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碍 12

사랑스러움1, 아름다움에 대하여
글 입력 2023.05.0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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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거대한 사랑을 안고 태어난 사람, 내가 아는 그 중에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어 그는 봄볕보다 찬란하되, 슬픔엔 봄비처럼 섬세하게 떨었다. 그 이 또한 커다란 사랑으로 인하여 누구보다 상처에 잦은 사람일 테지, 실은 똑같은 것도 보다 커다랗게 사랑하는 만큼, 똑같은 것에 보다 커다랗게 슬퍼하는 것이었을 테다. 그러나 또 내가 아는 그 중에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 있어, 그는 가을밤보다 울적했다. 나는 그대와 더불어 가을의 밤 가운데를 건넌다. 그러나 내가 진실처럼 믿고 이 마음에 품어 오래 간직하는 것, 사랑스러움의 여부를 막론하여 끝내 우리는 공활하리다. 그리하여 온갖 비아냥과 몰이해와 심지어는 곡해를 산들 더 세게 거머쥐는 것은, 끝에 비로소 우리는 무궁하고 공활하리라. 다름 아니라 우리의 막대한 사랑이 그렇게 만드는 것, 우리는 담아내는 그릇이다. 우리가 쉬이 안고 담아내질 못하여 넘쳐흐르는 것, 그러나 영영 버려낼 수 없는 것으로 끊임없이 용천하는 샘물이 여기 있다.

 

... 그대는 그 얼만한 체념과 염세로도 도망가지 못한다, 마찬가지 그 얼만한 아픔으로도 그대의 이 사랑으로부터. 그러니 우리는 원든 원치 않든 빚어져야 한다, 차라리 더욱 넓은 질그릇으로 도야되어야만 한다. 그러니 우리는 끝내 공활하리라, 마침내 이 마음, 사랑과 그로 인하는 온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낼만큼 장대해진 가슴을 안고서. 그대의 가슴 속, 부패하는 사랑이 그대를 끊임없이 더욱 장대함으로 떠밀 것이고, 그대의 미래가 손짓하리라. 그대가 채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미 오래도록 그대를 인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애 無碍 11

 


사랑스러움... 사랑스러움... 이 말을 하기 전에 얼마나 망설이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너무 다정하거든, 상처받을 자와 소리쳐 분노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 환영들이 손끝을 오래 꼭 붙잡는다. 사랑스러움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한편 사랑스럽지 않은 것들에 대해 우회적으로 가리키는 일이 되어버리곤 하기에… 신중하지 않은 사람이 사랑스러움에 대해 말하는 동안 다른 반 편을 소외시켜버리는 것을 그대도 아마 곧잘 반추하겠지. 그러나 신중한 사람들의 말조차도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테니, 그 얼만 한 미사여구와 한정 어구들을 늘여 붙인다 하더라도, 이것은 차라리 말과 인식이 가지는 서글픔의 하나이라. 하물며 곧 있어 나는 그것, 사랑스럽지 않은 것들을 올올이 또 가림 없이 가리킬 터라 크나큰 두려움으로 말간 백지를 두어보았다. 


아마 나는 영영, 그대들에게 아픔이겠지. 그 인식의 행로를 반쯤은 알 것 같다. 다만 잃어버린 것일 뿐이다, 나는. 그대들은 너무 다정해, 그래서 매몰차지를 못하지, 자타를 막론한 온 아픔에 있어. 그대들은 아프고 나약한 자에게 있어서는 감싸 안는 담요 같다. 긍휼한 추위를 떨던 그에게 오로지 필요한 것인. 그렇다면 나는 그대에게 바람이다. 나는 그대에게 몰아치는 듯이 다가가 추위를 알려주려 한다. 나는 몸서리 치는 그대가 그것을 잊지 않도록 감돌며 추위를 말한다. 그대가 담요를 꼭 붙잡아 깊이 감돌려고만 할수록, 집요하게 파고들어 말한다. 그대를 마침내 북풍과 동토로부터 멀게끔, 그대가 쏘아나가게끔 나는 등을 떠미는 바람이고 아픔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나는 그 말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마치 그대가 바라는 큰 사랑이 언젠가 그대에게, 아무런 대가도 준비도 없이 내려와 줄 것만 같았거든. 나는 어쩌면, 너무 오래 기다림을 지나 보냈기에. 그러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받는 사랑 없이는 부패해가기에, 사랑받음을 위하게끔 태어난 사람. 사랑받음,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 아니라 본질이라고 아프게 말해줘, 나는 차라리 잠깐 아프고 말지언정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러나 사랑이 그대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대가 사랑을 위한다. 하니 응달에 태어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묻는다 태양을 바라기 위해 태어난 꽃은 한 줌 볕도 없이 허적이는 때에 어찌해야 좋으냐 하고. 나아가야지, 뿌리를 돌이켜서라도 추위로부터 나아가야만 하리,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구할 것은 오직 그 방법뿐. 그게 그다지 아픔이고 어려움이었는데. 


