 호퍼는 산업화를 겪은 20세기 미국 사회로부터 소외된 도시인의 고독을 다루었던 리얼리즘 화가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주로 직선적인  배경과 분리된 채 적막을 유지한다. 2미터에 육박하는 큰 키 때문에 주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으며 친구들 앞에서도 늘 과묵했다는 호퍼. 주류에서 소외된 채 느끼는 외로움이 그의 작품세계 그 자체가 되었고, 이는 이방에서의 저자의 삶 또한 관통하게 된다. 


저자의 진솔한 경험들은 이 책에서 호퍼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그림 속에 녹아든 채 독자 앞에 펼쳐진다. 뉴욕의 부동산에서 집을 얻으며 겪은 난항, 어떤 책임도 의무도 없이 화려한 도시에 내던져져 누린 경험들, 그리고 이방인으로서 맞닥뜨렸던 난감하기 그지없었던 순간들. 또 뉴욕대학교 수업이 진행됐던 메트로폴리탄 보관실에서 마주한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크리스티에서 수료한 아트 비즈니스 서퍼티컷 과정 가운데 느꼈던 단상들까지 짧다면 짧은 한 해를 꽉 채웠던 긴 경험들이 책 한 권에 빼곡하다. 미술 교양 서적과 에세이 사이 그 어딘가의 다단한 매력을 뿜어내며 자신의 경험담을 입체적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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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은 외국 생활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꿈꿔보는 도시다. 책의 제목만 봤을 때도 얼핏 낭만적인 해외살이가 그려진다. 모든 것이 국제적인 전 세계의 수도, 늘 화려한 불빛이 가득한 도시에서의 삶은 어떨까? 하지만 뭐든 현실은 녹록치 않다. 작가는 뉴욕의 살인적인 집세를 피해 30대 후반의 나이에 홈셰어링을 결정하게 된다. 안방과 작은방에 한 명씩, 칸막이 친 거실에는 두 명이 살아야 하는 집이지만 신용 없는 상태로 계약할 수 있으면서 ‘쥐’가 나오지 않는 최선의 선택지다. 


저자는 호퍼의 「아침해」(1952)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잠옷을 입은 여자가 무릎을 세우고 침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는 그림이다. 막 동튼 아침햇살은 텅 빈 벽 위를 비추고, 깔끔하지만 밋밋한 이불 위로 여자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여자는 침대 정가운데에 앉아 머리칼을 하나로 틀어올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사색한다. 창밖에도 직선적인 구조의 건물 일부만 보일 뿐 하늘에도 구름 한 점 없다. 짹짹거리는 새소리도, 사람들의 활기찬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적막한 아침이다.

 

 
“룸메이트들을 생각할 때면 그들과 공연장에 가고, 같이 밥을 먹고, 혹은 싸웠던 기억보다 커튼과 옷장으로 가로막힌 거실을 등지고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혼자 밥을 먹고 있던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우리는 넷이었지만 사실은 모두 혼자였다.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최소한의 온기만 유지한 채 각자의 방에서 눈을 뜨고 홀로 아침을 맞았다.” p.48
 


‘식구食口’란 말 그대로 끼니를 함께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식사 시간을 공유한다는 게 얼마나 친밀한 행위인지 일깨우는 단어다. 룸메이트는 같은 공간을 나눠 쓰고 큰 갈등 없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순 있어도 진짜 가족이 될 수는 없다. 누군가와 늘 같은 집에 살지만 어쩔 수 없는 타인이라는 벽이 공동생활을 더욱 외롭게 만든다. “혼자이면서 넷, 넷이면서 혼자인 풍경. 식사시간에 한 집에 있으면서도 자기만의 식탁을 차리던 그 기묘하게 쓸쓸한 풍경과 호퍼의 그림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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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저자는 그림 속 인물에서 자신의 심리를 발견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와 동일시하지 않고도 그림 너머의 세계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호퍼의 대표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을 보기 위해 시카고미술관으로 향한다. 깊은 밤, 불 켜진 간이식당의 유리창 너머를 먼발치에서 그린 작품이다. 왼편에는 등을 보인 채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성 한 명이, 그 오른편으로는 나란히 앉은 한 쌍의 남녀와 일하는 중인 바텐더가 보인다. 


감상자를 등진 남성은 당연하고 일행으로 보이는 남녀 역시 철저히 혼자다. 맞닿은 손끝이 무색하게도 저마다 어딘가를 멍하니 쳐다본 채 딴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야심한 새벽밤과 대조되는 눈 시린 인공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에 짙은 그늘을 드리운다. 그림의 주인공에게 향하는 고요한 스포트라이트다. 하지만 저자는 손님들이 아니라 바텐더의 일상에 주목한다. 

