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에 대한 단상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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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라는 말의 의미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때 기독교 캠프에서다.
교회에 가본 적도 없던 내가 은사님을 따라 기독교 캠프를 갔는데, 초등학생의 머리로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하느님에대한 이야기부터 믿음에 관한 이야기까지 많은 것을 물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문답이 있다.
왜 하느님을 믿느냐는 질문에 은사님은 그저 믿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셨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가니까, 혹은 하느님이 나를 만드셨으니까 와 같은 대답을 예상했는데, 은사님의 답은 너무 모호한 것만 같았다.
당시에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등학생쯤 되니 그 의미를 얼핏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수단과 목적 개념을 알고 나니 이해가 된 것이다. 천국을 가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다면 그건 천국이 목적이고 하느님은 수단이 될 것이다. 또한 하느님이 나를 만드셨으니까 믿는다면 그건 은혜 갚기가 목적이고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수단이 될 뿐일 것이다.
오직 믿기 때문에 믿는다는 이유만이 하느님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이 은사님의 대답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믿음은 일종의 사랑과 같다. 하느님을 진정한 의미에서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혀 수단이 아닌 오직 목적으로만 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힘들다. 근거나 이유 없이 어떻게 목적이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목적은 무슨 기준으로 발생한다는 말인가? 나는 이러한 목적을 운명으로 설명한다.
이를테면 사랑은 반드시 운명적이다. 사랑은 이유나 근거가 없다. 우리는 누군가와 사귀거나 헤어질 수 있다. 혹은 애프터 신청을 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사랑을 하거나 안하는 결정을 할 수는 없다. 우린 이미 사랑하게 되고 사랑한다고 말할 뿐이지, 사랑하기로 결정하고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없다. 그렇기때문에 사랑은 의지적이지 않고 운명적이다.
사랑하려고 노력을 해봐도 사랑할 수 없거나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런 일에서 사랑의 성질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은 오해받는 일이 많다. 많은 사람이 사랑의 이유를 묻곤 한다. 그건 대답이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외모, 성격, 배경 등 어떤 이유라도 그게 사랑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대답할 수 있다면 그 이유가 사라졌을 때 사랑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오직 다음과 같이 성립할 수 있다. '나는 너를 사랑하며, 그 이유는 오직 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수단으로 대해지는 것을 싫어한다. 즉, 목적으로 대해주길 원한다. 그러니까, 사랑받기를 원한다. 필요할 때만 연락하는 친구, 보험 가입하라고 연락하는 친구, 감정 쓰레기통 취급하는 친구에 대한 거부감은 수단으로 대해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반대로 나를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나를 사랑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무조건적으로 나를 지지해 주는 존재는 분명 나를 사랑하는 것일 테다. 어떤 사랑은 숭고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사랑은 평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랑이 소중하다는 점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다.
사랑은 마치 재능과 같다. 신이 주신 선물과 비슷한 면이 있다. 아름다운 외모, 고결한 성품, 뛰어난 체력, 높은 지성, 넓은 상상력은 본인이 선택해서 갖게 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런 재능들에 내 의지는 없다. 내가 가진 것 중 많은 것들이 나의 노력이나 선택으로 손에 넣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 또한 주어지는 것에 가깝다.
자신의 재능이 기쁘듯 사랑 또한 기쁜것이다.
[김윤수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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