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비밀은 무한(無限)이야! - 뮤지컬 '비밀의 화원'

진짜 비밀은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
글 입력 2023.03.2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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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정동극장에서 뮤지컬 [비밀의 화원]을 보고 왔다. 정동극장에서 처음으로 보는 공연이었고, 정말 오랜만의 뮤지컬이었다. 혹시 내가 자꾸 움직여서 다른 관객들에게 피해를 주면 어떡하지, 극장에 오래 앉아있는 게 많이 불편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기대만큼이나 컸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극의 초반까지도 갈비뼈 근처가 답답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숨쉬기가 편해지더니, 끝날 즈음에는 언제 불편했냐는 것처럼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아마 눈물을 참느라 갑갑한 가슴을 신경 쓸 새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웬만하면 잘 울지 않는데, <비밀의 화원>을 보고 나서는 돌아오는 길에서까지 눈물이 나려는 걸 참느라 고생했다. 날이 제법 쌀쌀했는데도 전혀 춥지 않았다. 닫혔던 내 마음속 비밀의 화원을 활짝 열어준 고마운 극이었다.

 

   

 

뮤지컬 [비밀의 화원]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후원자들이 방문하는 ‘오픈데이’. 내일 다가올 오픈데이는 네 명의 아이들 모두에게 마지막 오픈데이다. 후원자들의 마지막 방문을 앞둔 아이들은 희망에 부풀어 열심히 청소한다.

 

그러나 오직 한 명, 찰리만은 비관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 “나보고 뭘 기대하라는 거야?”라며 짜증스레 소리친다. 그는 오픈 데이에 방문할 후원자들이 자신들을 입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희망은 없다고 말한다. 아무도 내게 기대하지 않고,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외치는 찰리에게 에이미는 마지막 ‘비밀 연극’을 제안한다.

 

극의 제목과 같이, 연극에 사용되는 책은 소설 [비밀의 화원]이다.


   

 

비밀 연극에 한계는 없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려는 찰리와 나는 일찍 죽을 것이라며 혼자 체념하는 콜린은 서로 닮았다. 콜린의 다리를 점점 얇아져 가고, 친구들의 비밀 연극을 밀어내는 찰리의 손길은 점점 거세진다. 각박한 세상에서 희망과 활기를 잃어가는 찰리는 나와 내 친구들을 닮았다. 당장 뉴스만 보아도 그렇다. ‘불성실하고 나약한 MZ 세대,’ ‘취업률이 매번 바닥을 찍고 있다’라는 헤드라인들이 내가 가치 없다고 말한다. 앞날은 어둡기만 한 것 같고, 아무리 나를 갈고 닦더라도 나를 도와줄 사람, 내가 나아갈 길은 없는 것만 같은 시대다. 날씨는 어느덧 봄을 향해 성큼 다가가는데, 사회는 여전히 꽁꽁 언 겨울 같다. 나와 내 또래들같이, 찰리의 태도 또한 쌀쌀맞기 그지없다.

 

그래도 친구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메리와 디콘이 콜린을 비밀의 화원으로 데려갔던 것처럼, 에이미와 비글은 찰리를 끊임없이 설득한다. 살아있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속삭이고, 비밀 연극을 시작했던 어린 자신들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조용히 그리고 부드럽게 찰리를 재촉하는 데보라는 찰리의 ‘울새’ 역할을 도맡아 가며 곁을 지킨다. 마침내 찰리가 ‘최초의 울새’를 떠올렸을 때, 그는 자신만의 [비밀의 화원]을 되찾는다. 찰리의 [비밀의 화원]은 에이미와 함께 읽었던 “메리는 울새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리가 없어. 난 사람들이 싫어!”라는 구절이기도, 슬쩍 주워다 만든 울새 모형이기도, 친구들과 함께한 비밀 연극이기도, 아주 약간의, 그러나 절대 사라지지 않을 희망이기도 하다.

