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랑의 끔찍한 파괴, 현대 한국 사회의 공유된 비극 - 뮤지컬 '보이체크 인 더 다크'

글 입력 2023.03.1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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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이체크'의 이야기


 

뮤지컬 <보이체크 인 더 다크>는 수평의 원에서 빠져버린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작품의 이름처럼 이 작품의 주인공은 보이체크라는 가난한 군인이다. 뮤지컬은 전반적으로 상징의 대조와 변형과 통합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세계를 의미하는 '어둠' 안에 있는 개인 '보이체크'의 이야기를 드러낸다.

 

이처럼 <보이체크 인 더 다크>는 보이체크라는 캐릭터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기에 다른 캐릭터도 보이체크와의 관계성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본 리뷰도 보이체크라는 캐릭터의 내면심리의 흐름에 따라 내용을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보이체크의 행복과 비극은 술집의 가수인 마리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한다.

 

마리를 향한 보이체크의 사랑은 '수평적', '자연적', '붉은색'이라는 키워드 아래에 모인다. 보이체크가 마리에게 갖는 사랑은 전반적으로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은 인위적이고 폭력적인 것들과 충돌하고 결국 파괴되고 만다. 이러한 파괴과정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각각 대위, 군의관, 전쟁이라는 대조되는 캐릭터와 설정이 등장한다.

 

 

 

2. 수평, 자연, 붉은색


 

우선 첫 번째, 수평적 사랑 부분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마리와 대위의 사랑은 수직적이다. 대위는 무대 위에서 모두의 꽃을 받아내는 만인의 연인 같은 마리를 사랑한다. 그는 그녀를 위해 꽃을 사고, 그녀에게 편안한 생활을 약속한다. 작품 내내 대위는 군인정신이 투철한 캐릭터로 그려지는데, 군대 내 철저한 위계질서처럼 그의 사랑도 어떤 법칙과 질서를 통해 상대를 끌어들이려고 한다. 그는 마리를 유혹하기 위해 아내와 어머니라는 사회적 역할에 걸맞은 편안한 '자리'를 보장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마리는 돈을 받으며 군인들의 관심을 받는 역할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노래를 이해받길 원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대위의 사랑 고백은 그에게 닿지 못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보이체크와 마리의 사랑은 수직에서 수평으로 나아간다. 무대에 선 마리는 보이체크가 박수를 칠 때서야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아래를 바라본다. 마리는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 '평소에는 슬퍼 보이는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자신을 바라보는 보이체크에게 빠져든다.

 

돈으로 구매한 꽃을 던지는 치들과 다르게, 보이체크는 가난 때문에 꽃을 선물하지 않고 마리가 다니는 강변에 꽃을 심는다. 이 수평적 이미지가 강조되는 부분에서 보이체크와 마리가 만나고, 마침내 사랑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일대일 사랑이 아니라 위치와 권력으로 사랑을 이해하는 대위는 그런 그들을 '군인답게',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갈라놓겠다고 결심한다. 그다음에 나올 군의관에게 보이체크를 소개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두 번째, 꽃으로 표현되는 보이체크의 사랑은 '자연적'이다. 꽃을 심는 보이체크에게 마리가 속삭인 것처럼, 꽃은 자연스러운 관심과 애정을 통해 자라난다. 그 말대로, 사랑이라는 것은 지속적이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아름다운 꽃으로 자라난다. 마침내 보이체크와 마리의 사랑은 이루어졌지만 결국 끝까지 마리에게 강변에서 직접 기른 꽃을 건네지 못한다.

 

처음에는 보이체크가 군대생활 중 씨앗을 가지고 있는 것을 들키고 그것을 군화에 망가지는 것으로 이러한 운명이 암시된다. 하지만 보이체크의 자연적인 마음은 더 끔찍한 방식으로 변형된다. 보이체크가 강변에 심는 '씨앗'은 마리와 보이체크의 아이가 병에 걸려 죽어가면서 점점 '콩'으로 바뀐다. 여기서 콩이란 군의관이 건넨 향정신성 약물 같은 것으로, 감정을 죽이고 더 완벽한 군인이 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군의관은 돈을 미끼로 보이체크가 더 잔인한 군인으로 변하도록 한다.

 

'콩 심은데 콩난다'라는 말처럼, 콩은 꽃을 피울 수 없는 씨앗이다. 군의관은 콩의 완벽한 모습을 찬양하면서, 군인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부분의 연출이 흥미롭게 표현된다. 군복을 입은 앙상블이 얼굴의 반을 가리는 가면을 쓰고 보이체크를 중간에 둔다. 각자 손에는 동그란 빛을 만들어내는 손전등이 있다. 보이체크에게 동그란 빛을 비추며 보이체크와 군의관, 앙상블은 원으로 돈다. 넘버 중에는 '돌아버린 세상에서 돌다'라는 표현이 반복돼서 나오는데, 콩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돌아버렸다는 표현도 그렇고 작사가 나름의 아이러니한 유머가 드러난 부분이다.