*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나, 함부로 일컬어보지 못할 그것. 나는 사랑스러움에 대해 논하려고 한다. 사랑스러움, 뭇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훔치는 모든 것. 네 사랑을 사는 모든 감미로움. 내가 그것을 한 가지 빠트림도 없이 모조리 일컬어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주관과 객관의 영역을 넘나드는 모호함이므로. 어떤 이에게는 사랑스러움인 것이, 또 어떤 이에게는 전혀 반대의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므로. 그러나 사랑스러움, 감히 그것을 논해보고자 한다. 


그대는 사랑스러움에 대해 생각할 적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존재가 무엇인가. 나는 개와 고양이, 포메라니안과 비숑과 사모예드, 페르시안과 스코티시 폴드를 떠올리기도 하고 1-3세의 영유아와 이제 막 뛰기 시작하는 아이들을 떠올리기도 하며, 싱그러운 미소를 담은 누군가의 보조개와 부드러운 미소를 담은 누군가의 눈썹을 생각한다. 또는 거리를 거닐며, 그리고 지금과 같이 광장과 테라스에 앉아 글을 쓰는 척 사람을 구경하면서도 은연중에 나는 사랑스러움에 대해 생각한다. 내 눈을 잡아당기는 모든 것에 대해 곱씹어 생각한다. 아주 잘 손질된 포마드 헤어나 훌륭한 솜씨로 마무리된 가르마 펌의 앞머리, 훤칠하게 뻗은 슬랙스의 시원시원함, 매끈한 윤택을 지니는 셔츠와 훌륭한 핏감을 자랑하는 블레이저 재킷과 탄탄한 다부짐에 대해서도, 또 자연스레 층진 단발머리의 똑부러짐과 우아하게 구부러지는 웨이브펌의 틈틈으로 품기는 어떤 넉넉함과 고풍스러움, 아주 매끈한 융단처럼 뻗어있는 까만 생머리, 고급스러운 패턴을 띠는 원피스, 보드라운 질감의 블라우스와 포근함의 니트, 꼿꼿한 주름을 간직하는 테니스 스커트, 구매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잘 보존된 청바지의 탄력감, 산들지는 롱스커트의 끝단으로 흐르는 어떤 아련함, 카멜 색감이 퍽 어울리는 캐시미어 코트 자락에 맺히는 그리움과 귀한 패턴의 귀걸이와 목걸이 장신구들, 고급스러운 시계가 뽐내는 광택 등 이것은 의복과 치레에 대함이다. 나로 하여금 예쁜 옷을 사고 싶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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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자신감에 찬 걸음걸이, 은은하니 타오르는 눈매, 피하지 않는 눈동자의 자신감에는 어딘가 무해함, 그칠 줄 모를 것만 같은 시원시원한 웃음, 유쾌함의 예감을 감추고 있는듯한 입가, 다정하고도 서글서글한 미간. 아침 햇살이 사선으로 비추일 때, 반대쪽으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우뚝한 콧대와 움푹 들어간 안와의 깊은 쪽 동굴 같은 신비로움. 또 어떤 저녁을 동그마니 지켜줄 것 같이 넉넉하고도 끊임 없이 은은한 미소,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소년의 흔적들, 보조개, 날렵한 턱선, 웃을 때 스러지는 초승달, 아무리 나열해 일컬어도 그 요체에 닿아볼 수는 없을 것만 같다.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인 그 깊은 곳 본질에는. 