 

비밀 연극의 끝자락, 마침내 콜린이 선언한다. “아버지가 없는 곳에선 내가 이 저택의 주인이야.”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며, “아무도 내게 그렇게 말할 수 없어!” 아무도 콜린에게 ‘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다고 외친다. 찰리는 그렇게 본인의 ‘할 수 있음’을 믿게 된다. 그는 이제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의 곁에는 두 다리로 걷게 된 콜린이, 콜린의 손을 잡아준 메리와 디콘이, 그리고 비밀 연극을 계속하자며 손을 내밀어준 보육원의 친구들이 있으니까. 찰리가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을 때, [비밀의 화원]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존재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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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비밀은



다른 길을 가더라도

잠시 멈춰서더라도

책을 펼쳐봐

우린 그 안에 있어

 

안타깝게도, 처음 뮤지컬의 제목을 보았을 때 소설의 세세한 무언가는 기억나지 않았다. 세계문학 전집을 읽어대던 초등학교 시절에서 판타지 소설로 옮겨간 취향에 발길이 뜸해지길 조금, “판타지 소설 좀 그만 읽어라!”라는 어머니의 핀잔에 소설을 멀리하길 또 몇 년, 입시와 전공 서적에 밀려 독서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 지금 이 시점까지. 정말 좋아했던 책이지만, [비밀의 화원]과 나의 간격은 어느덧 10년 가까이 커졌다. 소설 [비밀의 화원]은 나에게 흐릿한 추억이 되었고, 머릿속에 남은 단어들은 ‘메리,’ ‘폐허에서 화원으로,’ ‘알뿌리’ 정도뿐이었다. 내 머릿속 황무지, 그 안의 버려진 정원까지 밀려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뮤지컬로 다시 만난 [비밀의 화원]은 정말이지 마법 같았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던 디콘이 살아있는 것들을 다시 노래했고, 메리가 치마를 확 젖히며 달음박질했다. 마침내 콜린이 일어나 걸었을 때, 내 마음속 비밀의 화원이 다시 열린 것만 같았다. 공연 효과였던 꽃향기까지 맡으니 정말 내가 화원에 온 기분이었다. 잊었던 이야기가 순식간에 살아나 나에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봄, 상상만 하면, 겨울 가득히……. 화원이 열리고, 겨울이 녹아내렸다. 봄의 마법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눈물을 참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 이야기를 곱씹던 나는 찔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로 콜린의 아버지, 크레이븐 경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의 죽음에 아끼던 정원을 봉해버린 크레이븐 경과 동심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비밀의 화원]을 잊어버린 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경에게는 콜린이, 나에게는 아주 작은 동심이 남아있었는데도 우리는 화원을 꼭꼭 걸어 잠갔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찰리와 콜린이 배운 냉소는 세태에 더불어 나의 탓이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할 수많은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읽고 또 잊힐 수많은 이야기. 쓸 곳이 없다고, 효율적이지 않다는 말에 버려진 추억은 얼마나 많을까? 찰리는 비밀 연극을 하자는 친구들에게 “너희들, 이거 현실도피야!”라고 외치기까지 얼마나 많은 ‘헛꿈’을 깨어야 했을까? 예술은, 소설은, 이야기는 무시당하기 쉽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건 시간 낭비라고, 현실도피라고 윽박지른다. 그러나 지친 찰리와 관객에게 에이미는 말한다. 이름도 없었던 말괄량이인 나를 변하게 한 건 네가 들려주었던 비밀의 화원 한 구절이었다고. 아무리 슬픈 날이어도, 비밀 연극을 하고 나면 기분이 나아졌다고 말한다. 예술이란 그런 게 아닐까? 나에게 멋진 추억을 선물하고, 기억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내가 지쳐 멈추어 뒤돌아봤을 때 언제든지 펼칠 수 있도록, 거기에 있어 주는 것 말이다.

 

   

 

우리에게 한계가 없다는 것



우리도 몰라

우리의 한계

 

늘 어른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던 데보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말한다. “보육원에 남고 싶어요.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싶어요.” 언뜻 보면 데보라만 남고 에이미, 비글, 찰리가 보육원을 떠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보육원의 네 명의 친구들은 영원히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길을 걷는 것일 뿐이다. 데보라는 누군가의 가족이 되길 선택한다. 남는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품고 나아간다.

 

“난 여기 있을게. 자주 놀러 와!”라는 데보라의 말이 나머지 세 사람만을 청자로 둔 대사가 아닌 것 같았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전하는, 이야기의 격려라고 생각했다. 꼭 [비밀의 화원]만의 말도 아닌 것 같았다.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말에서 내가 그동안 읽어왔던 수많은 이야기가 나에게 보내는 응원을, 언제나 되돌아올 곳이 있으니, 넌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응원을 느꼈다.

 

조만간 본가에 가서 낡은 책을 펼쳐봐야겠다. 짧은 발을 굴렀던 소파도,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자랑스레 책등에 붙여둘 동그란 스티커도 없지만, 책은 언제나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고선 앞으로 나아가야지. 메리가, 에이미가 그랬던 것처럼 치마를 확 젖히고 뛰는 듯 걸어 나가야지.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계는 없으니까!

 

 

[박주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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