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자취로 내 삶의 점선을 만들어주는 사람 [영화]

"너는 예전의 나처럼, 나는 예전의 너처럼"
글 입력 2023.03.20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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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가 아닌, ‘미소’와 ‘하은’


 

아무개가 이름이 되어 소중해진다는 건, 내 일상에 그의 투명한 그림자가 어렴풋이 드리워진다는 말일 테다. 각자가 안고 있는 세상의 교집합을 공유하고, 그 경계선을 밟아 흐트러뜨리며 서서히 공감대를 넓혀가는 과정. 우린 이렇게 만들어지는 관계를 ‘우정’, 혹은 ‘사랑’으로 분절해 이름 붙여 왔다.

 

물론 나누는 기준은 보수적인 방식을 고수한 ‘성별’. 세계를 공유하는 두 사람이 같은 성별이라면 우정으로, 그리고 다른 성별이라면 사랑으로. 얼마나 간단하고 편한가?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수고할 필요가 없으니.

 

그러나 사실 이 보수적인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모두가 토 달지 않고 받아들이는 관습을 낯설게 느끼는 사람들은 있다. 그리고 똑, 하고 마디로 끊어 규정할 수 없는 관계 또한 있다.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서로에 대한 사랑과 미움과 이해를 똑바로 응시하는 관계. 무수한 관계의 높고 낮은 변곡점들을 파도 타듯 손잡고 건너온 관계. 최은영 작가의 소설 <쇼코의 미소>에 나오는 구절,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가 절로 떠오르는 관계.

 

결코 명징하게 규정될 수 없는, <소울메이트>의 미소와 하은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관계였다.

 

 

 

가장 빛나던 그때, 우리는 함께였다.


 

미소는 큐레이터의 연락을 받고 간 갤러리에서 자기 얼굴을 묘사한 그림을 마주한다. 큐레이터는 그림의 작가님과 연결해줄 수 있겠냐 물으며 자신이 찾은 작가의 블로그를 알려준다. 하은의 블로그다. 미소와의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인 글과 그림들이 있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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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축이 젖은 녹음의 계절에 만나, 스쿠터를 타고 제주를 가르는 바람 같은 나날들을 거쳐, 노란 조명 아래에 도달한 미소와 하은. 그들의 관계성은 초록이 짙어져 푸른빛이 되었다가 안정적인 노란빛이 된다. 둘은 겉으로는 참 달랐지만, 알면 알수록 닮은 사람들이었다. 자유롭고 대담하지만 의외로 세심한 ‘미소’. 그리고 다부지고 순해 보이지만 의외로 날카로운 ‘하은’.

 

함께 햇볕 드는 방에서 뒹굴며 보냈던 어린 시절, “나 그림 못 그리는데”라는 미소의 말에 하은은 “그런 게 어딨어. 그리면 다 그림이지.”라며 응한다. 그녀의 말은 미소가 그림에 첫발을 내딛도록 밀어줬다. 하은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묘사를 잘했지만, 선생님이 되면 좋겠다는 주변의 기대에 낙서를 끄적이는 정도에만 머문다. 반면 묘사에는 관심이 없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던 미소는 미술 수업도 들으며 자유롭게 그려나간다. 둘은 공통 분모를 가지면서도 같이 나아갈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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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둘은 둘도 없는 사이였다. 미소가 하은에게 그녀의 초성으로 만든 귀걸이를 선물하고, 하은이가 하던 관심 있는 남자 얘기에 눈빛이 흔들릴 정도로. 하은이 진우와 사귀게 되자 셋이서 붙어 다니게 된다. 한순간의 흔들림이었을지 감정의 요동이었을지, 진우는 미소에게 마음을 표하고 미소는 뒷모습을 보이며 묘하게 떠나간다. 사귀는 남자가 서울로 가자는 제안에 선뜻 응하면서, 비행기를 타지 못하는 하은을 제주도에 남겨두고 가버린다.

 

둘은 편지로 연락한다. 미소는 남자친구가 공연하는 클럽에서 바텐더 일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지냈고, 하은은 선생님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준비한다. 각자가 살아가는 삶의 울타리는 너무 달랐고, 두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의 간극은 커졌다. 함께 간 부산 여행에서 갈등이 터졌고, 미소는 자신을 뒤따라온 하은을 유리벽 너머 똑바로 응시하며 하은으로부터 멀어졌다.