 

 

“등을 구부린 채 일하면서 손님에게 기계적으로 말을 건네는 그 옆모습이 고단하다. 저마다의 고독에 골몰한 손님들은 그의 외로움에는 무심하다. 잘 차려입은 고독이 아닌 날것의 외로움. 그는 계산을 치른 손님들이 떠나고 난 후에도 홀로 식당을 지켜야 하리라.” p.55

 


하지만 호퍼의 그림 속 장소는 현실의 포착보다는 내면의 정서를 감각적으로 표출하기 위한 연출에 가깝다. 화면 너머의 공기는 숨막힐 정도로 정적이다. “이 그림을 이야기하며 호퍼는 말했다. “아마도 무의식으로, 나는 대도시의 고독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무의식으로부터 고독한 공간을 끄집어내 화면에 재현하고, 무의식 속 외로운 인물들을 그 공간에 배치했다. (...) 그래서 그림 속 식당은 어디에든 있지만, 어디에도 없다.”(p.56) 저자는 실제로 방문해본 간이식당에서 음료를 시키고 왁자지껄하게 떠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호퍼풍의 고독’은 그의 그림 속에만 존재한다며 단락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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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뉴욕에서 이방인 딱지를 떼어낼 수 있었던 곳, 차이나타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언급한 「촙 수이」(1929) 속 중식당도 마찬가지다. 아시아인을 향한 눈총도, 백인들의 규칙도 없는 ‘아시아다움의 총체’ 차이나타운에서 저자는 해방감을 느꼈다고 전한다. 어디보다도 저렴한 값에 배불리 식사할 수 있고, 팁 문화도 없는 데다 계산대에서 줄도 서지 않는 이곳이 숨통을 틔워 주었다고 말이다. 

 

반면 호퍼의 그림 속 중식당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그림 오른편을 꽉 채우는 창문 너머로는 붉은색의 이국적인 간판이 보이고 모자를 쓴 여성은 일행을 마주본 채 창가에 앉아있다. 하지만 그녀의 팔은 텅 빈 식탁 밑에 얌전히 내려가 있다. 아직 음식이 나오지 않아서 그렇다기엔 얼굴표정마저도 차갑게 굳은 모습이다. 


“호퍼의 그림이 리얼리즘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나는 새삼스레 깨닫는다. (...) 호퍼의 「촙 수이」는 작품을 위해 화가가 머릿속에서 조합해 내놓은 하나의 무대였을 뿐, 생동감 넘치는 현실의 중식당은 아니었을 것이다.” (p.165) 「아침해」처럼 호퍼가 묘사한 고립감이 나의 외로움과 맞닿을 땐 감상에 젖어들다가도, 현실을 살다 보면 그의 그림은 아직 실제 세상과는 괴리가 있다. 그것을 깨닫는 찰나의 순간이 호퍼가 전하는 의외의 위로일까.

 

위 같은 차이나타운의 일화에서도 느껴지듯 저자는 스스로 완전한 뉴요커는 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뉴욕은 외지인이 워낙 많아 뜨내기들을 향한 눈초리가 유독 쌀쌀할 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들 말하던데, 본인은 뉴요커들의 다정한 면모를 끝끝내 알아보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말이다.


크리스티에서 아트비즈니스 교육을 받을 때도 스스로의 직업을 ‘컬렉터’라고 소개하는 귀부인들과 고가에 판매된 작품이 훌륭하다고 극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괴리를 느낀다. 저자는 예술의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그곳이 더없이 화려했지만 아름답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그러한 예술적인 사치를 오페라 극장에서는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었다. 잘 차려입은 복장으로 링컨센터에서 오페라를 즐길 때면, 단돈 35달러에 ‘지적 허영’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저자가 풀어놓는 경험담은 뉴욕 문화의 양극단을 쉴틈없이 오간다. 낯선 도시에서 움츠러드는 순간 가운데서도 뉴요커처럼 티타임을 즐기며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공연을 본다. 삭스 피프스 애비뉴를 거닐며 아이쇼핑을 즐기다가도, 할렘 가이드투어에 참여해 그곳의 역사와 마주한다. 이렇게 그가 1년 동안 기록한 모든 에피소드는 저자의 섬세한 관찰력에 힘입어 시간이 지난 지금도 마치 현재처럼 살아 숨쉰다. 또 미술 작품을 분석하듯 삶의 단면도 세밀하게 묘사하는 문장들이 진솔하다. 읽는 내내 책에 빠져들어 저자와 함께 긴장하고, 때로는 함께 감격했다.

 

*

 

그의 모험담은 비일상의 힘을 보여준다. 타지에서 쉴틈없이 새로운 사건들을 헤쳐 나가는 시간이 생채기를 입히기도 했겠지만, 상처가 아물면 무엇이든 더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흔히 해외 생활이 '견문을 넓혀준다'고 말하지만 저자의 『나의 뉴욕 수업』은 세상을 보는 시야가 아닌 내면을 보는 시야를 훈련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더 특별한 경험담이다. 해외살이를 해본 자들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살아오면서 눈물 흘렸던 순간들이 지금 어떤 기억으로 승화되었고, 지금의 나를 어떻게 변화시켰던가를 되새기게 된다. 

 

그러면서도 예술이 가진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전한다. 낯선 땅에서도 그의 마음을 치유해준 것은 미술관에 걸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이었다. 벽에 걸린 액자 너머로 호퍼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감상을 통해, 백 마디 말보다도 깊은 감정을 전달하는 회화의 힘을 우리에게도 나누어준다. 호퍼의 팬이든 뉴욕의 팬이든, 혹은 해외살이를 원하는 사람이든 푹 빠져들 수 있는 책임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진짜 독자는 '예술의 힘을 믿는 사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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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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