또 도도한 듯 새초롬한 표정을 한 옆모습으로 오똑하니 솟진 콧날, 그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하리라는 듯 담뿍한 생명력과 자신감을 선보이는 갈색 눈동자, 양옆으로 시원하게 트여 있는 눈꺼풀로는 바다같이 거침없는 장대함이, 또는 조용하게 수렴하는 눈꼬리로는 어떤 다정한 생각들이 조용히 말한다. 우수에 젖은 듯이 담담히 잠겨 있는 속눈썹, 너무도 얌전히 자리한 까만 눈동자, 세상 험악하고 추악한 것들과는 차마 시선으로도 닿아본 적 없을 듯이 하얀 피부와 마치 제 성격을 대변하는 듯 억세지 않은 동근 얼굴형. 대체 왜 아직도 멸종하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하는, 뼈대만 앙상하니 남은 목고개를 옆으로 돌리었을 때 쇄골과의 이루어내는 선은 오히려 아뜩한 아름다움. 조악한 표현력을 굴리고 또 굴리어, 써낼 수 있는 한 떠오르는 모든 것을 써놓은들 나는 아름다움을 충분히 수 놓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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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 그것은 사랑스러움의 한 가지이다. 분명일 테지. 이 화려함, 시각적인 아름다움, 미 美라는 것이 모든 사랑스러움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이나, 나는 다시금 강조한다, 아름다움이 사랑스러움의 모든 뿌리이자 모체가 아닐 테나, 그것은 사랑스러움의 가장 강력한 동기이자 기제. 그대는 황홀한 눈빛을 자아내는 이것을 이해하는가? 아무런 서사도 없이 꽃 한 송이를 바치고 싶게 만드는, 이 숭배와 찬양의 마음, 그 이면에 자라나 미리 자리해 있던 것까지도? 아름다움이란 그저 그것만으로도 한없이 사랑을 주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어디에서부터 온 지 알 수 없음에도, 꾸준히 있어 온 현상이자 알 수 없음이었다. 


