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허기’를 재료로 완성한 ‘욕망’이라는 요리 – 헝거 [영화]

허기를 채우는 요리사와 욕망을 요리하는 셰프
글 입력 2023.05.10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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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are what you eat”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이는 1826년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미식가인 ‘브리야 사바랭’이 『미식예찬』이라는 책에서 했던 말을, 1920년대 미국의 영양학자 ‘빅터 린드라’가 조금 바꾸어 말한 것이다. 브리야 사바랭은 먹는 음식에 따라 사람의 품격이 달라진다는 뜻으로, 빅터 린드라는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몸을 구성하므로 영양가 있는 건강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의미로 이 말을 사용했다.


그리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공개된, 시띠시리 몽꼴시리 감독의 태국 영화 <헝거(hunger, 2023)>는 이 말을 또 다른 의미로 읽을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음식은 우리가 (사회에서) 어디에 서 있는지를 나타낸다’는 <헝거>의 또 다른 해석은, 최근 물가 상승과 함께 치솟은 식품비가 각기 다른 계층에 미친 영향의 정도를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인간의 그것과는 의미의 결이 조금 다르지만, 생태계를 ‘먹이사슬’로 이해하고 분석하려는 시도만 봐도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 ‘무엇을 먹는지’는 그들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와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허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의 근원이며, 이를 채우는 과정은 그들이 서 있는 위치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영화의 제목인 ‘hunger’라는 단어가 ‘굶주림’과 ‘배고픔’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무언가에 대한 ‘갈망’과 ‘욕망’으로 확장된 의미를 가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영화 <헝거>는 굶주림을 넘어 인간의 욕망을 채우고, 심지어 그것을 요리해내는 셰프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꾸미기]헝거_원어포스터.jpg

 

 

 

자본과 욕망은 서로를 따라 흐른다 : 허기를 채우는 요리사와 욕망을 요리하는 셰프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에서 자본과 인간의 욕망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자본은 인간의 욕망을 더 쉽고 빠르게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흐르면서도, 때때로 인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욕망을 포착하고 이를 충족시키는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욕망을 인간의 눈앞으로 끌어낸다. 또 한편으로는 자본을 좇으려는 인간들의 욕망이 어김없이 자본을 따라 모이기도 한다. 이렇게 자본과 욕망은 서로를 향해 흐른다. 


‘허기’를 채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역시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기본적으로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긴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그 너머의 것을 향한다. 어떤 것들은 그것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를 실제로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더 특별하고 새로운 것’을 먹음으로써 ‘더 특별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음식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더욱 자극한다.


영화 <헝거> 속 유명 셰프인 ‘폴’ 셰프는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며 이를 통해 자신과 자신이 만든 음식의 가치를 높여왔다. 그는 이를 드러내듯 자신의 레스토랑 이름을 ‘헝거(HUNGER)’로 짓고 많은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욕망하는 ‘그 무엇’을 ‘요리’의 형태로 만들어 그들 앞에 펼쳐 놓는다.

 

 

[꾸미기]헝거_스틸컷_요리.jpg

 

 

"헝거는 뭔가에 허기진 이들을 위해 요리합니다.

허기가 원시적인 본능을 깨울 테니까요.

헝거는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어 드립니다.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나요? 아니면 좀 더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나요?"

 


레스토랑 ‘헝거’를 소개하는 영상에는 이런 나레이션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개대로 폴 셰프의 요리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날 것의 욕망 그 자체에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끌어낸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점점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재료들을 손질하는 폴 셰프의 모습과 광란의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속 대비되는 종업원과 요리사들의 모습 등은, 인간과 인간의 ‘먹이’가 되는 동물들의 위치와 사람들 사이의 계급적 위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를 통해 영화는 ‘먹는 행위’에 내포된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또한 이를 경유하여 인간의 욕망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이러한 질문들 앞에 기꺼이 뛰어들어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주인공 ‘오이’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사회 안에서 서로의 욕망이 흐르고 고이고 또 때로는 불길처럼 번져가는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해 사회에 첫발을 내민 또래들 사이에서 ‘오이’는 가업을 이어 길거리 음식점 요리사로 일하는 것을 선택한다. 그러던 중 유명 레스토랑 ‘헝거’에서 일하는 ‘톤’으로부터 갑작스럽게 ‘헝거’의 요리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볼 것을 제안받고, ‘오이’는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해내며 ‘헝거’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시험이 끝나고 폴 셰프와 마주한 ‘오이’는 ‘왜 여기서 일하고 싶냐’는 질문에 ‘헝거’의 소개 영상 속 나왔던 문구처럼 ‘특별해지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처음 ‘헝거’의 소개 영상을 봤던 장면에서 ‘오이’의 눈 속에 지펴진 욕망의 불씨는 ‘오이’가 셰프로 성장하며 점점 ‘불꽃’으로 피어난다. 하지만 영화가 계속 진행되며 폴 셰프의 음식이 가진 ‘특별함’과 ‘오이’가 원했던 ‘특별함’이 가진 여러 겹의 이면이 드러나게 된다. 

