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작은 붕괴,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 [영화]

마블 세계관에 잡아먹힌 가족 이야기
글 입력 2023.03.2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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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 이하 MCU)가 열린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이 거대한 세계관이 영화 프랜차이즈의 판도를 바꾸면서, 그들이 보유한 다양한 히어로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캐릭터이자 미디어 콘텐츠의 거대한 놀이공원이 되었다. 당장 마블의 작품이 하나라도 개봉하면 극장가의 모든 시간대를 해당 작품이 차지하고 만다.

 

그러나, 그만큼 단시간에 세대를 아우르는 즐길 거리가 된 마블사의 작품은 <어벤져스: 엔드게임>이라는 거대한 피날레 이후로 조금씩 힘을 잃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너무 많은 작품과 캐릭터들이 쏟아져나오는 피로감도 있지만, 상업성의 보장을 위한 패턴의 규격화와 세계관을 위해 매 작품이 다음 작품의 징검다리로 기능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점차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이같은 MCU에 대한 우려가 가장 커진 시점에서 개봉했다. 결과는 우려했듯, 처참했다. 관객수도 다른 마블 작품에 비해 적은 편이지만, 그보다도 작품에 대한 언급이 없다시피 하다.


우리는 이 작품에 무엇을 기대했으며, 무엇에 실망했을까.

    

 


 소시민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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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트맨> 시리즈가 호평받은 것은 우리가 알던 히어로와 결이 다른 재미를 보장했기 때문이다. 21세기 자본주의 강대국 미국의 자신만만함을 그대로 대변하는 아이언맨, 자유를 수호하는 정의의 구시대 패권국 캡틴 아메리카, 신적 존재 토르... 이들의 영화는 화려한 폭발과 함께 거대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었다. 이 슈퍼히어로들은 너무나도 '슈퍼'해서, 동경할 순 있으나 공감할 순 없는 것이다.

 

앤트맨은 그 점에 착안해 만든 '생활밀착형' 히어로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나 그로 인한 전과 기록 때문에 취업시장을 전전하고, 배스킨라빈스에서 일을 하다 며칠 안 되어 잘리고 마는, 잘 나가다 형편없어진 아빠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처럼 위인으로 존경해야 할 필요도, 천재 부자 아이언맨처럼 우상으로 우러러볼 이유도 없다.

 

주변에 한 명 정도 있을 듯한 소시민이 사소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것. 개미만큼 작아질 수 있는 이 남자는 마블이 이전까지 그려내지 않았던 '평범함'을 주목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평범한 남자가 우리 세상, 또 우주를 지키는 데에도 조금 이바지할 수 있다는 점은 MCU 작품 간의 작고 단단한 다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앤트맨과 와스프: 퀀텀매니아>는 이러한 앤트맨의 가장 큰 속성인 소시민성을 없앴다. 앤트맨은 이 영화에서 우리의 시간과 우주의 밑바닥에 있는 또 다른 작은 세상을 구해주는 '슈퍼히어로'로써 움직인다. 그는 더 이상 장난감 철길에서 치열하게 싸우지 않고, 개미를 타고 도심을 위험천만하게 달리지 않는다. 소시민성과 밀접하게 연결된 '작아진다'는 앤트맨만의 재미있는 속성은 이 영화에서 빛나지 않는다. 뉴욕이 아니다.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작은 퀀텀의 세상이다. 그곳에서 앤트맨이 더욱 작아진다고 우리에게 어떤 재미를 줄 수 있을까? 오히려 영화는 앤트맨의 작아진다는 키포인트보단 거대해질 수 있다는 속성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 영화의 막바지에 앤트맨은 정복자가 이룬 모든 것을 거대해진 몸으로 밟아 부순다.