물론 어느샌가 비로소 점잖아진 그대를 움직이지는 않을 테나, 왜냐하면 홀리어 다가가는 아름다움은 쉬이 닿아볼 수 없는 것이매 자칫 거절당함과 복수심의 분노 혹은 유약하고도 선량한 이에게는 비감을 일으키고, 심지어는 분노가 가신 다음의 수치에까지도 이어져 있는 한 가지 연쇄작용이기에, 이것을 학습한 점잖은 사람들은 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나, 그리로 향하여 끌어당기어지는 인력으로부터 일체 자유로워지는 것은 결단코 어려운 일이다. 광장과 테라스에 앉아, 또는 홀로 종로 3가를 거닐면서도 사람을 구경하노라면, 도처에 만연한 아름다움이 멋대로 내게로 걸어들었다. 그것은 사람들로부터 날아드는 향기와도 같다. 코를 막고 걸을 수는 없으니, 그것은 분별과 거름 없이 닿아버리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내가 앉고 서는 여기 자리 변으로는 그 외 또 다른 아름다움이 전시되어 있지, 플라타너스 나무가 키 높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로는 적이 공활한 그늘이 깔리기도 하고 벌써부터 몇 다발 홀씨를 뿌려주기도 했으며, 맞은 편 적당히 먼 곳으로는 등나무 덩굴이 되살아나 주렁이 꽃술을 늘여뜨리기도 한다. 또 한옥을 얼기설기 따라 한 건물들로는 처마와 풍경과 잡상, 이런 것들이 내 눈을 높게 들어 사람들로부터 꺼내주었다. 이러한 것들도 적이 아름다움이라 불리우겠지만, 그것이 차마 나의 슬픈 사랑이 못 되는 까닭은, 진정 내 가리키고자 하는 아름다움에 나란히 놓일 수 없는, 인간으로부터 풍기오던 그 감미로움에 빗댈 수 없는 까닭은, 내가 그것을 일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그다지 좋아하는 이런 조용한 것들, 집착하지 않고서도 한없이 바라볼 수 있는 것들에도 아름다움이라는 능한 수식언이 자랑스레 따라붙겠지만, 이 낱말이 진정 사물의 깊숙한 곳에 갖다 박힐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아무런 집착과 슬픔도 낳지 못하기 때문이다. 집착이야말로 애증의 씨앗이자 갈증의 가장 분명한 증거, 사랑의 반증이라 내가 그것을 목말라함이요, 내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사람의 아름다움, 나는 그것이 좋다. 싫다. 좋다, 이내 싫었다. 그것이 나를 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꿈꾸게 만들기 때문이다, 집착하게, 마침내 증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가지고 싶되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무 가지고 싶었기에,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 그 눈에 깃들어 있다면, 눈을 가로 매 이리로만 향하여 두고 싶었고 입에 있으면 입을 굳히어, 손끝에 있다면 벙어리장갑으로 엮어 내게로 옮겨두고 싶었다. 내게만 아름답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으로부터 흘러나는 아름다움은 향기와도 같아, 모두에게 공평하게 쬐이는 햇살 같아서 나는 그것을 가로채고 싶은 홀로 집착을 안고선 멀리 숨어들어야 했다. 아름다움은 모든 이를 감미롭게 하는바, 내가 그들 모두에게서 아름다움을 차폐하거나 오직 나의 것으로만 훔쳐낼 수 없으며, 차마 훔쳐볼 아름다움이었다 한들 새장에 묶인 채로는 갇힌 채로는 차차 빛이 휘발되어 생명을 잃은 점토 덩어리가 되어버릴 것도 이해할 수 있었기에, 나를 그로부터 멀찍이 떨어뜨려 두어야 했다. 그건 아마, 그 사람을 독점하고 싶었음이야. 성별과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이성과 동성의 여부를 차치하고, 나는 그 사람의 오롯함을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일 거야, 왜냐하면 그 사람이 또다른 아름다움을 향해 떠나버리는 것을 심히 두려워했기 때문이고, 또 질투했기 때문이면서도, 내가 그를 잠시나마 붙잡아둘 무엇도, 한 줌 사랑스러움도 없었기 때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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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눈과 입을 잠시만 더 붙잡기 위해 한동안은 내 심장의 바깥에 있는 것들을 애써보기도 했었다. 유쾌함이라든지, 애처로움이라든지, 털털함이라든지, 속 시원함이라든지, 또 누군가는 내게 거칠고 단단한 것들을 기대하기도 했기에 나는 그러한 모습을 애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페르소나가 진정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 줄곧 알 수 있었을 테고, 끝내 나의 것이 되어볼 수 없었다는 것도 얼마간 지나서는 알게 되었다. 알아야 했다. 그럴수록 나는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사람의 하나인 나는 그를 향해 한때는 열린 눈으로 다가갔지만, 감미롭게 홀리어드는 것을 다 알지도 못한 채 수수방관했지만, 그에 뒤따르는 독점욕과 소유욕을 느끼곤 화들짝 놀라며 꿈을 깨야 했다. 나는 그대를 바라본다. 줄곧 바라보던 그대가 이따금 나를 신경 쓰지 않을 때 눈을 거두는 때 분노하는 나를 느꼈다. 그가 주위를 둘러싼 다른 이들과 정다운 문답을 나눌 때 나는 질투한다, 말하자면 그는 한 번에 하나씩, 다가오는 뭇 기대와 관심에 찬 사람들의 마음을 대하여 공평무사한 다정함으로 감싸 돌려주고 있었다. 물론 이따금 아름다운 그와 그녀의 눈을 사로잡는 또다른 누군가의 사랑스러움이 아주 잠깐 동안은 붙들어 매 조금 더 긴 시간을 체류하게 했지만, 그대가 참으로 다정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런 그대의 다정함을 사랑하고 존경할 수 없는 내가 미웠다. 


꿈을 깨야 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고운 꿈을 눈에 드리운 채, 서로 정다운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참으로 적당히 사랑하는구나, 그러나 내 눈에 비치는 너희의 그 적당함을 이해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너희에게는 너희의 감정이 가지는 고유한 스펙트럼이 있어 그 안에서 적고 많음이 상대적인 좌표계를 가질 테니 말이야. 너희의 충만한 사랑이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때의, 놀라운 힘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말이야. 너희에게도 너희의 사랑은 때때로 버거운 것일 테니 말이야. 그러나 적당함, 이것은 결단코 폄하함이 아니다, 내려보는 것이 아니다. 적당함, 이것은 내게 있어 높은 찬사의 말이자 축언 祝言이다, 내가 가장 가지고 싶어하던 무언가이다. 나도 너희처럼 적당히 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사람들로부터 도망칠 필요도 없었을 거니와, 내가 그토록 나를 때리고 할퀴지 않아도 되었을 거야. 


