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부의 얼굴들 - 1 [여행]

글 입력 2023.05.13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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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하나.


새벽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했을 때 감돌던 설렘은 피로에 짓눌려 눅눅해지고 있었다. 좁은 좌석에서 옅은 잠을 자서인지 몸이 무거웠다. 승객들이 통로를 따라 바쁜 걸음을 옮겼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니 대부분 한국인인 여행객들이 입국 심사를 기다리며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그 줄의 길이는 좀처럼 줄지 않았다. 비행기 탑승 인원을 사전에 체크해서 준비하면 안 되나. 쟤들은 너무 느긋한 거 아니야. 글쎄 우리나라가 너무 빠른 거 아닐까. 무심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여권 도장을 찍고 있는 공항 직원들을 넘겨보는 이쪽에서 그런 대화가 자주 들려왔다. 거의 마지막 순서로 입국 심사를 통과했을 때는 착륙한 지 한 시간이 훌쩍 넘게 지나 있었다.

 

공항을 나오자 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공기가 피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숨을 턱 막는 열기에 얇은 린넨 셔츠가 순식간에 젖어가고 있었다. 떼꾼한 얼굴로 모자를 눌러쓴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게 누군가가 빠르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할 한국인 가이드였다. 여행을 계획하면서 중요했던 건 시간. 짧은 시간을 알차게 누리기 위해 가이드가 동행하는 투어를 선택했다.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여행을 가장 편하고 안전하게 만끽하기 위해 조금 무리한 지출을 감내하고 선택한 여행 방식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입국 심사를 오래 기다려서.”

 

“여기가 원래 그래요. 늦어졌으니 일단 빨리 움직여야 할 거 같아요.”

 

간단하고 짧은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곧바로 화장실에서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땀에 젖은 셔츠를 화장실 옷걸이에 걸어두고, 끈적한 몸 위에 수영복을 입었다. 수영복이 껌처럼 늘어나며 자꾸만 몸에 달라붙었고, 나는 좁은 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채 분투하며 땀을 조금 더 흘렸다.

 

갈아입은 옷을 대강 둘둘 말아 한 손에 들고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가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내 캐리어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나보다 몇 걸음 앞장서 주차장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가이드는 말했다.

 

“서둘러 출발해야 해요. 사람이 몰리면 엄청 기다려야 할 거예요.”

 

가이드의 뒤를 바짝 따르며 나는 조금 전 내가 머물렀던 장소를 뒤돌아봤다. 이 나라에서 내 최초의 목적지는 화장실. 저 좁고 눅눅한 장소에서 시작된 여행이 어쩐지 박진감 넘칠 거라고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타국의 낯섦, 그 훅훅한 감각을 음미할 찰나도 없이 한국의 속도로 시작된 여행이었다.

 

편안한 반팔에 반바지 차림을 한 한인 가이드는 세부에 이주한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최근 몇 년은 코로나19 때문에 한국에 있었다가 얼마 전 다시 돌아왔다고 했다. 이미 피부가 너무 검게 그을려 그동안엔 선크림도 잘 안 발랐다고, 그런데 한국에 가보니 자기 얼굴이 너무 엉망으로 보여서 요즘 얼굴에는 열심히 바른다고 했다.

 

이곳에서 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둘 있다고 했고, 두 아이 모두 수영을 기가 막히게 잘한다고 했다. 남편이 곧 세부에 다시 들어올 예정이며, 남편이 오면 아이들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지만 월세가 너무 비싸서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그녀는 카메라를 미처 준비하지 못한 우리에게 자신의 수중촬영용 카메라를 선뜻 건네줬다. 주변에서 사진 잘 찍는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고, 이번 여행 동안 사진을 많이 찍어주겠다고 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녀는 유창하지 않은 언어로 현지인들과 정확한 소통을 했다. 우리를 목적지로 안내했고, 입장료를 결제했고, 음식과 음료를 주문했다. 물놀이를 마치면 크고 두꺼운 수건을 덮어줬고, 식사를 마치면 음식이 입에 맞았는지 물었다. 식당에 함께 앉아 있을 때면 우리가 권하는 음식에 결코 손대지 않았고, 너무 양이 많아 남길 거 같다고 떼를 쓰면 못이기는 척 포크를 들었다. 여기는 너무 덥다 말하면서도 그녀는 다시 세부에 돌아와서 참 좋다고 했다. 한국에 살 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그녀는 검게 탄 얼굴로 햇살처럼 환하게 자주 웃었다.

 

수많은 인파 속을 분주히 오가며 나보다 나의 여행을 위해 애써줄 사람이 있다는 것. 순수하게 무더운 이곳을 사랑하는 사람과 이 땅 곳곳을 함께 걷는다는 것. 아마도 이번 여행 내내 이토록 무책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거라고 예감하면서, 그녀가 이곳을 사랑하는 만큼 나도 이곳을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도 이곳에 오게 되어 참 좋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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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를 떠난 후 며칠 뒤 그녀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오랜만에 파란 하늘입니다. 오늘도 파이팅!’

 

세부의 파랗고 맑은 하늘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한국은 오늘 비가 내리고 쌀쌀합니다. 이런 날이면 세부가 그리워질 거예요.’

 

그녀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고, 나는 이런 그리움이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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