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OO이(가) 현실이다’

영화 <비디오드롬> (1983), <엑시스텐즈> (1999)
글 입력 2023.04.1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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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는 시간이다


  

‘메타버스’라는 것에 관한 논의로 한창 난리였을 때, 가장 인상 깊게 봤던 주장은 ‘메타버스는 공간의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삶이 가상의 삶보다 덜 중요해지는 어느 시점’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보게 되었을 때 쭉 어딘가 촌스러운 비디오 게임 속 공간을 떠올리며 아직 나와는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던 메타버스의 개념이 내 안에서 정립되었다.

 

대학 시절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관한 강의를 들은 게 기억이 난다. 강의 제목도 너무 추상적이었던 데다가, 나는 강의를 따라가는 것보다도 교수님의 영화와 관련된 사담에 정신이 팔려서 지금은 그 강의의 골자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그렇지만 기술의 발전에 따른 뉴미디어 사회, 그러니까 현재에 관해 공부하는 강의였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 강의를 듣는 것은 ‘디지털’이라는 것의 시작, 그러니까 0과 1의 개념부터 시작해 계산기-컴퓨터-모바일 기기-가상의 세계까지 이어지는 기술의 흐름을 톺아 보는 시간이었다. 온갖 기술적 용어들에 둘러싸여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내 눈앞에 들이밀어진 중간고사 과제가 미디어와 관련된 영화를 보고 뉴미디어 사회에 관한 에세이를 쓰는 것이었다.

 

내가 글을 쓴 영화의 목록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에이. 아이’, ‘그녀(Her)’, ‘바이센테니얼 맨’이었다. 나는 각각 영화에서 ‘결국 인공지능보다 인간이 낫다’고 말하는 듯한 기조를 나름 신랄하게 비판하는 에세이를 썼다. 예시로 들었던 것 중 하나가 <그녀>에서 주인공이 다시 인간 여성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결말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인간이 인공지능보다 낫다’는 말 자체보다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발전하면서 그것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 분명한 인간의 무력감이었던 것 같다. 가상의 ‘무언가’가 인간에게 이렇게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아직은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 시기여서 더욱 ‘컴퓨터와 사랑에 빠진 인간’ 같은 이야기를 믿기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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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를 경고하는 흉측한 영화 두 편


  

<비디오드롬>과 <엑시스텐즈>는 미디어가 인간의 정신에 미칠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최대한 징그럽게 묘사한 작품들이다. 미디어 학자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가 메시지다’라는 주제를 저예산 바디 호러 전문인 감독의 연출 스타일에 결합해 탄생한 기이한 명작들이기도 하다. 다만 이 작품들을 감상할 때는 <트루먼 쇼>의 결말처럼, ‘이제 우리 뭐 보지?’라고 질문하는 대중의 모습을 보여 ‘거울 치료’를 선사하는 친절함 따위를 기대하면 안 된다.

 

<비디오드롬>의 경우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비디오’를 소재로 한다. 주인공 맥스는 자극적인 포르노 영상물을 수입해 텔레비전 채널에 송출하는 일을 한다. 미디어 업계에서는 그의 직업적인 윤리관에 질문을 던지지만, 그는 오히려 ‘자신의 일이 사람들의 갈증을 대신 해소해주는 것’이라며 자신의 일이 윤리적 타당성을 가진다는 궤변을 펼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주장에는 ‘사람들은 영상과 현실을 구분할 정도의 지능은 있을 것이다’라는 믿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런 영상물에 현혹되어 인생을 허비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 그는 영화의 초반부터 일본식 포르노를 보며 냉정하게 평가한다. 그에게 영상물은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그런 맥스가 ‘비디오드롬’이라는 영상물을 보며 현실과 혼동하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영화 속 현실과 미디어의 경계는 흐려지기 시작한다. 미디어를 믿지 않던 맥스가 점점 더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을 찾으면서 미디어에 ‘잡아먹히고’, 결국 현실감을 잃고 자멸하는 결말은 미디어의 부정적 영향력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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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시스텐즈>는 더 나아가 관객을 게임 속으로 끌어들인다. <비디오드롬>에서 관객의 위치는 주인공이 미디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계속해서 자극을 찾는 추하고 징그러운 모습을 관찰하는 관찰자라면, 이 작품에서 관객은 자신이 게임 속에 있는 줄 모른 채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험을 한다.