적당함, 그것은 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집착으로 빠져들지 않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사랑 속에 있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사랑 속에 있으며, 오로지 사랑으로만 남아 있을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 두 사람의 적당함이 자아내는 우아함과 여유로움을 동경한다. 그런 적당한 두 사람만이 자아낼 수 있는 오붓한 이별, 증오 없이 흐르는 소복한 눈물을 사랑한다. 그대가 만약 적당한 사람이로되, 누군가 맹렬한 사랑의 대상을 발견하고서 그 사람에 대한 어찌할 수 없음, 항거할 수 없음을 느끼고서 두려워한다면, 그것이 두려움임을 본능처럼 깨닫는 순간이 온다면 그때 그 사랑이 나의 것과 닮았다. 그리하여 너무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도피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찬찬히 떠올려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가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이다. 



신기한 일이지, 강아지와 고양이의 눈으로 비친 인간의 세계는 정말이지 신기한 곳일 거야.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향하여 사철 내달린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얼굴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그 미세한 다름을 어렴풋이 알지언정 해석할 수 없는 강아지의 눈 위로 우리 사랑, 그 많고 적음은, 또한 꾸준함과 변천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너희의 나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이었으면서도 어쩜 그토록 무해하였으니까. 한편 나는 너희가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을 느끼고, 짝을 맺는지도 궁금했다. 사육제의 봄이 찾아 누군가의 뒤꽁무니를 좇아 달리는 때와 짝을 맺을 때, 서로에게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봄이 지나고는 서로 한 점 아쉬움 없이 이별하는 것이 궁금했다. 너희는 사랑하였을까? 


심지어 너무 사랑하여 증오하는 것, 너희가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 강아지와 고양이 뭇 짐승에게 있어 증오란, 순수한 적의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수컷 사이의 권력과 서열 다툼에서, 무리 간의 영역 다툼에서, 제 새끼를 지키려는 때, 그리고 서로 다른 종 간의, 서로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수수께끼를 대할 때의 긴장 속에서 강아지와 고양이의 적의와 증오를 읽는다. 에로스의 교묘한 환영이 거두어진 눈, 이종 異種의 눈으로 바라 볼 제, 영영 아름다움을 좇는 인간들의 뒤꽁무니는 어떤 수수께끼일까. 어쩌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쉬이 이별할 수 있었고,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리하여 제 반려의 목을 물어뜯어 버리는 기묘함일랑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아, 사람의 아름다움, 그것의 무엇이 우리를 그토록 아프게 했던지. 네게 참으로 아름다움이라 할 무엇이 있어 나를 바라게 하였느냐. 아무것도 갖지 못함에도 나를 그토록 오래, 치밀듯이 갈구하게 하였느냐. 나는 알고 싶었다. 왜 누군가는 그토록 밉도록 아름다우며, 다른 누군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인지,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때에는 아무런 말 없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였으며, 누군가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은 완전한 침묵 속에 우회적으로 드러나 버리는 이유가. 즉, 사랑의 기원과 편차를 알고 싶었다. 또 달리 말하자면, 왜 개와 고양이가 사람을 바라보는 듯이 사랑하고 원할 수 없었는지를, 오래도록 궁금해했다. 


아름다운 사람, 그대가 그다지 추악하지 않은 내면을 준비해두었더라면 곧잘 온 무리의 환영과 사랑을 받는 것을 보았다. 아름다운 사람, 그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구한다. 그것은 그대를 사랑하여도 좋을는지 아직 경계하는 때의 조심스러운 상태. 그대가 딱히 추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잠깐의 경계를 벗고 그대에게 사랑이 쏘아나가려는 것을 멀찍이서 바라본다. 아름다운 사람, 그대는 사람의 질투를 두려워함으로써 겸양하거나 아주 담담하고 훌륭한 자태로서 그대에게로 쏟아지는 부담스러운 그 사랑을 존경이라는 단열재로 담아내기도 했다. 아름다운 사람, 그대가 그대가 만약 추악한 내면의 소유자로서, 그대의 오만과 허영으로 인해 그대에게로 떨어질 파멸을 두려워하느라 가장하는 모든 가식들을 애쓰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소리 없는 그대의 아우성을 모르고 다가만 다가만 가는 것을 보았다. 