 

 

[꾸미기]헝거_스틸컷_오이와폴.jpg

 

 

폴 셰프의 음식이 갖는 특별함은 ‘허기를 불러 일으키는 것’에 있었다. 그는 가난한 어촌민들에게 높은 값을 주고 가장 좋은 식재료를 사와서 사용했고 실제로 화려한 요리 솜씨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그의 음식이 가진 특별함은 그것에 지불된 값과 그로 인해 폴 셰프가 얻은 명성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걸맞은 가격을 지불한다면 윤리와 법조차 뛰어넘어 음식을 제공했고, 오히려 이러한 점은 그의 요리를 사람들이 더욱 욕망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를 통해 쌓은 명성은 싸구려 양념 스프와 맹물도 고급스러운 에피타이저로 변신시키는 ‘믿음’을 만든다.


 

"사랑이 담긴 요리라고? 가난에서 못 벗어나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포장하지.

내가 보기엔 사랑이 담긴 요리란 건 존재하지 않아.

셰프가 되려면 사랑보다 강력한 동인이 필요해."

"그럼 셰프님의 동인은 뭐였어요?"

"캐비아 한 병. 내 어머니는 가사 관리사였어. 난 부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봤지.

궁금해지더군. 그 사람들이 쓰던 걸 왜 우린 못 쓰는 걸까?

그 사람들이 먹던 걸 왜 우린 못 먹는 걸까? (...)

네가 먹는 음식은 네 사회적 지위를 뜻해. 사랑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은 허기를 달래려고 먹지.

하지만 음식보다 더 많은 걸 살 능력이 있으면...허기는 사라지지가 않아.

인정받고 싶은 허기, 특별한 걸 갖고픈 허기, 특별한 걸 경험하고픈 허기,

그 빌어먹을 캐비아 때문에 깨달았지. 셰프가 되고 싶다는 걸.

부자들이 무릎을 꿇고 요리해 달라고 간청하는 셰프.

나한테 허기를 느끼게 만들고 싶었다." 

 

/

 

"이게 내 마지막 가르침이다. 네 음식이 아무리 맛있고 화려하고 창의적인들...

믿음을 절대로 이길 순 없어. 저 인간들은 날 믿어줬지.

애초에 내 손을 들어준거라고. 저들은 나한테 허기를 느끼거든.“

 


폴 셰프 밑에서 계급의 사다리를 선명하게 경험하며 셰프로 성장하던 ‘오이’는 결국 고위 관료들을 위해 불법으로 사냥한 동물로 요리를 한 폴 셰프와 맞서며 자신만의 레스토랑을 차린다. 하지만 폴 셰프를 떠난 ‘오이’는 오히려 폴 셰프가 얻고 잃었던 것들을 똑같이 경험하며 그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넌 어때? 이제 특별한 사람이 됐어? 재밌나? 무섭지?

이제부터... 네게서 떠나지 않을 생각은 이거야.

'언제 난 추락하게 될까?' '내가 너무 늙었나?' '난 이제 과거형인가?'

뭘 잃었는지도 모르고 성공에만 집착하게 될거야.

당장 지금만 해도 넌 톤을 잃었잖아. 아직 정신 놓지마. 이건 시작일 뿐이니까.

앞으로 더 많은 걸 잃게 될거야. 이게 바로 특별함이 주는 쓴맛이다”

 


폴 셰프와 같은 파티 자리에 초대되어 그들만의 대결을 펼치게 된 ‘오이’는 결국 선택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을 ‘허기지게 만드는’ 요리가 아닌, 사람들의 ‘허기를 채우는’ 요리로 승부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요리를 통해 모두가 사랑받고 사랑할 누군가가 있음에 안정을 얻는 ‘평범한 사람들’임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폴 셰프는 자신의 요리가 가진 ‘특별함’을 더욱 노골적으로 활용하며 사람들의 욕망을 이끌어낸다. 


만약 우리라면 허기를 채우는 요리사와 더욱 욕망하게(허기지게) 만드는 요리사의 요리 중 누구의 요리를 선택하게 될까? 물론 이 둘 중에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는 것 역시 모두에게 가능한 것은 아니며 그 사이에는 여러 겹의 다른 위치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욕망이 생기고 확장되는 과정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겹의 차이와 위계를 인식하면서도, 우리가 가진 욕망이 향하는 곳을 제대로 다시 살펴보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이다.

 

 

[꾸미기]헝거_스틸컷_대표이미지후보.jpg

 

 

물론 자본주의 아래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성장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욕망을 무조건 절제하거나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마찬가지로 욕망과 자본이 긴밀하게 관계하며 서로를 향해 흐르는 것 역시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새로운 자극이 너무 쉽게 생겨나고, 인간의 욕망이 수없이 분절되어 계산되는 지금의 사회 안에서 그저 욕망을 위한 욕망을 좇는다면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는 허기와 욕망을 위해 더욱 자극적인 것만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욕망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서는 또 실체 없이 과하게 부풀어 버린 욕망에 자신과 타인을 다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의 허기와 욕망을 제대로 인지하고 점검해야 한다. ‘밑 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붓는 것이 아니라 독을 제대로 살피고 수리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허기를 채울 수 있는 ‘보통의’ 요리일까, 지속적으로 더 큰 욕망을 이끌어내는 ‘특별한’ 요리일까? 영화 <헝거>가 그리는 두 요리사의 대결과 결국 이 대결 뒤에 자리한 자본의 힘을 통과해 우리가 ‘더 큰 욕망’보다는 ‘영양가 있는 욕망’에 대해 함께 더 고민하고 이야기해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효중 컬쳐리스트 태그.jpg

 

 

[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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