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편지는 여기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사람]

세상을 돌아 받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었길
글 입력 2023.04.1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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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명에게 보내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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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의 마지막, 나는 문구점에 가서 편지지와 봉투, 펜 한 자루를 샀다.

 

메모지에 23명의 이름을 적고 차 한 잔을 우려와 책상 앞에 앉았다. 카페 창가 자리에서, 내 책상 앞에서, 침대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마음이 가는 대로 생각이 나는 대로 말을 메모해두었다가 차근차근 펜촉을 힘껏 눌러 글을 적었다. 23년이 밝자, 나는 23명에게 편지를 전했다.


얼마 전에 친구가 자신의 복을 나눠주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작은 행운이 나와 늘 함께하는 기분에 마음이 든든했다. 그 뒤로 나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 복을 조금이나마 나누고 싶었다. 처음에는 짧게 연하장을 쓸 생각이었다. 새해를 맞아 느닷없이, 기필코 확실한 행복이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연하장을 쓰면서 마음이 자꾸 길어졌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뿐 아니라 안부를 묻고 싶었고 전하고 싶은 문장이 있었고 나누고 싶은 행운과 실수투성이의 일상이 있었다. 작은 카드에는 도저히 하고 싶은 말을 다 적을 수가 없었다. 곧장 일어나서 문구점으로 향했다.

 

움직이는 걸 힘들어하던 나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을 감히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편지 쓰는 방법’



학교 다닐 적에는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 친구의 생일날이 참 힘들었다. 편지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 전날에는 항상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편지 쓰는 법’을 검색하곤 했다. 쏟아지는 편지 이미지들을 살피며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감을 잡으려고 마우스 휠을 굴리고 또 굴렸다.


나는 편지 쓰는 게 참 어려웠다. 편지에 어떤 말을 적어야 하는 건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용건이 없는데 보내도 되는 걸지 고민이 많았다. 삐뚤빼뚤한 내 손 글씨가 싫었고 내 문장이 싫었다. 정해진 형식도 정답도 없어서 더 난감했다. 편지를 전하고 싶은 상대는 소중했고, 편지를 전하는 일은 부끄러웠다. 내 말을 어디까지 해도 되는 건지, 상대가 읽기 싫어하면 어떡하나 싶고 나에게 실망하거나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됐다.

 

그래서 편지 쓰는 걸 꺼리고 피해 왔다. 난 편지 별로 안 좋아해, 라고 말하면서.

 

 


편지를 전해주고 싶어



공연을 보러 간 어느 날,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이 사람을 좋아한다고. 그가 내 마음에 스며든 지는 꽤 오래되었다는 것도. 나는 어느 순간 밤낮없이 그를 생각하고 있었고 일상에서 그와 관련된 것들을 발견하면 마음이 벅차올랐다. 하늘이 분홍색으로 변하진 않았지만, 세상은 윤기와 생동감으로 반질거렸다. 억누르고 미워했던 나의 감정을 편히 펼쳐두고 다독일 수 있었다. 어둠이 숨 막히지 않았고, 내일이 기다려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손을 잡아준 그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마침 편지를 전할 기회가 생겼다. 편지지를 고르고 펜을 쥐었다. 무슨 말을 적어야 할지 고민하며 책상 앞에 앉았다. 버릇처럼 SNS에 ‘편지’를 검색했다. 몇 글자 적다가 지우길 반복했다. 그냥 보내지 말까? 하지만, 고마웠고 내가 힘을 얻었듯 그도 힘을 얻고 행복하길 바랐다. 더는 내 마음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이 어떠했는지 당신이 내게 어떤 힘을 주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결국 나는 깨달았다. 편지란, 그냥 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라면 무엇이든 적으면 된다는 것을.


 

 

느닷없이 찾아올 행복처럼



편지의 언어는 구어와 문어 사이에 있어 더욱 매력적이다. 평소라면 듣기 힘든 그 사람의 문장을 엿볼 수 있다. 읽을 때 자연스럽게 편지를 쓴 사람의 목소리가 상상이 되니 낯섦이 제법 사랑스럽다.


편지를 쓴다는 건 글을 쓰기 위해 몸을 숙이고 고개를 종이 가까이 바짝 기울이듯,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다. 그 사람을 향해 함빡 흘러넘치는 마음을, 펜촉에 찍어 꾹꾹 눌러 적는다. 편지를 읽을 한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해지고 편지를 쓰기 위해 힘을 주는 모든 신체의 부위에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이 새겨진다. 그러다 보면 편지 뒷면이 눌러 쓴 자국으로 올록볼록해진다. 나는 편지를 다 읽고 나면 그 자리를 더듬어보길 좋아한다. 신중하게 눌러 적은 글자들에서 그 마음의 깊이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다.


수신인이 소중한 만큼 말과 내용을 공들여서 골라낸다. 마치 꽃다발을 엮듯이. 그 작업은 머리가 아프고 팔이 빠질 것 같다. 하지만 편지를 받고 그 사람이 지을 미소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렌다. 아픈 것도 잊고 말을 또 고르고 고른다. 꽃꽂이를 하듯 배치를 바꾸고 글자가 틀리면 새 편지지를 꺼내 쓰고, 괜히 글씨가 미운 것 같으면 새 펜을 꺼낸다.


손 편지를 쓰는 일이 점점 뜸해진다. 살아가면서 손 편지보다는, 훨씬 간단하고 편한 이메일과 SNS를 쓰는 일이 더 많다. 하지만 머나먼 미래가 되더라도 손 편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내밀하고 술렁이는 마음을 전하기에 손 편지만 한 게 없으니까. 사각사각 소리를 타고 퍼지는 흑연과 잉크 냄새, 손끝에 닿는 종이의 서늘한 질감, 한 사람만으로 가득 차서 고개를 따라 기우는 마음, 받는 사람 단 한 사람만을 위한 글. 느닷없이 찾아올 행복처럼 편지를 써서 전해볼까. 예기치 못하게 우체통에 찾아온 행운을 내 손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건 무척 기쁜 일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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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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