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모순'을 읽고 미술관을 보다 [도서/문학]

글 입력 2023.05.15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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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뚫었다. 몇 년 전부터 무언가 아주 마음에 들지 않거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 충동적으로 ‘뚫어버리겠어!’라고 마음먹은 위치에 정확히 뚫었다. 비는 오고 우산도 없는데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 대신 내 발걸음은 귀걸이 가게로 향했다. 충동적이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마음 먹었던 계획이다. 충동적인데 계획에 있었다니, 모순이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 많은 것들이 명확한 인과관계로 맺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서와 과정이, 심지어 결과까지 뒤죽박죽 섞인 모순 투성이다. 이런 생각은 얼마 전 양귀자의 장편 《모순》을 인상적으로 읽어서 더 세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필자가 공부하는 과목 중에 [미술관학]이라는 게 있다. ‘박물관학’, ‘뮤지올로지(Museology’라고도 하는데 박물관과 미술관의 존재와 활동에 관해 이론적·실제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과거에는 보존, 전시, 수집을 연구하는 뮤제오그라피(Museography)가 있었으나 20세기 들어 미술관 활동의 적극적인 연구가 진척되면서 미술관 활동의 목적과 성격, 기능을 연구하는 것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이 밖에도 컬렉션의 보급이나 시청각 수단에 대한 강연 세미나 심포지엄 등도 포괄하는 학문이라고 하는데 첫 학기라 아직 잘 모른다.

 

예술이 좋아서 전문적으로 공부하겠다고 마음 먹었더니 오히려 전시 보러 다닐 시간이 더 부족하다. 물론 전시가 아닌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예술을 접하고 있긴 하지만 이 또한 모순이다. 미술관을 자주 못 찾는 대신 미술관학 수업을 통해 미술관 자체에 대해 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가지는 모순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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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모순》 -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일찍이 가산을 탕진하고 집을 나간 아버지, 다 컸는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건달질을 일삼으며 꿈이 조폭 두목인 남동생, 어쩔 수 없이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인간이 된 엄마. 이런 가정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기는 솔직히 어렵다. 예상대로 주인공 안진진도 덩달아 별볼일 없는 25살 어른이 됐다. 그러나 안진진은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자기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을 명확히 아는 사람.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모든 것이 닮았고 모든 것을 함께하며 자라서 심지어 성적까지 비슷했음에도 종국에는 결혼을 기점으로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엄마와 이모를 대조해 보면서 안진진은 삶의 진리 비슷한 걸 깨닫게 된다. 행과 불행은 종잇장 같은 차이라고. ‘관상’이라는 것도 있는데 얼굴이 똑같이 생기면 인생도 똑같진 않더라도 최소한 비슷하게는 살아야 되는 것 아닌가.

 

꽃으로 장식된 견고한 가정에서 행복해 보이기만 했던 이모는 자신을 파괴하기 전에 안진진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 ‘모든 불행을 떠안은 것 같아 늘 불안해 보이던 엄마의 삶이 부러웠다’고 썼다. 모든 사람에게 아무 걱정이 없을 것 같았던 이모의 삶이 이모에게는 지리멸렬한 불행이었던 것처럼 누가 봐도 우여곡절 투성이에 즐거움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어머니의 삶이 이모에겐 행복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 한다.”

 

 

일란성 쌍둥이인 엄마와 이모의 인생은 모순이다.

 

 

 

세속과 종교


 

《미술관》 - 미술관을 인생의 다양한 관점으로 비유해 설명하면 세속과 종교라는 측면도 있다. 세속적 관점에서 미술관은 예술, 문화의 보존과 전파를 위한 장소다. 예술작품들을 수집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전시를 통해 인류문화와 예술사의 발전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게 목적이다. 예술은 인간이 가진 창조적 능력을 표현하고 문화는 사회 전반의 생활방식, 가치, 생각 등을 포함하는데 이런 예술과 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게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목적이다.

 

다음은 종교적 측면. 미술관은 탄생 초기기부터 신성성을 배제하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미술관은 종교와 예술, 그리고 정신적인 경험과 예술작품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적인 미술관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나 신도들의 삶을 표현한 작품들이 전시된다. 이런 종교적인 미술관은 예술작품을 통해 종교적 경험을 확장하고 깊게 하여 신앙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설립하기도 한다.

 

요약하면 미술관은 세속적인 면에서 예술과 문화의 보존과 전파를, 종교적인 면에서는 예술과 신성성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러나 초기 미술관의 명확했던 구분이 현재는 그 경계가 희미해지면서 종교적 미술관이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반면 세속적인 미술관들은 자유로운 종교적 경험을 제공하는 경향을 띤다. 어찌됐건 미술관은 속성상 종교적 성격을 배제하기 어렵지만 세속으로부터 멀어지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모순이다.

 

 

 

사랑


 

《모순》 - 주인공 안진진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 나영규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매사에 거칠 것 없는 바르고 계획적인 현실주의자다. 데이트할 때도 먹는 것, 디저트, 동선과 영화 보는 시간 등 사소한 것 하나까지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는 철두철미한 성격 탓에 어떻게 보면 약간 인간미 없어 보이지만 주인공의 불행한 가정사를 다 알면서 그것까지 포용하면서 안진진을 사랑하고 있다. 안진진의 인생을 불편함 없이 안정적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남자다.

 

반면 로멘티스트이자 낭만주의자인 김장우는 야생화를 전문으로 찍는 사진작가다. 조실부모하고 유일한 피붙이인 형은 부모이자 친구이며 동시에 김장우 자신이기도 하다. 김장우는 나영규가 주는 현실적 안정감은 없다. 오히려 안진진이 노력해서 끌고 가야 할 것 같은 안쓰러움이 더 크다. 위태하고 불안하지만 안진진과 성격적으로 비슷하고 정서적으로 교감하는 부분이 많다. 김장우와 있으면 왠지 마음이 편하다.