 

안정적으로 살아오던 하은은 진우와의 결혼을 준비하며 그림에 대한 자신의 열망을 내비친다. 그러나 진우는 ‘묘사를 잘하는 건 재능이 아니라 재주가 아니냐’며 그녀를 지지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결혼식 날, 하은은 도망친다. 어쩌면 그녀가 살면서 처음으로 선로에서 벗어나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탈은 자유로워지고 싶었던,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싶었던 그녀만을 위한 첫 결정이기도 했다. 서울로 가는 비행기가 이륙할 땐, 미소가 알려준 대로 실눈을 뜨며 버텼다. 순간의 공포를 이겨내자 크고 넓은 세계가 아래로 보였다. 반면 미소는 자유롭지만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일상을 그만두고 학교에 다닌다.

 

둘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서로를 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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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린 다른 삶을 살게 되겠지

 

너는 예전의 나처럼

나는 예전의 너처럼”

 

둘은 각자의 자취를 엇갈리듯 되짚는다. 하은은 미소가 예전에 서울에서 살던 집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싶은 얼굴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대상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다며 진우의, 고양이의 얼굴을 그려온 하은은 그 집에서 미소의 얼굴을 그린다. 사랑 없이는 그릴 수 없는 그 사람의 얼굴을.

 

어느 날 하은은 미소의 학교에 찾아간다. 널널한 하은의 원피스 아래로 부푼 배가 보인다. 둘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 그동안의 감정들을 직면한다. 하은은 미소가 진우에 대한 마음이 없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 멀어져가는 미소가 미워서 감정이 응어리진 것 같다며 솔직히 털어놓는다.

 

서로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온 모습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둘의 단단함은 빛났다. 미소는 하은에게 아기를 낳은 후에 하고 싶은 걸 다 하라며, 자신이 돕겠다고 약속한다. 미소는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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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미소의 귀걸이


 

큐레이터를 만나고 온 미소는 그날 마주친 진우와 만난다. 진우는 미소에게 하은이의 안부를 묻고 미소는 모른다고 답한다. 병원에서 아기를 낳은 뒤, 전화로 떠난다는 말을 한 채 자신을 응시하며 떠나버렸다고. 그 뒤로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그래서 하은과 진우의 아기인 ‘안하은’을 자신이 키우고 있다고.

 

그러나 이는 모두 미소의 거짓말이었다.

 

하은은 아기를 낳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어릴 때 27살에 죽겠다고 선포한 미소를 다그쳤던 그녀가 27살에 죽었다. 하은의 병원 짐을 정리하던 중, 그녀는 침대 밑에서 ‘ㅁ’과 ‘ㅅ’을 형상화한 귀걸이를 발견한다. 그 귀걸이 상자에는 하은이가 직접 전해주지 못한 쪽지가 있었다.

 

미소는 하은 어머니의 부탁으로 자신의 흔적을 밟았던 하은의 집에 간다. 그곳에는 미소의 얼굴이 그려지다 만 캔버스가 있다. 미소는 연필을 다부지게 쥐고, 자기 얼굴을 완성해 나간다. 영화 초반에 미소가 갤러리에서 본 그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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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에는 누가 갔을까


 

미소는 어릴 때부터 하은에게 바이칼 호수에 가자고 말했다. 비행기를 무서워하는 하은을 위해 기차를 타고도 갈 수 있다며 꼬시기도 한다. 하은과 떨어져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을 때, 미소는 하은에게 바이칼 호수에 왔다며 거짓말을 한다. 푸른색의 바이칼 호수 엽서까지 써서 보내면서 말이다. 이상적인 자유로움에 닿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을 잊고 싶어서였을까.

 

영화 속에서 하은은 ‘예전의 미소’처럼 살겠다고 한 뒤 바이칼 호수로 간다. 미소에게 ‘미소의 귀걸이’를 전해주고, 기차를 타고, 그림을 그리면서 멀리 떠난다. 그리고 미소에게 엽서도 쓴다. 그러나 하은이 찾아간 바이칼 호수는 미소가 보내준 엽서의 푸른빛이 아니라 하얀색이었다.

 

하은이 준비한 미소의 귀걸이는 미소에게 직접 건네지지 못했다. 그렇다면 미소와 하은 그 누구도 바이칼 호수에 발을 디디지는 못했다는 말일 테다. 어쩌면 미소가 그려낸 자유로운 하은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하은이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도와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이 자유의 이상으로 꿈꾸던 곳에 하은을 보내버렸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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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상으로 꿈꾸는 곳이든 그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현실이든, 어디든 툭 던져 놓고 싶은 사람. 함께했던 기억들을 자취로 남겨 내 삶의 점선을 만들어주는 사람. 기꺼이 모든 감정의 파도를 이겨낼 수 있는 사람.

 

미소와 하은은 그런 소울메이트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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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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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최미옥
    • 영화를 보고싶게 만드네요~
      과거로의 여행이 될거 같아요~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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