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 [사람]

내가 당신을 기억한다는 증거
글 입력 2023.05.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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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중경삼림>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경찰 233은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지 30일째 되는 날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해 거리의 한 술집을 찾는다. 그곳에서 그는 금발 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의문의 여인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술에 취해 잠이 든 그녀의 근처를 밤새도록 맴도는 동안 5월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나는 아침 6시에 태어났다. 2분 후면 25살이 된다. 바꿔 말하면 4분의 1세기를 겪은 셈이다. 이 역사적인 순간에 조깅을 하러 나왔다. 몸 안의 모든 수분을 성공적으로 내보낸 것 같았다. 기분이 너무 좋다. 운동장을 떠날 때 삐삐를 버리기로 했다. 오늘 날 찾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텅 빈 운동장을 힘이 빠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는 233.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 줄 사람이 없었던 그는 그렇게 홀로 자신의 생일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런데 그가 운동장의 철망에 걸어두었던 삐삐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한다. 부리나케 돌아와 메시지를 확인하는 233. 생일 축하해요. 함께 하룻밤을 보낸 그 여자가 남긴 메시지였다. 

 

6시가 되어도 삐삐는 울리지 않을 테니, 차라리 운동장에 버리고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 그. 허탈하게 발걸음을 돌리던 도시의 한 외로운 남자는 6시 정각에 이름도 알 수 없는 한 여자로부터 생일을 축하받는다. 

 

 

1994년 5월 1일에 한 여자가 “생일 축하해요.”라고 말해주었다. 난 그 말 때문에 이 여자를 잊지 못할 것이다.

 


단 여섯 글자로 이루어진 말 한마디에 굳어져 가던 그의 심장에는 다시 뜨거운 사랑이 퍼져 나간다. 그녀에게는 큰 의미 없이 베푼 호의였을지 몰라도, 그렇게 그는 하룻밤을 함께 보낸 그녀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그녀는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겨질 것이다. 

 

누군가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생일을 축하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있다.

   

 

 

 생일에 무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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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 화창한 봄날에 태어났다. 봄에는 새싹도 돋고, 꽃도 피고, 날씨도 따뜻하니 생일을 즐기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은 억울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아직 데면데면한 학기 초에 항상 생일이 있다 보니 그들에게 축하받지 못하고 그냥 지나갈 때가 많았고, 시간이 지나 헤어지기 아쉬울 만큼 거리가 좁혀진 친구들도 다음 해에 반이 바뀌고 나면 나의 생일을 잊었다.

 

생일이 항상 중간고사 직전에 있다는 것도 너무 싫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벌써 9년 동안이나 나는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날 시험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온종일 공부만 하지는 않더라도 며칠 후에 시험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늘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생일을 보내야만 했다.

 

어디 그뿐인가. 친구들도 다들 시험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친구들이 내 생일을 잊지 않고 축하해 주기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시험이라는 큰 산 앞에서 죽을 때까지 매년 반복되는 생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생일이라는 것에 시큰둥해졌다. 날짜가 익숙한 숫자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습관처럼 초를 부는 날. 생일은 어느새 내게 딱 그 정도의 하루가 되었다. 

 

행복 위에 얼룩진 약간의 아쉬움이 해를 거듭하며 쌓이고 쌓이다 보니 매정해진 건지, 아니면 그저 나이가 들어가는 과정인 건지 어느 순간부터는 받고 싶은 선물도 사라졌다. 무엇을 받고 싶은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게 느껴질 뿐이었다.

 

 

 

생일은 '축하'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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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사람들이 나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었다. 축하받지 못했다고 서운해하는 것은 어릴 때나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생일에 점차 무감각해지면서 오히려 이것만은 더욱 분명해졌다. 생일은 누군가로부터 축하를 받을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선명해진다고.

 

얼마 전, 나는 스물두 번째 생일을 맞이했다. 그날도 역시 혼자 학교에 가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할 일을 했다. 평소와 똑같은 날이었지만, 이 평범한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던 건 바로 ‘생일 축하해’라는 사람들의 말 한마디였다.

 

지난날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역국을 한 그릇 끓여주는 엄마와 조용히 손에 용돈을 쥐여주는 아빠, 우연히 마주치면 복도에서도 생일 축하한다고 노래를 불러주던 친구들과 바쁜 와중에도 손수 편지를 적어 마음을 전해 주던 친구들까지. 많지는 않아도 내 곁에는 항상 그들이 있었다. 별다른 것 없던 나의 하루가 ‘생일’이 되고, 조금이라도 더 따뜻한 날로 기억될 수 있었던 건 모두 그들 덕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린 모두 어쩌다 보니 이 세상에 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 누구도 원하고 선택한 적 없는 이 생(生)을, 시작된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이 삶을 우리는 하루하루 끌고 가는 중이다. 그 안에서 어떠한 의미라도 찾아내기 위해 우리는 모두 기나긴 고독한 여정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 년에 단 한 번뿐인 생일을 축하받는다는 건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 속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의 포옹이다. 이 땅을 딛고 선 두 다리에 힘이 풀리지 않게 꽉 잡아주는 버팀목이고, 또 내일을 살아갈 힘이다.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꼭 커다란 진심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사실 남의 생일이 내게 진심으로 기쁜 일이 되기는 참 어렵다. 어떤 사람을 그만큼 사랑하게 되는 것도, 생일을 챙겨주기 위해 자기 시간과 정성을 쏟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스치듯 툭 던지는 말일지라도, 습관처럼 내뱉는 말일지라도 그가 걸어온 역사에 한 번쯤은 박수를 보내줄 수 있지 않을까.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쉽게 잊혀지고, 또 뒤로 밀려나기 바빴을 그들을 아주 잠깐이라도 붙잡아 기억해줄 수는 없을까. 

 

 

 

생일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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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023년 5월 1일 오전 6시. 경찰 233은 방금 막 생일을 맞이했다. 올해는 그가 외롭지 않은 생일을 보내고 있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생일도 축하한다. 당신이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일이 이미 지났거나 아직 오지 않았더라도 당신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모든 이의 생일이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져 있던 경찰 233이 다시 희망을 찾아 나섰듯이, 외로움이 사무치던 마음들에 서서히 온기가 번져 나가기를. 누군가로부터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마음 밭의 거름이 되어 단단한 용기와 사랑을 피워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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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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