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일렁이는 풍경, 감정의 트리거(trigger)로써의 추상 [미술/전시]

갤러리현대 《정주영: 그림의 기후(Meteorologica)》전
글 입력 2023.03.1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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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그림의 기후 copy.jpg

 

 

갤러리현대에서 2월 15일부터 3월 26일까지 열리는 정주영 작가의 개인전 《그림의 기후(Meteorologica)》는 작가의 ‘산-풍경’ 시리즈 중 <알프스> 연작과 연작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작품들은 풍경화다. 구체적인 형상은 없는 추상화된 풍경이다.

 


IMG_7939 copy.JPG정주영, 그림의 기후 5 copy.jpg

 

 

그림의 색조와 질감이 원초적인 시각적 기쁨을 준다.

 

캔버스가 내뿜는 오묘한 빛이 특징적인데, 그림들은 전시 제목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 맑음, 흐림, 밝음, 어두움, 추위, 더위, 차가움, 따뜻함과 같은 계절과 기후의 상태를 차분히 표현해낸다. 투명에 가까울 정도로 물감의 농도를 옅게해 여러 겹의 색을 칠하는데, 차곡차곡 쌓아 올린 물감층들이 깊이를 더한다.

 

작가는 한번에 혼색을 하는 것보다 삼원색을 섞어 칠하게 되었을 때 나오는 회색이 먹구름이 가지고 있는 깊고 어두우면서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 긴장감을 잘 표현한다고 말한다.

 

질감은 또 어떠한가. “그리기와 쓰기가 공존하는 방식”, “페인팅과 드로잉이 교차하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작가는 반복해서 면을 칠하고 선을 긋는다. 멀리서는 크레용으로 칠한듯 보이지만 캔버스에 가까이 다가가면 무수한 가느다란 선들이 눈에 들어온다. 붓의 수천개의 털들이 훓고 지나간 흔적이다.

 

작가는 “작은 화면도 큰 장면을 담을 수 있고, 큰 그림에도 그냥 구름 하나만 들어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그가 묘사하는 장면의 스케일은 다양하다. 어떤 그림은 거대한 산을 눈 앞에 가져다 둔 것처럼 캔버스 전체가 푸른 색으로 꽉 채워져 있다.

 

반면,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 볼 때 뭉게구름 사이 하늘과 산이 언뜻언뜻 보이듯 파란색과 초록색이 아른거린다.

 

 

정주영, 그림의 기후3.jpg정주영, 그림의 기후4.jpg

 

 

정주영 작가의 그림은 감정의 트리거(trigger) 같다. 관람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그 경험에 수반되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이라는 소재 자체가 우리 모두 보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고 우리 주변의 거의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기에 어떤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저하게 경험을 바탕으로 작업하는 정주영 작가의 방식이 그 감정의 강도를 강화해 마음을 크게 움직인다.

 

필자의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자면, 주황빛의 는 초등학생 때 살던 32평 아파트에서 설거지하는 할머니의 뒷모습과 그 앞에 난 조그만 창문으로 들어와 집 안 가득 주황빛으로 물들이던 노을, 그 오래전 이미지를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주었다.

 

노을 앞에서, 먹구름 아래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느끼는 감정의 울렁거림을 전시장으로 가지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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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추상화의 형태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동시대 회화는 모더니즘 시대의 “서사가 있는 구상화 vs. 서사가 없는 추상화”의 이분법에서 벗어난다.

 

1950년대 미국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납작함(flatness)과 색(colour)을 회화에 내제된 주요 요소로 보고 시각적인 반응을 회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규정했다.

 

모더니즘 시대에 회화는 회화다워야 했다. 재현의 역할은 카메라 발명 이후 그림에서 사진으로 바톤 터치하듯 넘겨졌으니, 화가들은 오직 회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탐구했다. 그로써 납작한 화면 위 점, 선, 면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스토리는 사라지고 순수한 화면이 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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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으로 가득찬 그림들은 언뜻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의 그림으로 대표되는 색면회화(Colour field painting)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정주영 작가의 어둡고 미묘한 회색과 청색을 담은 그림은 결국 그가 실제로 마주했던 먹구름, 그리고 그 마주침이라는 경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목적은 구름을 정확히 재현하는 것도, 그저 심미적 효과를 주기 위함도 아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구현해 스토리가 있는 추상이다. 마크 로스코나 바넷 뉴먼의 숭고함은 결여되었을지라도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는 기후의 변화처럼 정주영 작가의 그림은 섬세하고 친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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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철학자이자 작가인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그의 책 <영혼의 미술관>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술을 감상하는 목적은 특정 화가와 아주 똑같이 반응하는 법을 배우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그녀의 근본적인 방법에서 영감을 얻어야하며, 이는 우리 눈앞에 펼쳐진 자연에서 특별히 무엇이 내 마음에 드는지 알아내, 그 경험을 가슴깊이 받아들여야함을 뜻한다. 그리고 그 열광이 무엇인지 가려낼 때 자연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지속되며 치유의 힘을 더 깊이 발휘할 수 있다."

 

우리는 정주영 작가의 그림 앞에서 나의 기분과 느낌, 감정을 헤아려보고 자연에서 어떤 기후, 계절, 색을 특별히 좋아하는지 탐구해 볼 수 있으며 '나'에 집중하는 치유의 시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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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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