 

이 작품은 유명 게임 개발사의 시뮬레이션 게임을 테스트하려던 테스트 참가자 12명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참가자들이 테스트를 시작하려는 순간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인간성을 잃어 가는 것을 반대하는 현실주의자들의 테러가 발생하고, 주인공 엘레그라와 테드는 테러를 피한 도주를 시작한다는 것에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큰 반전은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그러니까 시뮬레이션 게임의 테스트를 시작하려는 순간과 테러 자체가 게임의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엘레그라와 테드는 영화 초반에 현실주의자들의 추격을 받는 대상이었다가, 마지막에 '진짜 현실'로 돌아온 후에는 사실 게임에 의한 현실의 왜곡에 반대하는 현실주의자가 된다.

 

이런 경험은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미디어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에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작품이 이야기하는 ‘미디어’의 범위가 비디오, 텔레비전, 게임과 같은 올드 미디어에 한정되어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두 작품 모두 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OO이(가) 현실이다’


 

‘게임을 많이 하면 폭력성이 증가한다’는 말은 예전에는 열띤 논쟁의 도화선이었지만, 지금은 모두가 코웃음 치는 명제이다. 게임에 몰입하고 사회적 관계를 차단하며 폭력성이 증가하는 경우는 있지만, 순전히 게임만으로 폭력성이 자극된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게임은 건전한 놀이가 되었고, ‘게임 중독’에 관한 우려는 ‘더 재미있는 것‘의 등장으로 구시대적인 고민이 된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매일 매일을 도파민이 가득한 삶을살고 있다. 10분에서 5분, 거기서 1분으로, 그것도 길어서 30초, 그 다음에는 15초로 점점 짦아지는 영상 포맷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대중들은 끝없는 자극을 추구한다. 어느 곳에 가도 (뉴)미디어가 존재한다.

 

‘세계관’, 혹은 ‘부캐’는 이렇듯 ‘숏폼 콘텐츠’가 지배적인 뉴미디어를 바탕으로 가장 크게 성장한 놀이이자 문화다. 짧게는 십몇 초에서 길어봐야 일 분을 넘기지 않는 숏폼 포맷은 한 사람이 사회 속 전형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롤플레잉 콘텐츠에 최적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건 영상을 감상하기만 하는 사람들도 댓글을 통해 ’세계관 만들기‘에 가세하며 가상의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희극인들이 연기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살아 숨쉬는 ‘피식대학’, ‘사내뷰공업’과 같은 채널 쇼츠와릴스 댓글창을 보면 시대, 장소, 상황과 분위기에 잘 어울리게 발화하는 듯한 댓글들이 있다. 간혹 이런 콘텐츠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상의 캐릭터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아는 모습이 포착되곤 하는데, 그것이 댓글 콘텐츠의 핵심이 될 때도 있다. 가상의 세계이지만 현실의 사람들이 그것을 ’진짜‘로 착각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것이 하나의 문화적 상징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서준맘’ 같은 젊은 엄마들은 무조건 동탄에 있으며, 2005년에 있던 모든 대학 댄스부에는 길은지 같은 선배가 있었으며, 황한솔 같은 오타쿠와 황은정 같은 일진은 반에 꼭 한 명씩 실제로 있었던 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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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상의 인물의 삶을 일부 경험하고 ‘특정한 사람들의 삶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현실에 있는 사람들마저도 그런 규격에 맞추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냥 어디 가서 ‘아 그런 옷차림, 그런 말투가 국룰이지’ 하면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에도 맞장구를 칠 수 있는 것이다. ‘경험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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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드롬>에 등장하는 인물 중 브라이언 오블리비언(이름이 참 의미심장하다) 교수가 있다. 이 캐릭터는 영화 내내 실물을 드러내지 않고, 대신 텔레비전 속 화면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그가 사실은 이미 오래전에 사망한 인물이었고, 미래를 예측해 자신의 생전 모습과 목소리를 녹화해두어 주인공과 소통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의 대사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Television is reality, and reality is less than television'이다. ‘텔레비전이 현실이며, 텔레비전이 현실을 뛰어넘는다’는 이 주장은 ‘텔레비전’이라는 단어 때문에 조금 구시대적인 느낌이 난다. 그렇지만 ‘텔레비전’의 자리에 빈칸을 뚫으면 어떻게 될까?

 

‘OO이(가) 현실이다’

 

SNS가, 쇼츠가, 틱톡이, 유튜브가, 밈이, 인터넷 뉴스, 바이럴 게시글 속 이미지가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현실을 뛰어넘는다. 이 명제가 정말 텔레비전의 시대에서 끝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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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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