 

아름다움, 그것은 사람을 이끄는 무언가이다. 나는 줄기차게 보았다. 기다란 테이블을 앞에 두고 수십의 사람이 무작위로 앉히었을 때, 사람들이 유쾌함과 아름다움을 향하여 천천히 집결해나가는 것을. 저마다의 의식이 감지하지 못하는 새 그들의 눈은 이미 그리로 향하고, 몸 고개는 그리로 돌리어지고, 무릎이 그쪽으로 뻗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는 보았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들이 향하는 반대편에서, 언제나 그들의 등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요, 그대들에게로 인도하는 이 소리 없는 힘을 차라리 나는 증오하였기에. 꿋꿋이 앉아 있으려 했으나, 저항할수록 엉덩이로부터 솟아오르는 추진력을 더욱더 선명히 인식하게 될 뿐, 그럴수록 나는 고집스러워져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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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수상한 찬양, 그러는 중 누군가 분노하는 소리가 들리온다. 외적인 아름다움을 숭배하다니, 너는 저열하구나! 단순하다, 그대는 편협한 시야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진실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함축해버렸다. 외적인 아름다움? 그것이 다 무엇이냐. 미디어가 부추기는 끝없는 치킨 레이스이고 피사의 각도로 높아만 지는 바벨탑이다. 그대는 깡마른 몸의 모델과 어린 아이돌들을 보지 못했는가? 거식증에 걸린 여아들과 아름다움을 위해 죽어가는 자들을 보지 못했는가? 그 반대편으로는 자꾸만 아름답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한탄과 자책을 듣지 못하느냐? 그대가 외적 아름다움을 숭배하는 한 가지 손가락으로써, 그대가 가리키고 있는 사람과 그를 위시한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떠밀고, 또 가르치려 하지는 않는가? 아름다우라 종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 그대는 아니라고, 또는 몰랐다고 하리. 그대가 고집스럽다면 아니라 할 것이요, 그렇지 않다면 결코 꿈에도 그런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고 억울해하리. 그리고는 분노하리라, 그대의 결백함이 부정되고 섣부른 오해와 당치 않는 모독을 받았다고 여기리라. 그러나 그대는 아름다움을, 아름다움만을 찬미하는 동시에 그 빛에 잃어버린 두 눈은 모든 평범함을 업신여기었다. 깔보는구나, 그대는 아름다움에 홀린 나머지 그것이 두 눈으로 찾을 모든 빛이며, 그 외의 것들은 죄다 남루한 어둠에 지나지 않다는 듯이 무심한 눈빛을 흘기었다. 그대는 여전히 몰랐다고 하리라만, 그대에게서는 한 줌의 저어함과 반성도 없는, 자각 없는 무심함이 흘러내렸다. 나는 어떻게 그대의 눈을 틔울까, 그대는 자꾸만 모른다고 하기에, 어떻게 그대의 눈먼 사상에 항거할 수 없는 여기 진실을 투하할까. 그대는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대가 오직 사랑스러움만을 찬미한다고 하였으나, 그때 그대는 사랑스럽지 않은 모든 것에 무심하였다는 것을, 그지없이 차가웠다는 것을. 그대는 사랑스럽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조심스럽지 않았다. 그대는 화장하지 않은 또래 여아를 향해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고, 화장술이 아직 서툰 이십 대의 초반, 한창 수수함이 어울릴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 아이가 매일 밤 두려운 거울 앞을 어떤 마음으로 마주하는지는 알고자 듣고자 하지 못했으되, 아이가 두려운 세상 앞을 온통 전율로 걸어 다니는 동안 곁으로 와 수치를 말하였지, 이어질 그대의 답을 안다, 나는 그대가 더욱 사랑스럽기를 기도한 것이 아니더냐, 이것은 너를 위한 나의 서투른 마음이었을 뿐, 오오, 능청스럽기도 하지. 


시선은 자꾸만 나를 아프게 찌르더구나. 나는, 나는 아름답지 않게 태어난 뿐, 아니 아름다움은 대저 무엇이냐. 대체 저 설마른 실루엣의 무엇이 아름다움의 분명한 증거가 될 수 있지? 아름다움은 무엇이냐, 훌륭한 화장술과 얇은 천으로 그리어 낸 모든 그림자, 형상과 상징들, 그것이 어떠한 원리로 사랑을 거두고 거머쥘만한 당당하고 높은 것, 진실한 아름다움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이지? 두 뺨의 홍조는 아직 살이 두텁지 않은 자의 것으로 곧 젊음의 상징이라 하였던가? 입술의 붉음은 고혹하는 손길이라 하였던가? 얇은 천이 겨우 가리내는 것은 차마 드러내지 못할 마지막 실루엣이요, 그것은 욕망에 호기심이라는 석유를 들이붓는다. 저열하구나! 모조리 에로스의 상징, 에로스의 활에 매기는 화살이라니. 