 

언뜻 보면 〈이수일과 심순애〉에서처럼 ‘돈이냐, 사랑이냐’를 두고 갈등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안진진은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 중이다. 그걸 보여주는 주인공의 대사가 있다. 안진진은 김장우와 둘이 걸어가다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에게 기대어 숲향 그윽한 오솔길을 걸었다. 사실을 말하면 나도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 중이었다. 이것이 사랑인가? 서로가 서로에게 한 쪽 어깨를 빌려주고 기대는 것. 이것이 사랑일까?”
 

 

그에 대해 작가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해 준다.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신호등의 빨간불 같은 모순이다.

 

 

 

개인과 공공


 

《미술관》 - 스스로에 대한 사랑과 공공을 위하는 마음이 함께 드러나는 곳이 바로 미술관이다. 18세기 근대의 박물관들은 국가의 지배적 면모를 강화하기 위해 세워졌다. 왕과 귀족들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그들의 소유물과 유산, 보물들을 점점 더 많이 모으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을 공개하며 과시하기에 이른다. 대중에게 소장품들을 소개하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미술관은 점점 더 시민을 위한 공공기관으로서의 기능을 갖추게 된다. 급기야 ‘시민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는 이전에는 없던 개념도 만들어낸다. 이런 사상에서 출발해 미술관은 공개적인 전시의 형태를 만들어내면서 교육적 기능을 갖게 된다.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욕망, 과시하고 싶은 욕심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배경과 대중의 예술적 체험 확대, 시민교육 같은 공공적 기능이 혼재해 있는 것도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모순이다.

 

시야를 좁혀 한국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한국의 재벌기업(가문)에서 기업경영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가족(주로 배우자나 자녀인 경우가 많다)들은 미술재단이나 기업이 세운 미술관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 취미에서 시작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세금혜택, 고급 문화를 향유한다는 자기만족, 자신들의 사회적 권위와 지위를 유지하고 증명하는 수단, 문화예술계의 네트워크 형성 등 지극히 사적인 욕망과 경제적 여유가 혼합된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공공적이고,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로 나타나는 건 아이러니다. 일단 기업이 후원하는 미술관이나 미술재단은 문화예술의 보급과 발전에 기여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핫한 마우리치오 카텔란전을 삼성의 리움미술관 수준이 아니라면 보통 사람들이 무료 또는 1~2만원 정도에 한국에서 보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결국 사적(私的)인 욕망에서 출발했지만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문화적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들이 소유한 기업이나 자신들 가족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은 것은 모순이지만 정교하게 계획하고 설계된 모순이다.

 

이런 내용을 소개할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게 환상적인 건축물을 자랑하는 폴 게티 미술관이다. 폴 게티(J.Paul Getty, 1892~1976)는 실제로 귀족적인 우아함, 화려한 소비습관, 노블리스 오블리제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늘 칭찬에 굶주렸고 힘 있는 사람에겐 아부하면서 교양 있는 지식인으로 보이기를 원했지만 안타깝게도 수전노처럼 인색하고 자신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가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후 20년 동안 게티미술관 큐레이터들은 게티가 생전에 꺼려했던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고가의 작품들까지 구입하면서 질적, 양적으로 컬렉션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졌다. 이후 게티미술관은 가이드 투어, 풍부한 해설문, 비디오 장치를 갖춘 안내소 등 다양한 교육적 디바이스를 미술관에 도입한 대표적인 미술관으로 사회적 순기능을 다하고 있으니 이런 모순이 또 있을까. 게티가 살아 돌아온다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선택


 

결국 선택의 문제다. 선택도 모순이다. 시대를 풍미한 1세대 아이돌스타 이효리가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유명하지만 조용히 살고 싶다. 조용히 살지만 잊혀지는 건 싫다” 배우 유승수도 TV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 나와 모순을 멋지게 얘기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고 돈은 많았으면 좋겠다.” 이것 말고도 누구나 공감하는 생활 속 모순도 있다.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싶지만 살찌는 건 싫다” “아이 보는 건 너무 힘들지만 아이는 생각만 해도 기쁘고 행복해진다” 같은.

 

소설 《모순》에서도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던 주인공 안진진은 결혼할 상대를 아직 ‘선택’하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결혼을 택한 것에 대해서 제발 부탁이니 누구도 비난하지 말기를 바란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에 할 수 있는 결단이 결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처럼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혼 대신 공부를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 대신 자기만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으며 결혼을 비웃으며 결혼할 나이에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여자도 분명 있다. 나라고 해서 그 모든 길들에 대해 충분히 사색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나인 것이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살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발버둥 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간다.’ 안진진과 동갑인 이모의 딸 주리는 굴곡 없이 살았으니까 인생을 깊게 볼 기회가 없었다. 반면 굴곡진 삶을 살고 있는 안진진은 인생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눈을 키웠다. 물론 자기가 원하지는 않았겠지만.

 

안진진은 행복과 불행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기로 결정한다. 인생은 원인과 결과로 운명지워지기보다 우연과 선택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안진진은 처음으로 자신의 새로운 선을 그려나가기로 결정한다. 처음 자신의 온 생을 걸고 인생을 유심히 관찰하며 살겠다는 사유로부터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몸소 체험하겠다는 실천으로 바뀐 것이다.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은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상반된 개념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인생의 모순을 주인공 안진진은 관조하며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둘은 결국 다르지 않으며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달라질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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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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