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ject 당신] 간만의 편지

글 입력 2023.04.20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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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편지를 쓰겠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글의 첫머리를 떼기가 이렇게 힘이 든 것도 오랜만이다. 가끔은 수신자를 상정하고 쓰는 글이 오히려 더 막막하구나 싶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엄마한테 편지 썼던 게 언제인가 생각을 해 봤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난 듯해서 좀 민망하더라. 심지어 마지막으로 편지를 주고받던 시기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때였는지 알 거고, 또 끄집어내고 싶은 기억도 아니고. 아무튼 답지도 않은 글 끄적거린다고 앉아있으면서, 평소엔 친구들이며 주변 사람들한테며 인사한답시고 낯간지럽게 손편지나 카드 같은 것도 종종 썼으면서 왜 엄마한테는 어느 순간부터 내 문장을 보여주는 일이 힘들어졌을까 싶네. 너무 잘 알고 너무 가깝기 때문인지, 가끔 엄마가 나더러 참 정 없다고 타박하던 말이 맞아서인지.

 

솔직히 글이라는 건 어느 정도 정제된 형식이라,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고르고 골라서 담아낼 수 있잖아. 그래서 가끔 문장 속의 내 모습과 실제의 내가 이루는 괴리 같은 게 들킬 때마다 너무 부끄럽더라. 그리고 엄마는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이해와는 별개의 의미로), 부모님을 창조주라고 부르는 농담이 있는 것처럼 엄마는 나의 탄생과 성장과 지금까지를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봐왔으니까 그런 내 괴리도 제일 잘 보겠지. 그런 생각에 내밀한 얘기들을 꺼리게 된 것 같아. 분명 그 문장을 쓰는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는데, 때때로 모양 빠지게 말과 행동이 다른 내 모습을 엄마 앞에선 숨길 수가 없으니까... 넌 항상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말을 들을 것만 같아서.

 

그래서 요즘 쓰고 있는 글이 대체 뭐냐고, 한번 읽어보자고 엄마가 몇 번이고 물어보는 걸 계속 못 들은 척 했었거든. 한편으로는 그냥 대체 딸이 뭘 쓰고나 있나, 하는 가벼운 궁금증 정도일 줄 알았고. 또 엄마가 돋보기를 써야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있게 된 지가 좀 됐잖아. 조금 읽어보다 눈이 아파서 내려 놓을 줄 알았지. 근데 부엌 한 켠에 앉아서 오래오래 스크린을 내려가면서 내 별 거 아닌 글을 끝까지 정독해주더라.

 

티는 안 냈는데 나 그 때 진짜 긴장했어. 진짜로 눈이 아파서 더 못 읽겠다고 내려놓으면 앞으로 엄마한테 글을 보여줄 용기가 안 날 것 같았거든. 근데 너무 정성스럽게 읽어줘서, 네가 자랑스럽다고 담백하게 말해줘서, 너는 마음에 품은 고통이 이미 많은 사람이라 이런 글을 쓰는구나 하고 알아줘서, 참 놀랐다. 그래서 오랜만에 엄마한테 편지를 쓸 결심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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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잖아. 우리집은 유독 여자들끼리의 유대가 강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엄마랑 나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끈끈하다는 거. 가끔 엄마랑 나는 운명 공동체 같다는 생각을 하거든. (내가 아직 완전히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항상 기뻐도 같이 기쁘고 슬퍼도 같이 슬프고, 삶에 파도가 거칠게 일면 우리는 그걸 겨우 둘이서 같이 다 맞아내야 했으니까. 엄마는 내 엄마였고 아빠였고 언니였고 친구였고 심지어는 전우였고 가끔은 원망스러운 대상이기도 했고 아무튼 세상의 많은 관계와 감정을 엄마한테서 배웠으니까(부모 자식 간에도 적당한 거리가 있어야 한다고는 하는데, 이게 괜찮은 건진 모르겠지만).

 

몇 년을 나와서 혼자 살다가 요즘 다시 엄마랑 지내게 되면서, 또 이 지극한 가까움을 실감하게 되더라고. 부쩍 해가 길어져서 좋다는 내 말에 겨울은 해가 짧아 을씨년스럽고 마음이 울적해진다는 엄마의 맞장구, 해산물이나 날 것은 입에 잘 못 대는 식성, 은근 흥이 많아서 계속 틀어두는 노래,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받게 되는 상처. 나이를 먹을수록 엄마랑 나는 하나의 인간으로선 정말 다른 사람이라는 걸 느끼는데, 그러면서도 내 취향이나 성격이 어디에서 온 건지 포착하게 되는 일상 속의 순간들마다 나랑 엄마가 구분할 수 없게 엉겨있는 기분이 들어. 

 

근데 이 가까움을 느낄 때마다 한편으론 문득 두렵기도 하더라. 꽃이 너무 예쁘게 피었다고 행복해하면서, 길가의 화단에서 할미꽃 사진을 잔뜩 찍어가는 엄마를 보고 오늘 또 그런 생각을 했어. 앞으로 몇 번의 봄을 엄마랑 같이 보낼 수 있을까, 또 집을 떠나 몇 달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보는 생활을 재개하게 되면 이렇게 엄마랑 시시콜콜히 대화하고 산책할 수 있는 날이 며칠이나 남았을까. 그동안 사는 게 너무 바빠서, 엄마도 나도 각자의 자리에서 버텨내느라 이렇다 할 여행 한 번 같이 제대로 가본 게 겨우 작년 여름이 처음이었는데. 앞으로 그런 여행 몇 번을 더 갈 수 있을까. 

 

낮에 그런 얘기 했었잖아. 내가 잠시 쉬어가기로 하면서 잃게 된 것과 얻게 된 것이 있다고. 솔직히 당장의 휴식이 주는 달콤함이 슬슬 익숙해지니까 요즘 내가 잃게 된 것이 뭔지가 떠오르면서 내 고질적인 불안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거든. 근데 그런 거 다 아무래도 좋고 그냥 엄마랑 이 평일 대낮에, 오후 햇살을 받으면서 수다 떨고 꽃 구경하고 할 여유를 찾았다는 거, 이런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거, 그것만 해도 어딘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앞으로의 공백도 내가 엄마 품을 떠나있는 동안 새롭게 알게 된 좋은 것들, 귀한 것들 같이 즐기고 행복해하는 시간으로 채워보려고.  


언젠가는 나도 엄마의 곁을 완전히 떠나야 할 날이 오겠지. 내가 어떤 발버둥을 치더라도 완전히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 잘 채워보겠다고 한 이 시간 속에서도 또 서로 상처를 주고 마는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고, 내 무심함이 미처 다듬어지지 않을 때도 있을 거고. 두서 없이 써내려가기 시작했지만 그래서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앞으로의 시간들도 잘 꾸려나가 보자는 거, 그러기 위해 한번 더 생각하고 한번 더 마음 써보겠다는 거야. 감히 엄마의 마음 반도 못 따라가겠지만. 아무튼 이 시간을 잘 가꾸어 예쁘게 남겨서, 나중에 내 안에 엉긴 엄마의 흔적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더듬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다음 주말엔 우리 좋아하는 차 마시러 가자.

 

 

2023년 봄, 막내딸이.

 

 

[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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