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나는 너로부터 유래했어

나는 여전하다 그 수많은 변화로부터
글 입력 2023.04.0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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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풍경.

 

 

나는 엄마와 아빠의 취향과 함께 자랐다. 꽤 많은 부분을 그들로부터 빌려왔기에 내 세포뿐 아니라 대부분의 유래도 거기서 찾는다. 그 외에는 자잘하고 어리숙한, 귀여운 역사다. 나는 중학교 친구한테서 눈을 찡그리며 웃는 버릇을 들였고 만나던 이로부터 차례대로 그들이 쓰던 향수, 자주 쓰는 브랜드, 가게들에 대한 취향을 옮아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취향을 선물했고 전염시켜왔다.


예전에는 너의 취향이 내 취향이 되고, 서로의 역사가 얽히는 일들이 차고 넘쳤다. 내가 쓰던 향수가 그 애 주변 공기에서도 피어나고, 그 애가 좋아하던 밴드가 내 플레이리스트에 가득 차고. 그런 날도 있었다. 지금은 무언가를 더 좋아하기 위해서는 있던 것들을 비워야 한다. 더 버릴 것이 없어서 나는 양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그렇게 살아왔다. 


내 취향과 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한 자신감의 출처는 어디였나. 찬찬히 되짚어보면 그 근거는 내 취향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서 온 것 같다. 


나는 네 취향을 타협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하고 싶은 것 해. 


S는 그런 내 취향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 난 네 안목을 믿는다. 그런 말들을 반복하면서. 맞는 것보다 안 맞는 게 더 많았던 사이이고, 그 애 때문에 흘린 눈물을 합치면 1.5리터짜리 포카리스웨트 두 병은 될 텐데도. 서로의 취향이 기가 막히게 취향이면 이러한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건 그때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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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랑하는 밴드 선셋롤러코스터의 단독콘서트.

 

 

나는 정말로 여전한 것 같았다. 탄탄하고 폭신한 셔츠를 좋아하고 얼굴이 환해지는 남색과 새파란색을 좋아한다. 부록으로는 초록색이 좋다. 최근에는 살구색이 좋아졌다. 옷을 입을 때는 시끄럽지 않은 색들을 겹쳐 입는 것이 좋다. 작약 향과 오크모스, 샌들우드가 들어가면 어쩔 줄 몰라하며 향에 잠긴다. 물은 끓여 먹는 것이 좋고 새로운 곳에 가는 것보다는 익숙한 곳의 익숙한 자리가 좋다. 아직까지도 손으로 일기를 쓰며 불규칙한 무늬의 컵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고 망설인다. 빨래가 다 마르고 나면 꼭 얼굴을 묻어보는 습관이 있다. 티켓은 종이로 만져야 덜 아쉽다. 


취향을 이야기하다 보니 그것이 버릇처럼 굳어진 습관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뜻 취(趣)와 향할 향(向)이 합쳐져 취향이라는 글자를 만든다. 익힐 습(習)과 버릇 관(慣)이 모여 습관이 된다. 취향은 내 뜻이 이끄는 곳으로 향하여 간다는 의미이고, 습관은 결국 그 취향이란 것과 행위들이 쌓여 생긴 나만의 행동 방식이라는 것이다. 


글자를 뜯어놓고 보니 그간 내가 취향이 없는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유가 너무도 명확해 허탈해진다. 자신이 선택하는 것도 향하는 곳도 없는 사람에게 무슨 기대를 할 수 있을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꾸준히 발전하는 사람이 좋고, 어떤 식으로든 내일이 기대되고 배울 점이 있는 사람이 좋다. 기왕이면 내가 못하는 일을 잘했으면 좋겠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몇 년간 내가 사랑했거나 짝사랑해온 사람들의 공통점이었다.


선이가 한 번은 나더러 ‘취향에도 고집이 묻어나는 애’라고 했다. 고집은 보는 각도에 따라 아집이 되기도, 자아가 되기도, 패기가 되기도 한다. 어떤 모습을 보고 있는지는 모른다. 선이도, 다른 사람들도. 나는 어떠한 이름의 고집이든, 내가 뿌리내린 자리를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었다.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때의 나에게는 칭찬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런데 선아 나는 변하기도 하는 것 같아. 요새는 알록달록한 패턴이 들어간 양말이 좋다. 예쁜 옷보다 편한 옷에 몸을 꿸 때가 좋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도 좋아졌다. 뛰는 게 너무너무 싫었지만 이제는 왜 사람들이 답답할 때 뛰러 가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는 좋아졌다. 

 

이제는 너무 애쓰지 않는 사람이 좋다. 너무 치열하지 않고도 살아갈 줄 아는 방법을 아는 사람. 숨을 여유롭게 쉴 수 있는 사람. 녹색 불에 매번 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 나를 외로움에 단련되지 않게 하는 사람. 자신의 취향에 무게를 실어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 나는 모르는 노래도 아는 노래처럼 부르는 재주가 있는데, 취향의 변주는 방향을 모르겠다. 


유구한 취향도 아름답지만 요즘은 변덕스러운 취향도, 무언가에 사고처럼 빠져버리는 그런 열정을 돌려받고 싶다. 지친 발걸음이나 누가 날 불러도 모를 정도로 휴대폰에 열중한 모습이나, 쉽게 포기해버리는 지친 몸이나 용기, 취한 밤 같은 것들 말고. 

 

상식에 기대지 않고 놀랄 수 있는, 평생을 그 기억으로 살 수 있을 정도의 사고같은 새로운 취향들과의 만남을...내가 기대어서 계절을 보낼 수 있는 사고 같은 섞임들을...기약없는 기다림도 이렇게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여름을 맞이한다. 여름은 무수한 변덕의 계절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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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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