자신의 붉은색을 사랑하는 여인들은 이에 화들짝 놀라며, 이것은 결코 유혹함이 아니이다, 나는 나의 색깔을 지니고자 할 뿐! 자신의 상징을 사랑하는 또다른 여인들은 화들짝 놀라며, 나는 그런 노골적인 붉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의 색깔은 보라색의 은근함이다. 또 어떤 이는 담담하게, 나는 나만을 기리리라, 그들은 모두 찰나의 향기를 향해 서고 지는 부나방일 뿐인즉 애초 내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나의 곁에 영영 있으며 기리며, 나의 온 것을 보고 느끼고 기실 소유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나뿐이라, 샘물에 빠져 죽을 눈동자처럼, 더욱더 날카로이 아름다우리라, 나의 것, 나의 아름다움, 오로지 나만이 누려볼 것을! 



아, 진실로 그러하다면 나는 기꺼이 저열한 사람이 되겠다. 나는 가장 솔직한 사람으로서 차라리 떳떳이 저열하고, 땅에 떨어지리라.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 그대는 조금 더 인내로 들어주기를. 결국에 나는 이 모든 아름다움에 오기로나마 등을 돌리고자 오래 애쓰는 사람인 터이니, 다만 이제는 지치어 어느 것도 부정하지 않으려는 뿐. 이미 세상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는 것을 안다. 아쉽게도 내게 그 모든 담론의 본질마저 꿰뚫어볼 지혜가 깃들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액정 위로는 이 땅 위에 내로라하는 모든 아름다움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매일을 달리하며 어제보다 더욱 높은 아름다움을 구가하였으며,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을 사랑했다. 또는 질투했다. 그렇게 표독스러운 독기와 심지어 가끔은 살의로 가득 찬 질투라니, 아, 나는 그것이 여전히 매료되는 사랑의, 완전히 다른 또 한 가지 표현 방식임을 안다. 보노라면 가끔은 참으로 무력해지기도 하다. 유행이 돌고 돈다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이 마찬가지로 순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영 자신이 없기에. 이 생각을 확언할 정도로 고찰해 본 적은 없으나, 어째서인지 주변의 사람들은 자꾸만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나를 위시로 하여 제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그 허들로부터 멀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두려운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아름다움을 경계해야 한다면, 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이 벅찬 것, 아름다움이, 높아만지는 아름다움이 사랑스러움의 第一 동기, 가장 즉물적인 것으로서의 첫 번째 동기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서 총체적인 사랑스러움의 개념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언젠가부터 세상에 사랑이 적어질지도 모른다는 과장된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여 텔레비전을 부수고 매체들로부터 온갖 외적인 아름다움, 사람의 갈증을 뿌리째 뽑아버리거나, 그 인식과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어버리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흐르는 것이어야 하되, 본능의 맹목성이 그러하듯 적당함을 모르고 치닫는 것이 오직 두려움일 뿐. 


그러나 나는 믿는 것이란, 이 모든 것이 변증의 커다란 톱니바퀴 위에 놓여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아름다움이 끝 모를 듯 높아만 지고 사랑이 적어진 어느 미래에는 홀로된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높은 허들을 따라 달리는 것을 포기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짧지 않은 고독과 적막이 흐를 것이되, 충분히 그리움에 저민 사람들의 겸허한 가슴 안으로 비로소 조용한 사랑스러움이란 위안처럼 깃들이리라는 것이고, 그때에 진실히 가슴 속에 갖다 박힐 것이라고. 머리로 애쓰는 사랑이 아닌, 가슴으로부터 치밀어오르는 간절함으로, 외로운 사람들의 가슴에 비로소 길들일 수 있으리라고. 그 겸허함이 스미는 여느 때까지, 사람의 마음이 항상성의 궤도를 이탈해버리지 않도록, 미쳐버리거나 완연한 패배주의나 허무주의나 돌이킬 수 없는 체념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필요한 것이 무언지를, 나는 생각해야지. 