 

군의관의 말대로, 원이라는 것은 완벽하기 때문에 변형의 여지가 없다. 군의관은 보이체크의 공격성을 증폭시키고 그것을 확인하려다가 그에게 살해당한다. 작품에서는 보이체크의 광기를 묘사하기 위해 뒤죽박죽 표현되지만 이즈음 마리와 보이체크의 아이가 사망하면서 마리가 절망하고 잠시 그의 곁을 떠난다. 홀로 남은 보이체크는 콩을 강변에 심으면서 꽃을 심어야 마리가 돌아온다고 중얼거린다. 영원히 꽃을 피울 수 없는 콩을 보이체크는 강변에 심는다.

 

마지막, 붉은색이다. 마리는 붉은 드레스를 입고 노래를 부른다. 그런 그녀에게 군인들은 꽃을 던짐으로써 사랑을 표현한다. 보이체크에게 마리의 붉은 이미지는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사랑과 욕망으로 박힌다. 그래서 뮤지컬 내내 마리와 붉은색은 동일 선상에 놓인다. 하지만 마리의 붉은 이미지는 점점 다른 이미지로 변형된다. 보이체크가 반복해서 실험을 받으면서 손과 얼굴에 피가 묻는다. 마침내 마리가 그를 떠났을 때, 그의 환상 속에서 함께 춤추던 마리는 붉은 천들에 의해 쫓겨난다. 이 순간 마리의 붉은색이 전쟁의 피로 대체된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이미지의 변화가 이 작품을 비극으로 이끈다.

 

그래서 결국 보이체크는 마리와 함께 삶을 꾸릴 돈가방을 들고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았으면서도, 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한다. 완전히 폐인이 된 보이체크를 마리는 감싸 안는다. 보이체크는 자신이 하늘에 잔뜩 꽃을 피웠으니 안심하라고 이야기하면서, 손에서 칼을 놓지 못한다. 마리는 그런 그의 망상에 어울려주면서 함께 아슬아슬하게 춤을 추다가 보이체크에게 살해당한다. 마리는 보이체크에게 그의 탓이 아니라고 속삭이지만, 보이체크는 자신이 마리를 살해했는지도 모르면서 작품이 마무리된다.

 

 

 

3. 나가며


 

뮤지컬 <보이체크 인 더 다크>는 영리한 작품이다. 다양한 상징을 다양하게 변형하여 사용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작사가의 유머나 센스가 드러난다. 앞서 말했던 군의관과의 넘버는 연출 면에서나 가사 면에서나 아주 흥미로운 부분을 보여주었다. 각 배우의 역량도 대단해서 작품이 끝나고 나서도 오랜 시간 동안 박수를 쳤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극장을 나오면서 찝찝함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그것은 이 작품이 오늘날 한국에서 올려진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나와 아마 대다수의 사람은 수평적 관계에서 사랑을 배양하겠다는, 자식을 낳아 행복하게 기르고 싶다는 순진한 판타지가 참혹하게 부서진 시대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작품이 어떤 교훈이나 메시지를 담을 필요도 없고, 순진한 희망을 불어넣을 필요도 없다고 본다. 가장 참혹한 폐허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우리 인간의 일이긴 하지만, 칼을 든 보이체크의 망상을 인정하고, 칼에 찔릴까를 두려워하면서도 함께 춤을 추는 마리를 살해하는 것은 너무 끔찍한 장면이었다. 사실 이 장면을 보는 내내 나는 정말 큰 절망을 느꼈다. 왜냐면 마리가 망가진 보이체크의 칼 든 손을 놓지 않고 춤을 추는 장면은 이 모든 비극을 이겨낼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꺾어버리는 것을 보고-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이 작품의 제작자가 좀 미웠다.

 

차라리 보이체크가 영원히 살인 기계로 남고, 마리가 야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방식으로 표현했으면 절망감은 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그런 장면을 넣어야 할 정도로 우리가 공유한 어떤 시대정신이 폐허에 가까운가 싶기도 했다. 인간이 자연스럽게 가지는 순수한 판타지를 잃어버리고 그 손으로 직접 파괴하는 결과에 이르는 것. 시대적 비극을 잘 다룬 좋은 작품을 보았다고 좋아하는 것이 정말 자연스러운 일인가 싶다. 불유쾌하다고 좋은 작품이 아닌 것도 아니고, 뮤지컬은 아주 좋았지만, 내가 다다른 감상은 정말 기묘한 것이었다. 작품 내내 일년이 지나 오월은 다시 찾아왔는데, 꽃핀 날은 보이지가 않는다.

 


[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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