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최대한 2순위의 존재 [사람]

글 입력 2023.03.1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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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 서울에서 방을 빼고 본가로 내려왔다. 넓지도 않은 방에, 단촐하게 생활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차곡차곡 늘려온 세간 살림이 차 한 대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언제 이렇게 짐을 늘려왔던 것일까. 쌓인 박스 더미를 보며, 시골쥐가 꽤 열심히 상경 생활을 버텨보려 했구나,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다. 막상 이곳에서의 생활을 정리하자니 어쩐지 허전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하지만 잠깐의 멈춤을 결정하게 되기까지 가장 큰 이유가 된 것이 바로 이 도시의 번잡함이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생활하면서 몇 년간 참 많은 애증을 느꼈더랬다. 물론 내가 비교적 예민한 성격이라는 성향상의 이유도 있을 터이고, 타고나길 활력과는 거리가 먼 나의 마인드는 도시를 기회의 땅보단 피곤스럽고 경쟁적인 속세로 읽어내곤 했다. 러시아워의 지하철, 피곤에 찌든 얼굴들로 가득한 그곳의 공기만큼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의 드라이한 자세와 눈빛, 짜증이 습관처럼 배인 미간, 철길을 긁는 금속성의 소음과 지독하게 섞인 체취들. 어느 순간부터 옆을 스치는 행인들의 대화가 식별되는 것마저 견딜 수 없어졌다. 그것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시선을 핸드폰에 처박고 이어폰을 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흔한 얘기다. 어쩌면 진부할 정도의.

   

2. 감각 ‘당할’ 것이 너무 많은 현대 사회에서 특별히 감각 ‘하고자 하는’ 것, 마음에 두고 싶은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계속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욕구를 가질 만큼 불명확한 그리움과 답답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좋아하는 것보다는 싫어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행복이나 고양감보다 익숙한 감각은 피로, 짜증, 회의와 같은 것들. 그렇기에 원하지 않는 자극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무뎌졌다. 그 무뎌짐은 어쩌면 자신의 민감도(사랑하는 것들에 대한)를 잃지 않으려 찾아낸 나름의 방안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시의 ‘과함’에 대처한다. 불필요한 자극의 요인을 여행과 같은 이벤트를 통해 잠시 치워버리고 감각의 주체성을 회복하든지, 그러지 못하는 일상 속에서는 무감각과 무관심의 적응 기제를 적극 활용하든지. 그래서 이 뻔한 사변의 결론은 무어냐. 사람들은 이미 원하지 않는 소음 속의 무뎌짐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3. 물론, 정말로 지금의 도시가 무관심한 익명들의 집합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극단적인 해석이라는 감이 있다. 어찌 됐든 사람 사는 곳이니만큼, 유대와 애정이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할 터이다. 홍대입구역 8번 출구 앞에서 무표정하게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다가오는 일행을 발견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색채 가득한 얼굴을 한다. 전략적으로 무관심을 두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친밀한 사람들에게까지 그렇게 굴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친밀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간의 경계가 좀 더 확실히 그어지고,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순위가 정확하게 매겨질 뿐이다. 우선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시간과 관심을 기꺼이 할애한다. 인지할 필요가 있는 것과 없는 것들을 가늠하는 일은 이제 습관이 되었다.

 

4. 그리고 내가 염증을 느낀 이유는, 이 복잡한 곳에서의 생활이 때때로 1순위에 둘 수 있는 존재를 제한했다는 점이다. 정말 솔직히는 가족들, 고향의 친구들, 함께 상경하거나 타지로 나간 친구들, 도시에서 새롭게 사귄 사람들, 나를 제외한 이들 모두는 내가 놓인 상황에 따라 그 순위가 오르내렸다. 내가 아니면서 나만큼 우선할 수 있는 존재를 여럿 두기에는 삶이 그리 넉넉지 않은 것이다.

 

내가 겨우 기회를 쫓을 동안, 이방인으로서 이곳에 적응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동안 뒤로 밀려나는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건 각자의 도시에서 생활하는 나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좀처럼 나를 찾는 일이 없는 친구들, 지인들에게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꼭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번잡한 삶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 이외의 것들을 잠시 음소거해 둔 그들의 마음을 말이다.

   

5. 그래서 나는 요즘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최대한 2순위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삶을 생존으로 느끼게 하는 세상에서, 때때로 선택적인 나의 무관심함에 양해를 구하고, 상대의 겨를 없음을 이해하며, 한숨 돌릴 수 있는 날이 되어서야 미뤄뒀던 애정을 표현한다. 이 과정엔 분명 온기가 존재한다. 다만 그 온기는 가늘게, 드문드문, 간신히 이어진다. 마음이 외로움에 완벽히 얼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딱 그만큼의 온기.

 

이 미약함을 개인주의라고 칭해야 할까, 소홀함의 합리화라고 해야 할까, 그나마의 최선이라고 보아야 할까. 내가 몸담은 곳이 더 크고, 빽빽하고, 이질적일수록 서로가 2순위 이상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이런저런 질문들과 함께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지는 양가감정이 들었다. 나의 소홀함과 상대의 소홀함은 모두 이해가 되었다가도, 이따금 아무것도 이해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6. 결국 이런 류의 저울질 자체가 내 모든 소중한 것들을 빛 바래게 한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을 때쯤, 물리적인 차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인파에서 혼잡함보단 사람들의 생기를, 타지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선 피로함보단 설렘을 느끼고 싶었다. 번잡함 속에서도 관계에 대한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에 나는 조금 무르고 마모가 빠른 편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버틸 수 없다면 버틸 수 있는 환경을, 핑계댈 것도 없는 상황을 만들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내린 결정은 잠시 멈춰가자는 것. 감히 그 우선도를 가늠하기에는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을 제대로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나는 지금, 서울을 떠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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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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