 

원주민 저항군과 손을 잡고 우주 정복자로부터 이 작은 양자의 세상을 구해낸다는 흐름은 또한 <스타워즈>를 떠올리게 만든다. 양자 영역에 존재하는 생명체에 대한 빈곤한 상상력이 더욱 그것을 부추겼다. 앤트맨의 속편을 기대하던 팬 중 <스타워즈>를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원래 세상으로부터 떨어진 낯선 존재가 이세계를 구해내는 데 큰 일조를 하고 다시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흐름은 마치 앤트맨을 구세주로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앤트맨만의 사사롭다가도 가슴 따뜻한 매력을 기대하던 팬들에겐 실망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딸을 끔찍이 아낀다는 캐릭터성만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딸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간 공간 속엔 한 발을 디딜 때마다 수십, 수백의 앤트맨이 등장한다. 그가 될 수도 있었던 모든 가능성의 앤트맨들은 한결같이 사랑하는 딸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가족을 위해선 모든 걸 할 수 있는 아빠의 모습은 가족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대다수 국가의 보편적인 정서를 끌어내 공감하게 만든다.

 

 

 

팬심? 불만?


 

마블의 영화를 관심 있게 본 사람들이라면 앤트맨이 캡틴 아메리카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작품만 하더라도 캡틴 아메리카에 대한 그의 경외를 나타내는 대사가 등장한다. 아예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방패로 싸우는 장면을 오마주하거나, 마지막 전투에선 유명 대사인 "I can do this all day"를 몸소 실천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앞으로 등장할 캡틴 아메리카가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방패로 싸우는 남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금발의 캡틴 아메리카 스티브 로저스는 까만 피부에 까만 눈을 가진 그의 사이드킥 샘 윌슨에게 방패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이 사이드킥은 그의 방패를 거절하였으며,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싸우며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로 인정받길 바란다. 근 10년을 넘게 백인인 히어로가 스크린을 점령한 것에 대한 마블사의 반성이자 새로운 뜻을 보여주는 계승이었다.

 

2대 캡틴 아메리카는 앤트맨과의 공통점이 제법 많다. 둘 다 평범한 신체능력을 가진 민간인으로 슈트를 입고 전투를 벌이며, 재정난에 시달리는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모두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속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 히어로 등록제에 대해 반대를 표하며 1대 캡틴 아메리카의 편에 섰던 이들이다.


정리하자면,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로 흑인 캐릭터가 낙점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백인 캡틴 아메리카를 그리워하는 듯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앤트맨이 캡틴 아메리카의 팬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새로 등장할 흑인 캡틴 아메리카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종종 보이는 분위기에서 이는 자칫 "차세대 캡틴 아메리카는 같은 소시민이라도 백인이 더 잘 어울린다"는 불만의 메시지로 해석될 우려가 있다.

 

뭐든 적당함이 중요하다. 앤트맨이라는 히어로는 과함과 우스꽝스러움의 중간에 있었기에 성공했다. 캐릭터성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팬심을 웃음 요소로 활용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자꾸 등장하는 데다 영화 외적 상황과 결부되는 경우엔 오히려 캐릭터성에 해를 끼칠 수 있다.


 

 

나가며


 

영국 동요가 하나 있다. 멜로디 한 소절만 들으면 누구나 아, 하는 곡이다. 런던의 다리가 무엇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조금씩 변형해 반복적으로 노래한다.

 

그 가사엔 "Build it up with wood and clay … Wood and clay will wasy away."라는 구절이 있다.

 

<앤트맨>은 앞서 말했듯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히어로 영화의 작은 틈새를 참신함으로 채워 넣어 메꾸고, 각개의 히어로 작품들을 이어주는 작고 단단한 다리로 기능했다. 말하자면 목재와 점토로 만든 작은 다리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앞으로 전개될 또 다른 마블의 거대한 흐름을 위해 본연의 속성을 많이 잃어버리고 말았다. 물결에 휩쓸리고 만 것이다.

 

작은 붕괴는 반드시 큰 붕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이번 작품의 저조한 흥행과 평을 발판 삼아 최근의 작품들을 되짚어보고 더욱 정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과거의 서부영화처럼 반짝 뜨고 사라질 장르이기엔 아직 보여주지 못한 변주 서사가 많다. 이 장르의 대표 격인 마블의 날카로운 노련함과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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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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