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왜 혐오를 외치는 사람들은 한 종류의 혐오만 하지 않는가?” [도서/문학]

한국은 ‘정체성 상실’의 사회다
글 입력 2023.04.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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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를 중심으로 ‘셀프 브랜딩(self-branding)’이 유행하고 있다. 스스로를 브랜드처럼 만든다는 의미로, 개인의 기업화를 의미한다. 이에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대외활동, 교환학생, 인턴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활동들로 자신을 표현하고자 한다. 효과적인 이미지화를 위해 ‘셀프브랜딩’만을 위한 SNS 계정도 많이 생성된다. 표면적으로는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굳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체성을 강화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사실상 ‘사회적으로 원해지는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단단한 하나의 ‘자아’ 정체성은 상실된다. 또한 인스타그램, 틱톡, 트위터, 블로그 등 수많은 SNS 속에서 사람들은 각 SNS마다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의도적으로 전시한다. 각 플랫폼과 그곳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나’의 모습에 맞춰 페르소나를 취사선택한다.

 

또한, 개인들은 각자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자신과 특정 성질을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집단에 의탁하기 때문에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집단의 주류에 편승한다. 한국에서 mbti(성격유형검사)가 유행하면서 이 흐름은 가볍게 드러났다. “내 mbti는 0000야.” 해당 mbti에 대한 상세 설명들을 서서히 내재화하면서, 개인의 고유한 특성에 따르기보다 해당 성격 유형의 보편적 특징에 따르고 이를 정당화하는 양상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 무거운 예로는 극단적인 성향의 커뮤니티가 있다. 이들은 무분별하게 외집단을 폄하하고 혐오함으로써 자신들의 내집단을 강화한다. 즉, 울타리를 더욱 높고 견고하게 쌓아 올려서 외부에서 유입될 수 없도록, 그리고 자신들도 외부의 여론을 비판적으로 접할 수 없도록 자체적 고립을 행하는 것이다.

 

 

 

사냥꾼이 되어야 한다


 

바우만은 오늘날 생존을 위해서는 사냥꾼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냥꾼은 분별없이 사냥하고, 숲이 망가져서 사냥감이 고갈된다면 다른 숲으로 옮겨간다. “우리는 모두 사냥터 한복판에 내던져진 외로운 사냥꾼에 불과한 존재들이라는 게 바우만의 시대 진단이다.” 한국의 공통 정서는 불안이며, 바우만은 우리가 이전에 마주한 적이 없는 일련의 도전에 직면해있다고 말한다. 역사는 고형적 단계에서 유동적 단계로 변하면서 통제할 수 없게 됐고, 개인은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액체근대의 개인은 노동을 통해 사회정체성이 형성되어 이를 기반으로 노동자로 구성된다(바우만, 2008: 53∼54). 또한 액체근대의 노동세계는 일관되지 않은 고용구조성을 가짐으로써[1] 소비의 미학이 중시됐고, 소비는 욕망과 충족을 통해 즉각적이고 일회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따라서 개인의 정체성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며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2] 그러므로 액체근대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더욱 불안,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게 된다. 나아가서 노동 구조의 새로운 생산양식은 사회적 불평등의 모습을 재구성하고 주류집단에 동참하지 않은 주변집단은 잉여 인구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으로 논의한다.[3]

 

 

 

부족한 파이를 나눠먹으며


 

초개인화된 현대사회의 진단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현대사회는 일정한 양의 파이를 알아서 나눠먹도록 한다. 파이를 많이 먹든 적게 먹든, 혹은 전혀 먹지 못해서 굶어 죽든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다. 우리는 그 공포에서 벗어나고자 다시 무한 경쟁이라는 비교적 친숙한 압박에 스스로를 몰아 넣기도 했다.[4] 이는 사회가 초개인화되도록 했고, 생존을 위해 개인들은 강박과 불안, 인정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파이를 챙기기 위해 개개인은 스스로를 기업화하면서 자신을 통제하려 하지만,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무시로 인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데, 박탈감이 원한으로 심화되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된다. 차별과 배제를 넘어 무시와 혐오가 난무하는 모습은 분배와 인정 욕구의 역설이다.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감이 낮을수록 타인에 대한 차별이 강하게 나타나면서, 다양한 집단들의 존속이 어려워지는 고위험 사회가 된 것이다. 초개인화됐던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특정 집단에 의탁하고, 자신들은 외부와 다르다며 구별을 짓는다. 이는 우리 집단의 이익을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인데,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선(善)’과 같은 도덕적 가치를 주로 내세운다. 그래야만 자기 집단이 무시당하거나 저평가될 때,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떻게 특정한 집단들이 비슷한 형태의 혐오를 공유하게 되는지에 대한 답을 준다. “한국 사회에서 일베, 태극기 집회, 극우 개신교, 애국 보수단 등이 벌이는 극우주의 운동은 현실의 비참한 생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기득권, 국가, 민족, 종교 등과 같은 강력한 대상에 동화한다. 그리고 집단에 몰입하고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성이나 성 소수자와 같은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계층도, 연령도, 좌절한 이유도 모두 제각각인 세대의 집단이지만 이들은 그저 무분별한 ‘혐오’로 뭉친다.

 

‘파이 나누기’가 주된 관심사인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분배 문제를 둘러싼 계급 갈등과 젠더, 세대, 취향 등을 둘러싼 인정 욕구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자본주의는 흔히 내적 위기를 새로운 시장과 식민지를 개척하여 극복하곤 했다.[5] 이에 비추어 보자면, 자신의 집단 외부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특성에서 나타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희망은 있다


 

한국을 관통하고 있는 세대별 불안, 청년층의 불안과 노년층의 불안, 이뤄놓은 것에 대한 인정 욕구, 경쟁에서 도태될 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혐오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희망이 있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고, 자신의 요구에 공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함께 처해있는 시류 속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 혐오가 아닌 건전한 방식으로 문제의식을 풀어나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정체성의 상실을 메우기 위해 혐오하는 사회가 아닌, 개개인을 존중하면서 각자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한국 사회가 되길 바란다.

 

 

**

[1] 손경미, <바우만의 액체근대론과 벡의 성찰적 근대화론 비교 연구>, 《사회와 이론 통권》 제22집, 2013.

[2] 위의 논문.

[3] 위의 논문.

[4] 함규진, <21세기의 예레미야>, 《유대인의 초상》

[5] 최갑수, <『공산당선언』의 현재적 의미>, 《특집》.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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