그렇다면 지금 아름다움에 대한 새 담론이 또한, 기존의 맹목적 행태에 대한 반대편 변증이겠구나. 아름다움에 대한 새 정의를 논하는 지금이란, 어쩜 너무나 자연스러움이었구나. 미에 대한 과열 경쟁이 낳은 필연이자, 맹목성에 대한 비판의식이자 브레이크, 그래 그 맹목성을 잠시 잠깐만이라도 멈추어놓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강렬함이 필요한 법이지, 그렇구나. 그럼에도, 여전히 온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그 본능을 완전히 거세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지금 아름다움의 담론이 상호 겪어야 하는, 필연적 갈등상황의 본질일 테고 말이다. 

 

*

 

아름다움, 그러나 아무리 다시 생각해보아도 그것은 여전히 사랑스러움의 한 가지이다. 아름다움, 그것은 어쩌면 가장 강렬하고, 가장 흔하디 흔한. 본능에 가장 충실히 각인되어 누구나 느낄만한 것. 노소와 고금을 그야말로 막론하는 것, 그대에게 다중으로 점철된 의식과 사상의 필터가 없었더라면, 가장 먼저 그대에게 샘솟을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부르짖음이었을 테다. 그대는 아름다움을 보자마자 그것을 알아볼 두 눈을 가지고 있다. 끝내 그대는 훌륭하게 그 점유하는 힘을 빗겨내고 승리를 목놓으리라만, 그대에게 아름다움이 사랑스러움의 징조로서 가장 먼저 찾았다는, 바로 그 사실됨 마저 극복해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움, 그것은 욕망의 신기루이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을 테다. 아름다움, 그것은 미칠 듯이 가지고 싶은 무언가이다. 나는 그것이 내게 이러한 갈증으로 먼저 떠올랐음을 거부하지 않으리라. 내게 아무런 유해한 욕망이 없노라고, 나는 순결하고 애초에 혐의 없이 깨끗한 존재이거나, 그리 거듭날 수 있다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모든 충동을 지배하거나, 안 될 값이라면 이별하기를 바랄 뿐. 나는 오래도록 아름다운 모든 것을 질투했다. 그리고 태생 위에 얹혀 있던 분노를 잡아먹고 그것은 더없이 크나큰 불길이 되어감을 지켜도 보았다. 그러니까 나는 온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어쩜 허망한 목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두려움도 간직하고 있을 뿐이로되, 이렇듯 거듭하는 일이란 다만 나를 모든 맹목으로부터 구하기 위함이다. 불길로부터 건져 올림이되, 완전한 착각 속의 아집인가 의심 속에서 오래 걸음이다. 


이제 나는 부정하지 않고서 승리하고 싶다. 부정은 그야말로 나의 것, 오직 나의 것이었기에. 그 지치는 것, 나는 그것이 얼마나 나를 자유로부터 멀리했는지를 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기실 전부가 그것이고, 내가 써내리는 온 말이 다만 그것으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긴 문답이자 변증이다. 부정과 증오는 나의 것, 나는 그 형상됨 중의 제일이다. 너무나 지치는 것임에도 그러나 아픔 없이 의식은 한줌 나아가지 못하리니, 나는 지금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으로부터 상처받은 모든 사람들이 목놓아 고하는 앞에, 또 다른 회색분자가 되어, 중간지대이자 모호함이 되어 안온한 아픔이 되리라. 그러니 그대는 나를 얼마든지 욕하라, 나는 그대의 믿음과 간절함을 다시금 무너뜨리려는 자, 그대의 초라함을 들쑤시는 자, 혹은 어딘가 나와 닮은 사람이 거기 있어, 눈감아 잊고 달아나려는 그대 인간의 저열함을 상기시키는 자이다. 그러나 내가 진실히 바라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봄에 있어 타자이자 관조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대가 불길 속에 거하며, 더 이상 바꾸어 태울 무엇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고할 어떤 분노도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오래 타오르기를 바란다. 그래, 전부 다 진부하고 지루해질 때까지, 연옥의 불길이 더 이상 그대에게 뜨거움이 아니게 되는 때까지. 미치지 않도록 이따금 어루만지면서도, 그대에게 가하는 풀무의 바람이고자 하는 내가 끝에 진실히 바라는 것은, 우리가 처음으로 다 태워내고 난 다음, 그저 무애 無碍한 고요함 속으로 접어들어 우뚝 서서는 그 안에 가로놓이기를.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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