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어나도록, 솔직함을 사랑하는 우리. [사람]

봄에 벚꽃 피듯, 소담스레.
글 입력 2023.03.3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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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초등학교에 갈 때쯤, 손들고 말하는 법을 배운다.

 

정확히는, 우릴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발언권'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뱉고 보니 왜인지 괴상한 기분이 든다. 그 '발언권'이란 건 대체 누가 만들고, 누가 주는데?


'말할 수 있는 권리'라, 다 같이 사는 곳에서 '아무나' '막' 말하는 것이 소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긴 하다. 근데, 우리도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면 '말'에 있어 사리분별은 할 수 있지 않나? '말'의 당위성. 딱 그만큼만 생각할 줄 알게 되고 나면, 누군가의 솔직함이 공동체의 질서를 방해하고 분란을 조장하진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함께 하는 이가 3인 이상인 현장에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맘 놓고 하기가 늘 어렵다. 나와 상대방, 둘만이 대화를 주고받을 때, 그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조건이 붙어야만 내 속에 있는 이야기를 눈치 보지 않고 꺼낼 수 있다. 게다가 상대방이 나와 아주 친밀하다는 가정까지 한 술 더 얹어야 한다. 내가 믿을 수 없는 이들과 함께할 때, 그들의 시선을 신경 써 가며 뱉을 수 있는 언어는 너무나도 한정적이었다. 말할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 있는 걸까, 괜스레 한 발 먼저 앞서 걱정하게 된다. 어릴 때 마냥 손 들고 발언권을 얻어야 할 것 같은 마음. 그런 부담스러움이 머릿속을 장악하는 게 느껴진다.


하물며 공인은 어떨까. 우리야, 민간인인지라 잘못 뱉은 말도 금세 잊힐 수 있다. 비난을 받더라도 최소한, 날 것의 언어로 면전에 대고 받을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공인은 다르다. 얼굴과 이름, 살아옴의 과정에서 남겨진 세세한 발자국들까지 모두 드러난 그들을 익명이라는 방패 뒤에서 바라보는 대중이 있지 않나. 우리의 주변인들은 자기들의 사회적 입장을 고려해야 하고 평판을 염두에 둬야 하기 때문에 남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아낀다지만, 대중은 또 그렇지 않다. 하나에 비해 다수이기 때문이다. 공인을 평가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뿐더러, 방패 뒤에 숨어 날카로운 말을 던지는 일에도 능숙하다. 자극적인 것을 선호하여 누군가의 악소문에 달려드는 경향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공인은 이러한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고, 그들의 악취미를 자극하지 않도록 거동을 조심해야 하는 함에는 틀림이 없다.


최근 르세라핌의 멤버인 허윤진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팬이자 대중으로서, 나는 적지 않은 시간 허윤진의 발자취를 지켜봐 왔다. 허윤진이 엠넷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프로듀스 48에 출연했을 적부터 지금의 르세라핌 멤버가 될 때까지 겪어 온, 겪고 있는 일들. 그리고 그녀가 지금 보여주고 있는 멋진 행보까지. 오늘의 내가 바라본 그녀와, 그녀로부터 얻게 된 소망을 소개하고자 한다.

 

 


욕심쟁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열정을 다 하는 것이 언제부터 욕심이었을까?

 

지금보다는 조금 어렸을 때, 아이돌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며 했던 생각이다. 그곳에 출연하는 연습생들 모두 하나의 목표를 가진 사람들이지 않나. 빛나는 가수로 거듭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 좋은 자리를 쟁취해 내는 것 말이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연습생들의 의지나 마음과는 어긋나는 시청자들의 입장이 항상 그들의 용기를 가로막는 것 같다. 가령, 주목받는 자리를 위해서 꼭 가져야 할 '역량'이라는 요소가 시청자들로부터의 '인기'로 대체되는 상황 따위 말이다. 그건 초반 인지도를 가지지 못한 이들이 처하게 되는, 시장의 당연한 생태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그들이 설 무대 위가 '가수'라는 역할을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인기 많은 사람이 먼저 기회를 얻게 되는 그 행태가 안타까울 뿐이다.


프로듀스 48에 깊게 이입해서 보진 않았지만, 당시 프로그램 내에서 허윤진이 발판을 잃게 되는 계기를 목격했었다. 그 일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투표를 통해 팀원 모두의 역할이 정해진 상황에서 허윤진이 한 번 더 어필했다. 거기서 팀원들이 동의하여 허윤진이 메인 보컬의 자리를 얻고, 원래 메인 보컬이었던 멤버가 다른 파트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생각보다 큰 파장을 불러온다. 사건의 발단 이후로 허윤진은 프로그램 시청자들로부터 크게 비판받았으며, 그녀의 순위 하락이 시작되었고, 종국에는 탈락의 수순을 밟게 된다. 프로그램의 팬들은 허윤진에게 '욕심을 부렸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혼이 날만한 일이었나? 내가 보기에 그녀는 자리에 맞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고, '욕심내도' 될 만큼 그 자리가 어울렸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로부터 냉정한 비판을 받았다. 역할이 정해진 상황에서 한 번 더 어필해 봤다는 이유로. 심지어는 그 발언에 팀원들이 서로 양보하여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고, 허윤진도 어엿한 아이돌로서 많은 팬들로부터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지만, 그때의 수많은 질타와 비난이 그녀에게 있어 합당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서야 말하는 것 같긴 하지만.

 

 


Not a doll.



아이돌은 가수인가, 배우인가, 댄서인가.

 

그들은 노래도 잘 해야 하고, 연기도 잘 해야 하며, 춤도 잘 춰야 한다. 세 분야 전반을 각 분야의 전문가 정도는 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 너무나도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돌이라는 직업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들이 그만큼 빛나기 때문이겠지. 어린아이들의 눈에 아이돌은 닮고 싶은 롤 모델이자, 학창 시절을 함께 하는 친구이자, 마음을 위로하는 형제일 테다.


아이돌을 동경하던 아이들은 곧 그 길을 걷고 싶어 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어렵게 어렵게 그 길에 뛰어들고 나서야 그들의 악독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마냥 꿈만으로는 버티기 힘든, 여린 발을 가진 이들이 걷기엔 너무나도 거친, 끝이 없는 것처럼 펼쳐진 자갈밭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갈고닦아 아이돌이 된다고 해도 온전한 주체성을 가지고 인생을 풀어나갈 수 없는 것이 아이돌이 처한 현실이다. 아이돌은 소속사에서 주는 곡과 안무로 무대에 서야 하고, 스타일리스트가 주는 옷을 입어야 하며, 메이크업도 소속사가 추구하는 그룹의 콘셉트에 맞춰 받아야 한다. 엔터테인먼트 회사가 지향하는,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모습을 하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젊고 창창한 나이라야 누릴 수 있는 달콤한 일상도 포기하고 말이다.






아이돌의 본래 의미는 '신화적 우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지하는 아이돌의 진짜 의미는, 'Intellectual doll', 즉 지적인 인형이라고 볼 수 있다. 생각할 줄 알고, 말할 줄 아는 '인형'. 대중이 원하는 모습을 하고, 거슬리지 않는 말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할 줄 알며, 못하는 것 없게 두루두루 학습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자아는 무시당하기 마련이다.


허윤진은 숱한 경쟁을 거치면서 겪어왔을 위 현실 속 감상들을 자작곡에서 풀어내었다. 들으면서도 대단하다고 느낀 건, 곡의 퀄리티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솔직함이다. 허윤진은 과거 솔직함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부당한 손가락질을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보면 내부 고발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아이돌의 현실을 본인만의 언어로, 직설적이게 뱉어낸다. 겁이 없나, 싶기도 한데 그래서 더 멋있는 것 같다. '거침없음'을 표방하는 르세라핌의 일원이 되어 이전에 겪었던 비난을 이겨내고 다시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그녀에게 동경심을 가지게 된다.

 

 


피어나도록,



MZ 세대의 솔직함이 사회를 혼란하게 한다는 평이 많은데, 일정 부분 동의한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해왔던 것들을 부정하고 정해진 것들을 부수는 당당함이지 않나. 살다 보면 견고하고 두텁게 쌓인 담장 안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누군가 그어 놓은 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당장은 더 안정적이니까.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런 솔직함이 있기에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냥 편하고 안정적인 것만 추구하고 안주했다면, 우리가 이만큼 큰 문명을 이룰 순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 때가 많다. 모두가 지구는 네모 모양이라고 말할 때, 지구는 사실 동그랗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우리는 새로운 우주를 맞이할 수 있었지 않나.


솔직해서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요즘이다. 그리고 '지금', 솔직함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인간사의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미디어의 선동, 그로 인한 가치의 세뇌가 자연스러운 현재, 세상을 버텨 내고 있는 모두가 '솔직함'이라는 작은 힘을 가져야 할 바로 그 타이밍이다. 

 

이상한 점이 있고, 불편하다면 그것을 서슴없이 드러내야만 앞으로의 지구를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솔함을 담은, 대범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사랑스레 바라봐 주어야 하지 않을까. 앞장서는 모든 화자에게 따뜻한 이해의 시선이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솔직함을 사랑하는 작은 꽃봉오리가, 조금은 더딜지라도 봄에는 온 천지에 피어날 수 있도록, 겨울을 버텨낼 소담스러운 소망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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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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